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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기업들, ‘소재’에 빠지다!
입력 : 2014.11.07 17: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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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석유화학단지
국내 대표 산업으로 손꼽히는 석유화학은 최근 몇 년간 중국의 추격과 글로벌 경영환경의 변화로 위기를 겪고 있다. 중국 미국 등 경쟁 국가들이 제품 생산량을 늘렸고, 유가 하락으로 인한 정제 마진 악화로 성장성이 둔화된 것. 여기에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 역시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주가를 끌어내리는 요인이 됐다.
이런 가운데 최근 석유화학 기업들이 ‘신(新)소재’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제를 통해 만들어내는 다양한 원재료를 가공해 아예 새로운 소재 분야로 진출하겠다는 각오다.
LG화학 필름 생산라인
공사가 완료되면 대림산업의 PB생산량이 세계 1위가 된다. PB는 자동차 윤활유, 화장품 등에 쓰이는 석유화학 소재다.
추가 공장 신설 계획도 이미 진행 중이다. 대림산업은 “현재 총매출의 15%대인 석유화학 소재 매출을 3년 내 40%까지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건설도급 순위 5위권의 대림산업이 ‘화학’에 집중하는 것은 건설 경기불황이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어서다. 대림산업 관계자는 “앞으로 건설 경기가 살아나더라도 성장에 한계가 있는 만큼 발전가능성이 큰 소재 분야를 키운다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대림산업은 1987년 호남에틸렌을 인수해 ‘석유화학사업부’로 운영 중이다.
대림산업뿐만이 아니다. 전자회사를 비롯해 정유업체 등 다양한 기업들이 소재 개발 및 생산에 뛰어들고 있다.
한화그룹이 대표적이다. 한화그룹 내 한화L&C는 최근 주력분야였던 건축 자재부문을 분리 매각한 후, 비주류이던 소재 부문을 남겨 한화첨단소재(가칭)로 변경했다. 한화소재는 앞으로 자동차, 휴대폰, 태양광 발전 등에 쓰이는 소재로 구성된 부품을 개발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의 간판 계열사인 한화케미칼이 미국 화학기업인 다우케미칼의 기초화학사업부와 폴리우레탄의 원료를 생산하는 KPX화인케미칼 인수를 추진하는 것도 소재산업 강화를 위한 차원이란 게 재계의 분석이다.
세계 최고의 철강그룹인 포스코 역시 소재산업에 집중하고 있다. 포스코는 계열사인 포스코엠텍을 통해 IT 기기나 전자 재료에 들어가는 고순도 알루미나 사업에 진출했으며, 포스코컴텍은 태양전지에 들어가는 탄소소재, 휴대폰 등에 들어가는 리튬 2차전지 소재 사업도 시작했다.
소재산업에 가장 열심인 곳은 누가 뭐래도 정유 업체들이다. 셰일가스와 유가 하락으로 수익성 악화위기를 겪고 있는 정유사들은 소재 개발을 새로운 돌파구로 여기고 있다.
에쓰오일은 서울 강서구 마곡 산업단지에 2019년까지 3953억원을 투자해 ‘석유화학기술센터’를 건립할 계획이다. 이곳은 원유 정제과정에서 생산되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신소재 개발을 담당한다. 또 12조원을 투자해 파라자일렌(PX), 폴리프로필렌(PP) 등의 공장 증설 및 신설도 진행 중이다. PX는 페트병 등에, PP는 자동차 범퍼 등에 쓰이는 석유화학 소재다.
국내 1위 정유업체인 GS칼텍스는 2011년부터 한국과학기술원(KIST) 등 7개 연구기관과 섬유·자동차 부품 관련 신소재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연산 2000톤 규모인 2차전지용 음극재 공장을 증설해 양극재 생산에도 나설 예정이다.
현대오일뱅크 역시 원유정제 과정에서 배출되는 부산물을 원료로 카본블랙을 만들어 타이어 원재료로 공급하는 합작사 설립을 검토 중이다.
LG화학은 기존 사업 분야를 강화하면서 신소재 개발에 나서는 투트랙(2-trap)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엔지니어링플라스틱, 고흡수성 수지 등 중점 육성 분야의 매출을 현재 2조원대에서 오는 2018년까지 4조5000억원대까지 늘리고, 역삼투압 필터, 탄소나노튜브, 이산화탄소 플라스틱 등 신소재 분야에는 1200억원을 투자해 소재개발에 나설 계획이다.
이 밖에도 효성그룹은 플라스틱과 합성섬유의 원료로 쓰이는 ‘폴리케톤’을 개발했으며, SK케미칼은 ‘슈퍼엔지니어링플라스틱’ 개발에 성공해 상업화를 준비 중이다.
석유화학업계의 한 관계자는 “소재산업 분야는 석유화학에 국한된 산업이지만, 최근에는 금속분야와 바이오 등 영역이 넓어지고 있어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진화 중”이라며 “대규모 연구 인력과 생산시설 기반 마련을 위한 설비투자가 동시에 진행돼야 하는 만큼 대기업들의 진출이 더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SDI 반도체 소재
실제 유화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대기업들이 투자하고 있는 신소재 분야는 아직까지 시장성이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며 “자칫 대규모 투자로 설비를 확장했는데, 시장성을 답보하지 못해 공장을 운영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 산하 연구원들도 유화업계의 이 같은 지적에 동조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원은 “2008년 태양광 산업 때에도 대부분의 대그룹들과 중견그룹들이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너도나도 진출했지만, 글로벌 경기침체와 과잉투자로 위기를 겪었다”면서 “자칫 소재산업 역시 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신소재 산업의 성패는 소재개발에 달려 있다. 폴리케톤을 개발한 효성그룹 관계자는 “신소재 개발은 막대한 R&D 자금은 물론, 개발한 소재의 활용성과 시장 수요까지 모두 계산해야 생산이 가능하다”며 “첨단 소재를 개발해도 시장 수요가 없다면 상품성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발 공급과잉이 여전하다는 점도 신소재 사업의 불안 요소 중 하나다. 개발에 성공해도 유사한 원료를 생산 중인 중국 업체들이 대량생산에 나설 경우 수익성에 큰 차이가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중국 내 화학기업들이 대규모로 벤젠 및 PX 생산에 나서면서 폴리에스테르 원료인 PX의 가격은 1톤당 1200달러 선까지 추락한 상태다. 2011년만 해도 PX의 1톤당 가격은 1700달러였다.
석유화학업체들은 이 같은 우려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대기업 계열의 한 석유화학업체 임원은 “석화업체들이 추진 중인 신소재 사업들 대부분은 현재 설비를 유지하는 가운데, 이를 대체할 새로운 소재를 찾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라며 “기존 설비를 그대로 운용하면서 좀 더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소재 개발에 나서는 것이기 때문에 큰 위험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대기업 및 중견기업들의 설명처럼 신소재 사업이 ‘성장을 위한 터닝 포인트’가 될지, 중복 과잉투자로 인한 재무 부담으로 작용할지는 알 수 없다. 성장을 위해 신소재 사업을 택한 기업들의 퀀텀점프를 기대해보자.
[서종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0호(2014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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