• 스마트워치 파워에 주춤한 스위스 시계 산업

    입력 : 2020.04.03 16:02:49

  • 시계의 나라 스위스가 우울하다. 매년 3월을 전후해 열리던 세계 최대 규모의 명품 시계·보석 박람회인 ‘바젤월드’가 올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취소됐다. 바젤월드 운영위원회는 “스위스 정부가 발표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대규모 실내행사 금지 정책에 따라 2020년도 행사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바젤월드의 뒤를 이어 열릴 예정이던 또 다른 대형 시계박람회 ‘워치스&원더스 제네바(WWG·Watches & Wonders Geneva)’도 같은 이유로 취소됐다. 이 두 행사는 스위스가 왜 시계 대국인지 가늠할 수 있는 전 세계 고급 시계 행사의 양대 축이다. 오메가를 비롯해 브레게, 론진, 티소 등을 거느린 스와치그룹이 바젤월드를, 까르띠에, IWC, 예거 르쿨트르 등을 둔 리치몬트그룹이 WWG를 이끌고 있는데, 두 그룹 모두 스위스의 대표적인 럭셔리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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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G는 매년 1월 제네바에서 열리던 스위스국제고급시계박람회(SIHH)가 바젤월드 직전으로 시기를 옮기면서 이름도 바꿨다. 두 박람회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한 묘책이었는데, VVIP고객과 바이어, 언론인들이 WWG를 둘러보고 바로 바젤월드까지 참석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급격히 늘며 이러한 노력에 빛이 바랬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착용해본 후 구입하는 고급 시계의 특성상 박람회는 마케팅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바젤월드의 역사가 100년을 넘긴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대표적인 두 행사가 모두 취소되며 비상이 걸렸다. 국내 수입업계의 한 관계자는 “바젤월드와 WWG에서 전 세계 고급시계 업계의 수출·수입량과 트렌드가 결정된다”며 “특히 한정수량으로 생산되는 제품의 경우 각국의 수입량이 박람회에서 결정되는데, 이런 기회가 연기되거나 없어진 것”이라고 전했다.

    애플워치
    애플워치
    ▶지난해 애플워치 판매량 스위스産 넘어서

    스위스 시계 산업의 위기론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바젤월드의 취소가 발표되기 20여 일 전엔 스마트워치에 빼앗긴 위상이 거론되며 벼랑 끝에 몰린 현 시점이 조명됐다. 지난 2월 7일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약 3억70만 대가 팔린 애플워치의 판매량이 스위스 시계 산업 전체 판매량(2110만 대)을 넘어섰다. 첫 출시된 2015년 이후 애플워치는 2017년 4분기에 약 800만 대가 판매되며 같은 기간 스위스 시계 판매량(700만 대)을 넘어섰다. 연간 판매량이 앞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18년 판매량과 비교하면 애플워치는 전년 대비 36%(2018년 약 2250만 대) 늘었다. 하지만 스위스산 시계는 13%(2018년 약 2420만 대) 줄었다. SA는 “젊은 세대가 스마트워치를 선호하고 북미, 서유럽, 아시아권에서 애플워치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전 세계 스마트워치 시장점유율은 애플 47.9%, 삼성전자 13.4%, 핏빗 11.3% 순이었다. SA에 따르면 애플은 전년 대비 51%, 삼성전자는 73%나 출하량이 늘었다.

    스마트워치 시장이 그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SA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가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스마트워치에 영향을 미칠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며 “럭셔리 시계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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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시계 산업의 위기가 거론되자 1970~1980년대를 강타했던 ‘쿼츠 파동’이 재등장하기도 한다. 1969년 일본의 세이코가 ‘아스트론’이란 시계를 출시했다. 그때까지 시계는 태엽을 감아줘야 돌아가는 기계식 시계가 전부였다. 아스트론은 이런 기계식 시계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수정 진동자에 전기를 흘려 작동하는 쿼츠(Quartz) 방식이었다. 쉽게 말해 태엽이 할 일을 전기가 대신했다. 시계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완성한 기계식 시계와 달리 쿼츠 시계는 후다닥 뚝딱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당연히 시계의 가격은 떨어졌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스위스의 여러 브랜드가 몰락하거나 합병됐다. 그야말로 파동이었다.

    쿼츠의 장점은 무엇보다 원가가 싸고 내구성이 강했다. 여기에 시간이 정확하고 배터리를 갈아주는 것 외엔 유지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했다. 배터리가 다되거나 파손되면 시계가 고장 나거나 멈춰 섰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도 크고 대부분의 제품이 일률적으로 작동됐다. 결론적으로 스위스의 시계 산업은 당시 파동을 뛰어넘어 건재하다. 쿼츠의 단점을 파고들며 그들이 선택한 건 역시 ‘럭셔리’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기계식 시계가 ‘사치품’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며 스위스 시계 산업은 암흑기를 벗어났다.

    스위스 바젤월드
    스위스 바젤월드
    각각의 브랜드는 현재의 스와치, 리치몬트, LVMH 등 럭셔리그룹으로 재편되며 그 아래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동안 시계의 위상은 ‘럭셔리의 마지막’으로 불릴 만큼 높아졌다. 일각에선 당시의 쿼츠 시계가 지금의 스마트워치와 비슷한 위치라고 설명한다.

    한 럭셔리 브랜드 매니저는 “쿼츠 파동 당시에도 고가의 브랜드는 큰 영향을 받지 않고 명맥을 유지했다”며 “스마트워치의 인기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가격이 비슷한 중저가 기계식 시계가 아니라면 영향이 미미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철 디지털칼럼니스트는 “스마트워치의 장점 중 하나는 개성에 따라 워치페이스를 바꾸고 제품별로 피트니스 기능이나 심박수 체크 등 장점이 다르다는 점, 또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해 추가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분해해 수리해야 하는 기계식 시계와 달리 잔고장이 없는 편이고 가격도 저렴해 가성비가 높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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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틸시계는 줄고 고급소재 시계는 늘고

    그렇다면 실제 스위스 시계 산업의 실적은 어떨까. 스위스시계산업연맹(Federation of Swiss Watch Industry·FH)의 지난해 집계를 살펴보면 수출 시장의 파이는 작아졌지만 가치는 상승했다. 스위스의 시계 수출량은 지난해 총 217억프랑(CHF)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2.4% 증가했다. 하반기 성장률(3.2%)이 상반기(1.5%)보다 약 2배 높았지만 범죄인 인도법 반대로 촉발된 민주화 요구 시위로 홍콩 실적이 좋지 않아 4분기 성장률(1.1%)이 둔화됐다.

    홍콩의 상황이 여전히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지난해 스위스 시계 수출량의 절반 이상은 아시아(53%)가 차지했다. 유럽이 30%, 미국이 15%로 그 뒤에 자리했다. 좀 더 세분화해서 살펴보면 지난해 아시아로의 시계 수출은 2018년 대비 2.3% 늘었다. 그렇다고 아시아 각국이 모두 평균에 가까운 건 아니었다. 홍콩은 6월 이후 발생한 시위로 -11.4% 하락했다. 반대로 중국은 성장속도를 높여 16.1%로 마감했다. 일본은 19.9%, 싱가포르도 14.6%나 성장하며 아시아에서 3번째로 높은 상승곡선을 그렸다.

    SIHH 행사장
    SIHH 행사장
    전체 수출액의 95%는 손목시계가 차지했다. 전년 대비 2.6% 증가한 200억프랑을 넘어섰다. 반대로 품목 수는 13.1% 감소했다. 수출물량도 2060만 대로 전년 대비 310만 대가 줄었다. 1984년 이후 35년 만에 가장 적은 수출량이다. 다시 말해 적게 팔았지만 매출은 늘었다. FH는 “수출가격이 3000프랑이 넘는 고급 기계식 시계가 가치 상승을 이끌었다”며 “지난해 일반 스틸제품의 판매는 감소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경향은 스위스 시계 산업을 이끌고 있는 스와치그룹과 리치몬트그룹(4월 1일부터 회계연도 시작)의 실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리치몬트그룹은 지난해 상반기에 139억8900만유로의 매출을 올리며 전년(110억1300만유로) 대비 27% 성장했다. 영업이익도 19억4300만유로(약 2조5632억원)로 전년 대비 5% 늘었다. 반면 약 20개의 브랜드를 거느린 스와치그룹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1% 감소한 10억2000만스위스프랑(약 1조1300억원)이라고 밝혔다.

    한 업계 관계자는 “1만원대 손목시계부터 수억원대 브랜드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한 스와치그룹은 고급 시계와 주얼리가 포진된 리치몬트그룹에 비해 대중성은 높지만 희소성 면에서 떨어진다”며 “환율 등 외부영향이 있지만 고가 브랜드의 파워가 여전한 데 반해 중저가 브랜드 제품이 스마트워치 등 여타 제품군에 위협받는 시장상황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성전자 스마트워치 ‘갤럭시워치 액티브2’
    삼성전자 스마트워치 ‘갤럭시워치 액티브2’
    FH가 꼽은 향후 스위스 시계 수출 전략의 위험요소는 ‘스위스프랑의 강세’ ‘홍콩의 마비’ ‘미국 대통령 선거’ ‘감염병’ ‘물리적·디지털 유통의 변화’ ‘Y·Z세대의 소비형태’ 등으로 요약된다.

    지난해 스위스 시계 산업의 어려움 중 하나는 단연 6개월간 이어진 홍콩의 민주화 요구 시위였다. 부가가치세가 낮아 수익률이 높은 홍콩은 스위스 시계가 가장 많이 팔리는 황금어장이다. 시위가 잠잠해질 무렵엔 코로나19가 전 세계 시장을 잠식하며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과연 스위스산 시계로 대표되는 기계식 시계의 위기론이 건재나 부활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한 럭셔리 브랜드 매니저는 “국내 시장의 경우 롤렉스를 비롯한 고급 브랜드를 찾는 젊은 층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며 “자신만의 개성을 나타내는 감수성과 희소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고객군을 공략한다면 기계식 시계의 역할이 단순히 보는 시계에서 느끼는 시계로 넓어지며 시장도 늘어날 것”이라고 전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5호 (2020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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