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재계 경영 트렌드 짚어보니... ‘고객’이 으뜸, 조직 문화 혁신에 방점

    입력 : 2020.01.29 14:48:12

  • 국내 주요 기업들이 새해를 맞아 고객 요구에 부응하는 혁신을 통해 성장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수 기업들은 신년 경영 화두에 ‘고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재계 신년사를 통해 살펴본 2020년 기업들의 경영 방향은 ‘고객 중심 혁신’과 ‘수평적 조직 문화’, ‘디지털 전환’을 통한 미래 성장으로 요약된다. 내수 경제 둔화와 불안정한 대외 무역환경, 급변하는 시장의 미래에 대응하는 혁신을 위해 고심 끝에 선택한 키워드가 ‘고객’과 ‘디지털’ 등인 셈이다.

    자칫 ‘뻔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 화두인 고객 중심 혁신은 사실 최근 기업들의 경영 트렌드를 쉽게 알 수 있는 표현이다. 대외 환경 악화와 글로벌 경쟁 격화에 따라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변화가 필수적이라는 게 기업들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국내 재계 총수들과 CEO들은 한 해 경영 방향을 밝히는 신년사에서 ‘고객’의 중요성을 어떻게 강조했을까. 재계 신년사를 통해 2020년 재계 경영 트렌드를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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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경영 톱 키워드는 ‘고객’

    국내 10대 그룹이 올해 신년사에서 가장 많이 강조한 핵심 키워드는 단연 ‘고객’이었다.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농협 제외·11위 신세계 포함)의 2020년 신년사에서 ‘고객’은 총 56회 언급돼 가장 자주 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장(42회), 미래(28), 혁신(23), 역량·가치·지속(21회), 변화·글로벌·새로움(20회) 등이 뒤를 이었다.

    ‘고객’을 가장 많이 언급한 기업은 단연 LG그룹이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신년사를 통해 고객 가치 실현을 강조했다. 구 회장은 고객이라는 단어를 24차례나 사용했다. 지난해에도 30차례 고객을 언급해 확실한 경영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구 회장은 “2020년은 고객 가치를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 고객 관점에서 고민하고 바로 실행하는 실천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고객의 페인 포인트(Pain Point·불편한 부분, 고충)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 회장은 이어 “고객의 마음을 읽었다면 앉아서 검토만 하지 말고 방향이 보이면 일단 도전하고 시도해야 한다”며 “안 되는 이유 백 가지를 찾는 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해야 되는 이유 한 가지를 위해 바로 나설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LG그룹 외에도 현대차그룹, 롯데그룹, GS그룹, 신세계그룹 등 기업의 총수들이 신년사에서 고객을 수차례 언급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모든 변화와 혁신의 노력은 최종적으로 고객을 위한 것”이라며 “우리의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의 행복이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기업가치이며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또 “회사의 성장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의 행복”이라면서 “우리 기업의 활동은 고객으로부터 시작돼야 하며, 고객과 함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신년사에서 가장 먼저 고객과의 소통과 공감을 강조했다. 신 회장은 “고객과의 지속적인 공감을 통해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며 “고객과 지속적으로 소통해 고객의 니즈, 더 나아가 시대가 추구하는 바를 빠르게 읽어내 창조적이고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고객 제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고객에 대해 ‘광적인 집중’을 해야 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정 부회장은 “빠르게 변화하는 유통 환경에 대응하려면 고객 목소리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며 “2020년은 고객 목소리가 더욱 크고 명쾌하게 들리는 한 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신년사를 하지 않았지만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이 신년사에서 “한 치 타협 없는 품질 경쟁력 확보로 고객에게 신뢰받는 브랜드로 거듭나자”라고 주문해 고객 중심 경영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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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객에 다가서기 위해 ‘조직 문화 혁신’ 강조하는 기업들

    전문가들은 기업들의 이러한 ‘고객 중심 혁신’ 기조를 글로벌 경쟁 심화에 대응하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분석했다. 내수 시장 성장 둔화에 따라 해외 시장 경쟁력을 확보해야하는 기업들에게는 각양각색인 현지 고객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강혜진 맥킨지 한국사무소 파트너는 “기업들이 수평적 조직 문화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현장의 고객 요구를 빠르게 반영하기 위한 고객 중심의 혁신 시도”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대기업들의 경우 고객의 요구가 시장마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현장 중심의 경영이 더욱 중요해졌고, 이를 위해 수평적 조직 문화가 필요해졌다는 얘기다.강혜진 파트너는 “현장에서 센싱된 고객과 시장 요구가 제품 기획·생산 등 단계로 올라와 신제품에 반영되려면 현장과 본사가 효율적으로 직통할 수 있어야 한다”며 “직급을 줄이거나 파괴하고 호칭을 통일하는 것은 이러한 단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라고 분석했다.

    주요 기업들의 신년사에서도 조직 문화 혁신과 수평적 소통 확대에 대한 강조는 여러 차례 등장했다. 결국 이 또한 기업들이 가장 많이 강조한 ‘고객 지향’과 맞닿아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미래 시장 리더십 확보의 원동력은 바로 우리”라며 “거대한 조직의 단순한 일원이 아니라 한 분 한 분 모두가 스타트업의 창업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창의적 사고와 도전적 실행을 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하면서 “저부터 솔선수범해 여러분과의 수평적 소통을 확대하고 개개인의 다양한 개성과 역량이 어우러지는 조직문화가 정착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수평적 소통이 창의적 사고와 도전적 실행의 밑바탕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직된 기업문화와 관성적인 업무 습관을 모두 버려야 할 것”이라며 “직급, 나이, 부서를 막론하고 자유롭게 소통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 달라”고 강조했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 또한 신년사에서 “익숙한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향해 과감히 도전하고, 누구나 크게 말하며 토론과 학습이 활성화되는 ‘수평적이고 역동적인 조직 문화’를 함께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최근 기업들이 젊은 임원들을 대거 발탁하고 전면에 내세운 것 또한 조직 문화를 변화시키는 효과가 기대된다. 지난해 말 LG그룹은 신규 임원 승진자 중 70% 이상을 1970년대 이후 출생자로 채웠고, 한화그룹의 경우 신임 상무보 74명 중 절반 이상이 1970년대 출생자였다. 이처럼 ‘X세대’가 기업의 주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직 문화 유연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기업들에게 2020년은 경직적인 기업문화를 계속해서 부숴나가는 변혁의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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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신년회·신년사 생략…

    격식 파괴 시도 多

    기업들이 수평적 조직 문화 조성에 공을 들이고 있는 만큼 올해 재계 신년사와 신년회에서는 격식과 틀을 과감히 파괴한 다양한 방식들이 눈길을 끌었다. 권위주의적 형태를 띠기 쉬운 시무식 또한 모습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취임 3년차를 맞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아예 오프라인 모임을 없앴다. 대신 신년사를 담은 디지털 영상 ‘LG 2020 새해편지’를 전 세계 LG 임직원들에게 전달했다.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구성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취지다. 영상 메시지에는 외국인 직원들을 위해 영어 자막과 중국어 자막이 첨부된 버전도 포함됐다. LG그룹은 1987년 LG트윈타워 준공 이후 여의도에서 새해모임을 진행해왔고, 지난해에는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700여 명이 모인 바 있지만 올해는 파격을 택했다. 권봉석 LG전자 사장도 시무식을 대신해 임직원들에게 이메일로 신년 메시지를 전했는데, 보통의 문체가 아닌 ‘일기’ 같은 표현을 사용해 신선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SK그룹은 조금 더 파격적인 시무식을 선보였다. 지난해 시무식도 계열사 CEO들의 토론에 이어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마무리 발언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형식 파괴를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올해는 최 회장이 아예 뒤로 물러나고 일반 시민과 신입사원들이 전면에 섰다. SK그룹은 최 회장의 신년사 없이 소셜 벤처를 지원하는 회사 이해 관계자들과 신입사원 등의 대담으로 신년회를 진행했다. 또 SK하이닉스는 신년사를 낭독하던 형식에서 벗어나 이석희 사장이 ‘TED’ 강연 형식으로 경영 방침을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재계 관계자는 “시무식의 변화는 기업들의 조직 문화 유연화 트렌드를 보여준다”며 “특히 그룹 총수를 비롯한 CEO들의 의지와 노력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라고 말했다.

    ▶재계의 피할 수 없는 대세, ‘디지털 전환’

    대부분 주요그룹 총수들은 신년사에서 급변하는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전환)’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을 맞은 기업들에게 디지털 전환은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는 것이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을 적용한 경영 효율화 및 자동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이미 파괴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기존 사업 분야에 얽매이지 말고, 우리의 역량을 바탕으로 선제적으로 혁신하고 시장을 리드하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며 “디지털 전환을 통한 비즈니스 혁신은 우리가 반드시 이뤄나가야 하는 과제임을 명심해 달라”고 강조했다.

    허태수 GS그룹 회장도 “중장기적으로 우리가 보유한 핵심 기술에 디지털 역량을 접목하고 핵심 사업 연관 분야로 신사업을 확장하는 한편 국내 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확대해 간다면 미래시장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며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힘써 달라”고 요청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또한 “올해가 그룹 디지털 혁신의 원년이라는 각오로 각 사에 맞는 디지털 변혁을 추진해 변화·성장의 기회로 이끌어야 한다”면서 “4차 산업혁명에서 촉발된 기술을 장착하고 경영전반에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적극 구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은 그룹의 첫 번째 지향점으로 “디지털 대전환 시대를 대비하는 최첨단 조선, 에너지 그룹으로의 변신”을 꼽았다.

    최정우 포스코 회장은 글로벌 산업 성장세가 꺾이고 수요가 감소하는 ‘피크쇼크(Peak Shock)’를 우려하면서도 신(新)모빌리티, AI 산업의 활성화에 따라 신성장 동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기대에 걸맞게 포스코는 기술연구원에 AI 전담조직을 새롭게 설치해 혁신 기술 확보에 매진하고 있다.

    다른 주요 기업들도 이미 피크쇼크 등 산업 지형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디지털 전환 속도를 높이고 있다. 디지털 전략 구사를 위한 전담 조직을 신설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LG전자는 디지털 전략을 가속화하는 컨트롤타워로 CSO(Chief Strategy Office) 부문을 신설했다. CTO(Chief Technology Officer) 부문에는 미래기술센터를 마련해 산하에 인공지능연구소, 로봇선행연구소, SW사업화PMO를 설치했다. 이외에 GS칼텍스는 미래 성장 비즈니스를 발굴할 조직인 미래전략TF팀을, LS그룹은 구자은 LS엠트론 회장을 주축으로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는 미래혁신단을 각각 운영하고 있다.

    업무 처리 환경 또한 신기술을 접목한 디지털 전환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3월부터 AI 채팅 로봇인 ‘켐봇’을 업무 포털에 도입했고, 롯데케미칼은 대산공장에 안전체험을 설치해 컴퓨터그래픽(CG) 기반 가상현실(VR) 콘텐츠 장비로 안전 교육을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업무 환경 변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디지털 전환이 사업 모델·업무 방식·문화·고객 경험 등 경영에 총체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주요기업들은 사활을 걸고 있다”며 “이러한 혁신에 ICT 기업인지 전통 제조회사인지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만큼 2020년은 모든 업종에서 급진적 변화가 일어나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임형준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3호 (2020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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