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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당구에 뛰어든 4가지 이유
입력 : 2019.12.31 11: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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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국내 프로스포츠계의 이슈 중 하나는 당구의 프로화다. 2019년 초 프로당구추진위원회와 스포츠마케팅 전문회사인 ‘브라보앤뉴’가 프로당구 출범선포식을 열고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처럼 거액의 상금을 걸고 선수들이 경쟁하는 리그를 만들겠다”며 3쿠션 프로리그인 ‘PBA 투어’ 개최를 발표했다. ‘직업인으로 당당한 당구인’이란 슬로건 아래 지난 5월 출범한 프로당구협회(PBA)는 세계 최초로 글로벌 프로당구 투어인 PBA와 LPBA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2019년 6월 1차 대회를 시작으로 12월 6차 대회를 마친 PBA-LPBA 투어는 현재 순항 중이다. 출범 초기 선수 수급 문제 등으로 아마추어연맹인 세계캐롬연맹(UMB), 대한당구연맹(KBF) 등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일단 투어가 시작되자 흥행에 가속도가 붙었다.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여섯 번째로 출범한 프로 당구의 상승세에 각 기업들의 스포츠마케팅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PBA 측은 “매 대회마다 타이틀 스폰서들은 반응이 만족스러웠다”며 “2020년 3월에 열릴 8차 대회까지 스폰서 계약이 확정 단계”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스폰서로 참여했던 6개 기업은 일찌감치 다음 시즌 재계약 의사를 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당구에 기업이 뛰어드는 이유는 뭘까.
가장 사랑하는 나라
“한 건물 건너 당구장이에요. 이보다 당구장이 많은 곳은 본 적이 없습니다.”
국내 당구대회에 참석한 외국인 선수들은 한국에 대한 첫인상을 묻는 질문에 십중팔구 도심 곳곳에 자리한 당구장 수를 논한다. 한눈에도 여럿인 당구장 표시에 “이렇게 인기가 높은 스포츠냐”라며 반문한다.
2018년 집계한 문화체육관광부의 통계를 살펴보면 국내 당구장 수는 총 2만5159개로 집계됐다. 커피하면 떠오르는 별다방 스타벅스의 전 세계 매장은 당시 2만3571개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당구장을 이용한 하루 인구는 276만 명이었다. 당시 골프장 하루 이용 인구가 8만 명이었으니 비교하면 무려 35배나 높은 수치다. 현재 세계 랭킹 50위권에 이름을 올린 한국 선수는 10여 명. 게다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당구 전문 TV 채널(빌리어즈TV)도 보유하고 있다.
가장 먼저 당구 마케팅의 가능성을 알아본 기업은 LG유플러스였다. 프로당구가 출범하기 한참 전인 2015년 11월 여의도 IFC몰에서 ‘2015 U+컵 3쿠션 마스터스’ 대회를 개최하며 스폰서로 참여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당구 대회를 기획하고 협찬한 건 한국 당구 100년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LG유플러스 측은 “당구를 레저로만 봤는데 마케팅 플랫폼으로 접근했더니 상식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왜 이제서야 당구를 활용하게 됐는지 아쉬울 정도”라고 전했다. LG유플러스는 타스포츠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당구장 수에 주목했다. 그만큼 소비 여력이 큰 블루오션으로 다가왔다. 또 IOC와 대한체육회에 정식 가입된 제도권 스포츠란 점도 매력적이었다. 2019년 대회는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스타필드에서 펼쳐졌다. LG U+컵은 대한당구연맹이 주최하는 공인된 국제대회다. 세계당구연맹(UMB)의 정식 승인으로 매년 세계 최정상 선수들이 한데 모여 국내 당구 팬뿐 아니라 전 세계 3쿠션 마니아들이 모두 손꼽아 기다리는 대회로 성장했다. 특히 이번 대회는 8강 경기부터 LG유플러스의 VR 콘텐츠 플랫폼 U+VR 앱에서 3D VR 생중계했다.
하림그룹도 프로당구 출범 이전부터 당구에 주목한 대기업이다. 그동안 서울시연맹 선수들만 참가하는 ‘하림배 3C 마스터스대회’와 선수 및 동호인이 함께 승부를 겨루는 ‘하림배 서울당구연맹 그랑프리 오픈 캐롬3쿠션 대회’를 개최하던 하림은 2018년 서울시당구연맹이 주최·주관하는 ‘제1회 하림배 서울당구연맹 동호인3C 대회’를 후원했다. 대한당구연맹에 등록되지 않은 순수 동호인들만 참가하는 하림배는 이 대회가 처음이었다. 쉽게 말해 이 대회는 선수가 아닌 일반인들이 참여해 실력을 겨루는 자리였다. 이러한 조건 등이 알려지며 여느 때보다 호응이 높았다.
세대를 불문하고 새로운 놀이 공간으로 자리 잡은 당구의 부활에는 베이비부머인 5060세대의 퇴직이 한몫했다. 골프와 비교해 비용은 적게 들고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운동, 여기에 학창시절의 추억이 더해지며 단연 최고의 스포츠이자 놀이가 됐다. 서울 중구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배영수(가명·56세) 씨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지출이 적고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는 운동을 찾다보니 다시 당구장을 찾는 것 같다”며 “너덧 명이 2만원에 두어 시간 즐길 수 있는 스포츠는 당구밖에 없다”고 전했다. 친구들과 당구장을 찾은 이영록(가명·48세) 씨는 “개인장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집에서 나서면 어느 곳이나 당구장이 있기 때문에 몸만 가면 즐길 수 있다”고 소개했다. 다시 말해 적은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가성비’ 면에서 이만한 스포츠가 없다는 의미다. 이러한 장점은 후원에 나선 기업들도 마찬가지. 2019년 11월 24일 이미래와 김갑선의 LPBA 5차 대회 ‘메디힐 LPBA 챔피언십’ 결승전이 열린 경기 의정부시 아일랜드캐슬호텔 그랜드볼룸에는 300여 명의 관중이 홀을 가득 메웠다. 이미래가 5세트 접전 끝에 1차 대회 우승자 김갑선을 3-2로 누르고 프로 전향 후 투어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현장에는 40, 50대 중장년층부터 어린 자녀를 데려온 부부, 20대 대학생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객석을 메웠다. 대회가 열린 닷새 동안 누적 관중은 4000명이 넘었다. 이 대회는 글로벌 마스크팩 브랜드 ‘메디힐’이 후원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프로당구 후원사로 참여하게 되면 보통 총 상금의 2.5배를 후원하게 된다”며 “그럼에도 후원이 원활한 건 현장을 찾은 팬들과 TV, 인터넷 등 뉴미디어 시청자들까지 적은 비용으로 확실한 노출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사실 당구는 보는 것보다 직접 참여하는 스포츠의 이미지가 강했다. 앞서 말했듯 개인이 따로 준비해야할 도구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당 비용도 저렴하기 때문에 구경하기보다 직접 당구대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최근 프로당구 등의 TV 중계가 이어지면서 관전하는 스포츠로 패러다임이 전환됐다. 세계 정상권 선수들의 묘기에 가까운 실력에 마니아를 비롯한 시청자들이 TV 앞에 모이고 있다.
시청률 면에서도 여타 프로스포츠를 위협하고 있다. 2018년 당구 경기의 시청률은 평균 0.3%였다. 같은 기간 프로야구와 프로배구는 0.83%였지만 프로농구는 0.2%, 프로축구는 0.11%에 불과했다. 2019년 6월 1차 대회를 시작해 6차 대회까지 진행된 PBA-LPBA투어는 MBC, SBS스포츠, 빌리어즈TV 등을 통해 중계됐다. 4차 대회까지 시청률은 0.4∼0.5%. 대회 최고 시청률은 0.83%를 기록했다. 높은 시청률에 대회마다 타이틀 스폰서로 참여한 기업들의 반응도 호의적이다. 6차 대회까지 후원사는 파나소닉·신한금융투자·웰컴저축은행·TS샴푸·메디힐·SK렌터카. 이미 2020년 1월과 3월에 열릴 7차, 8차 대회까지 후원사가 확정된 상황이다. 여기에 이미 후원한 기업들의 재계약 의사도 이어지고 있다.
▶넷째,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
프로스포츠로서 당구를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 선수들의 국제무대 활약이다. 프리미어리그의 손흥민이나 메이저리그의 류현진이 아니라 국내 당구선수 조명우, 김행직, 조재호, 최성원, 허정한 등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에 오르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이 출전과 성적은 곧바로 시청률로 이어진다. 당구는 여타 스포츠와 달리 부상이나 나이 등으로 갑자기 기량이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스타플레이어의 가치가 그만큼 지속될 수 있다는 의미다. 후원에 참여한 기업도 이러한 스타플레이어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PBA-LPBA 투어 2차 대회를 후원한 신한금융투자가 대표적인 경우. 신한금융투자는 대회 후원에 이어 신정주·조건휘·오성욱·김가영 등 4명의 후원까지 직접 나섰다.
PBA SK렌터카 챔피언십 우승자 강동궁 선수, LPBA SK렌터카 챔피언십 우승자 김가영 선수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2호 (2020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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