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게임 사드보복에 유통 막힌 새 짝퉁 中게임이 국내 시장 물흐려
입력 : 2019.07.30 16:50:16
-
중국이 한국 게임사들이 제작한 게임에 대한 허가증(판호)을 내주지 않은 지 어느덧 2년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지난 2017년 3월 스마일게이트가 만든 ‘크로스파이어 모바일’을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새로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 중국은 아예 국적을 가리지 않고 신규 게임에 대한 판호 허가를 중단했다가 2018년 12월이 되어서야 자국 게임에 판호를 내주고, 올해 4월 들어 해외 게임에 대한 판호도 재개했지만 여전히 한국산 게임에 대해서는 판호를 금지한 상태다. 판호를 받지 못한 게임은 중국 현지에서 유료 아이템 판매 등 수익 활동을 할 수 없다.
당연히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잃은 한국 게임계에는 커다란 손실이다. 그 규모가 연간 2144억4000만위안(약 36조8000억원)에 달하는 중국 게임 시장에서 과거 출시한 게임 외에는 시장 비중을 늘릴 길이 없으니 소위 ‘3N’이라 불리는 국내 대형게임사 넥슨·넷마블·엔씨소프트는 매출액 감소에 신음하고 있고, 중소 규모 게임개발사들은 아예 게임 개발 사업 자체를 접을 위기다. 실제로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2016년 908개에 달하던 국내 게임 제작·배급사는 중국 판호 금지가 시작된 2017년 888개로 줄어들었다.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 인디 게임 개발자들까지 포함한다면 게임 사업을 포기하는 수는 더욱 커져가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중국 시장 공략은커녕 한국 시장까지 내주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다. 2017년 이후 중국 게임계는 특히 모바일 게임 위주로 한국 시장에서 그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커다란 시장을 배경으로 한 막강한 자본력과 더 이상 한국에 뒤처지지 않는 기술력까지 갖춘 중국 게임의 약진 앞에 ‘게임 강국’으로 불리던 한국 시장마저 흔들리고 있다.
실제로 2017년 이후 한국 시장에서 중국산 모바일 게임의 비중은 나날이 높아져가고 있다. 아이지에이웍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17년 한 해 동안 한국 구글플레이에 출시된 중국산 모바일 게임 수는 136개로 전년 대비 약 19%가 증가했고, 구글플레이 매출랭킹 톱20까지 진입한 적이 있는 게임 수도 2016년 11개에서 16개로 늘어났다.
2019년까지 넘어오면 이제 중국산 모바일게임을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991년 출시된 SRPG게임 ‘랑그릿사’를 즈롱게임즈가 모바일로 재탄생시켜 XD글로벌이 퍼블리싱하는 ‘랑그릿사 모바일’은 이미 글로벌 구글플레이 스토어 및 앱스토어의 게임 랭킹에서 매출 순위 2위까지 차지했고, 국내에서도 최고 2위, 현재도 5위권을 잘 벗어나지 않는 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이밖에도 XD글로벌의 ‘소녀전선’과 ‘붕괴 3rd’, 유엘유게임즈의 ‘아르카’, 소녀스튜디오의 ‘강림:망령인도자’ 등 소비자들의 눈에 익숙한 게임 중에는 이미 중국산 게임이 넘쳐난다.
오히려 펄어비스의 ‘검은사막 모바일’과 플레이위드의 ‘로한M’ 등 몇몇 게임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3N이 아닌 한국 게임사들의 작품을 상위권에서 찾아보는 게 쉽지 않을 정도다. 이대로 가다가는 중소 규모 게임사들은 신작을 개발하는 것보다 중국산 게임의 퍼블리싱만 전담하면서 수익을 뽑는 편한 길을 택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쉽게 흘려들을 수가 없다. 중국에서 이미 한 차례 시장 검증을 마친 게임 위주로 한국 시장에 들어오기 때문에 마케팅 포인트가 확실해 중소 게임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예전과 달리 중국산 게임의 완성도가 낮은 것도 아니다. 지난 2017년 국내에 들어온 중국산 게임 중에서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한 ‘소녀전선’은 일본 애니메이션풍의 미소녀 캐릭터 그래픽으로 마니아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바 있다. 랑그릿사 모바일은 완성도 높은 일본 IP(지적재산권)를 활용해서 몰입도를 높이고,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턴제 RPG 게임의 매력을 잘 살려 30대 이상 유저들의 취향을 저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많은 중국산 게임들은 그동안 한국이나 일본에서 잘 찾아볼 수 없던 궁중 암투, 마피아 등 독특한 소재로도 관심을 끌고 있다. 중국 특유의 색을 강조하지 않고 현지 적응을 위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업계에서는 모바일 게임으로 분야를 한정할 경우 중국 게임의 수준이 한국 못지않고, 개발 속도 등의 측면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낫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게임계 관계자는 “PC 게임은 보다 오랜 시간 노하우를 축적해온 국산 게임들이 중국보다 게임성과 안정성 등 여러 측면에서 낫다”면서도 “모바일 게임에서는 중국의 역량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인기 있는 게임들이 나오면 막대한 예산과 수많은 개발인원을 투입해 곧바로 경쟁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 중국”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모바일 게임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접근하기 쉽다는 특성상 그 유행기간이 6개월~1년 수준으로 짧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빠른 개발 속도는 중국 게임계가 자랑하는 장점이 되어가고 있다. 중국산 스마트폰의 성능이 향상되고 있는 것도 중국 게임계에는 다양한 사양의 게임을 제작해볼 수 있는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압도적인 자본력을 바탕으로 ‘물량 공세’가 가능하다는 점도 국내 게임사들에게는 위협이 되고 있다. 광고에 기용하는 스타들의 면면만 봐도 마케팅 비용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게임 시장에서 인기 연예인들을 홍보 모델로 발탁하는 것이 새로운 방법은 아니지만 톱스타들이 초기 흥행에 도움을 주는 요소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르카’는 배우 김혜자를 기용하고, ‘강림:망령인도자’는 배우 이동욱을 잡았으며, 심지어 지난달 출시된 ‘영웅신검’은 최근 가장 핫한 광고 모델 중 하나로 꼽히는 국가대표 축구선수 손흥민을 기용하는 데 성공했다.
축구국가대표 선수 손흥민을 모델로 삼은 영웅신검
이처럼 중국 게임계가 상대적으로 더 작은 한국 시장 공략에 심혈을 기울이는 데도 나름의 이유는 존재한다. WHO가 게임이용장애를 질병 코드에 넣기 이전부터 강력한 게임 규제를 휘둘러오던 중국은 지난 4월 판호를 위한 새로운 규정을 추가했다. 이 규정을 살펴보면 전투나 격투, 총격 등을 다루는 게임에서 어떤 색깔의 액체도 표현하지 못하게 하고 시체가 바로 사라지도록 해 유혈이 낭자한 장면을 막고, 미성년 이용자는 게임 내에서 결혼할 수 없으며, 게임명에 표준 간체자 중국어 외에 영어 등은 사용할 수 없는 내용 등 약 15가지 새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밖에 포커나 마작 등 도박성을 띠는 게임 역시 판호를 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모든 규정들을 고려해서 최종 판호 허가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출판국이 맡는데, 만일 특정 게임이 3차례의 수정 의견을 받은 뒤에도 통과하지 못하면 그 게임은 다시는 판호 신청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국의 시장 조사 기관 니코 파트너스는 이런 중국 게임 시장 상황을 두고 2019년 연중에는 5000개 미만의 게임만 판호를 발급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리기도 했다. 시장조사업체 뉴주가 발행한 ‘2019 글로벌 게임시장 리포트’에 따르면 강력한 규제 때문에 2015년 이후 처음으로 중국 시장이 미국 시장에 이어 2위로 밀려날 예정이기도 하다. 결국 중국 게임사들도 자국 시장에서 지나친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비롯해 동남아, 일본, 북미로 세력을 키우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다만 한국 게임계 입장에서는 단순히 시장 점유율을 뺏긴다는 사실 외에도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글로벌 경쟁 시장인 만큼 중국산 게임도 인기를 얻을 수 있지만 지나치게 선정적인 마케팅으로 게임계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더욱 안 좋아지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Kr Cool의 ‘왕이 되는 자’는 12세 이용가로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노골적인 성상품화를 담은 이미지로 비판을 받았고 결국 게임물관리위원회가 연령 등급 상향, 광고 중단, 과태료 500만원의 처분을 결정하기도 했다. ‘아르카’ 역시 페이스북에서 여성의 신체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선정적인 이미지를 담은 광고를 하다가 삭제 조치를 당했다. 확실한 규제 기관 없이 게임을 담당하는 게임물관리위원회와 광고를 맡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책임 소재를 두고 논의하다가 지난해부터 비로소 모니터링에 착수했다. 이마저도 사전 심의가 아니라 문제가 발생한 후에 대응하는 방식이라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아르카는 페이스북에 여성의 신체가 드러나는 광고를 했다가 삭제 조치를 당했다.
여성을 노골적으로 성상품화 대상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받은 ‘왕이 되는 자’ 광고.
물론 중국산 게임 수입을 제한하는 등 극단적인 방식은 실효성이 없기에 한국 게임사들도 새로운 살 길을 찾아야 한다. 현재 국내 게임사 매출의 약 70%가 해외 시장에서 발생하고, 그 해외 시장 매출 중에서 중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율도 거의 40%에 달한다. ‘던전 앤 파이터’ 등 기존에 판호를 받아둔 인기 게임들이 후속작 없이 인기가 떨어질 시점이 오면 국내 게임사 매출의 약 30%가 그대로 증발하는 셈이니 대체 시장을 빠르게 찾을 필요가 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한국 게임사들도 끊임없이 북미 시장과 일본, 동남아 등을 노크하고 있다. 외국산 게임의 진입 장벽이 높다고 평가받는 일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일본 IP를 내세워서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넷마블이 ‘일곱 개의 대죄: 그랜드 크로스’,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올스타’ 등으로 잇달아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예시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동남아 시장도 놓칠 수 없기에 NHN이 ‘라인 디즈니 토이 컴퍼니’를 대만과 태국에 출시하고, 게임빌도 태국과 베트남에 ‘탈리온’을 출시한 바 있다.
게임 플랫폼 다변화도 고려해야 한다. 오히려 모바일보다도 콘솔 시장이 더 큰 북미 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콘솔 플랫폼을 위한 게임도 제작해야 한다. 크래프톤이 IP를 가지고 있는 테라는 국내 MMORPG 중 최초로 콘솔에 이식돼 북미와 유럽 지역에서 400만 다운로드를 넘기기도 했다. 크래프톤은 신작 ‘미스트오버’를 닌텐도 스위치에도 내놓을 계획이고, 엔씨소프트 등도 신작 PC온라인게임을 콘솔 버전과 동시 개발한다고 밝힌 바 있다. PC에서 모바일로 흐름이 넘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5G(5세대) 이동통신이 대중화되면 스트리밍 게임의 중요성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시장 조사기관 IHS마킷은 스트리밍 게임 시장 규모가 지난해 2억3400만달러(약 2750억원)에서 2023년 15억달러(약 1조7650억원)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봤다. 게임사뿐 아니라 세계 최초 5G 상용화를 이끌어낸 국내 통신사들까지 함께 플레이어로 참여할 수 있다. 정부의 도움도 힘이 된다. 그동안 정부는 게임을 통한 과도한 비용지출을 경계해 성인의 월 결제 한도를 50만원으로 제한하는 정책을 펼쳐왔지만 지난달 이를 폐지했고, 주요 게임사들은 17일부터 결제한도를 없앤 새로운 결제 시스템을 내놓으며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다.
[이용익 매일경제 모바일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7호 (2019년 8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