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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비리 수사 1년…한수원은 아직 원전마피아의 그늘에 있다
입력 : 2014.06.09 16:3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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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달이 지난 5월 1일. 조석 사장은 또다시 절망감을 경험해야 했다. 청렴하다는 평가에 자신이 직접 임명한 이청구 부사장이 비리 혐의로 검찰에 구속 기소됐기 때문이다. 이 부사장은 월성원자력본부에서 근무했던 2009~2010년에 원전 납품업체로부터 부품 납품 청탁과 함께 1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원전마피아’로 불리는 한수원에 대한 검찰의 원전비리 수사가 시작된 지 벌써 1년이 됐다. 그동안 한수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먼저, 검찰 수사 이후 한수원의 원자력 정책을 좌지우지했던 원전마피아 중 상당수가 한수원에서 퇴출됐다. 또한 지난해 말 대표로 취임한 조석 사장의 주도 아래 내부 인력시스템 및 납품체계를 대폭 손질했다. 원전마피아를 척결하기 위한 법률도 준비 중이다. 국회에 계류 중인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한수원의 근간을 흔들었던 원전마피아들은 자리를 잃게 될 것으로 산업통상자원부는 보고 있다.
과연 한수원은 원전마피아라는 굴곡진 오명을 벗고, 청정에너지라는 원자력처럼 깨끗해졌을까. 1년 동안 강하게 불었던 변화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던 한수원의 모습을 살펴봤다.
부산지검 동부지청 원전비리수사단은 지난해 4월 원전비리 수사에 전격 착수한 지 1년 만인 지난 5월 1일 제2차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한수원의 전·현직 임직원 100여 명을 배임 및 사기,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기소한 한수원의 전·현직 임직원들은 대표이사에서 시작해 말단 실무진까지 직급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말단부터 최고위층까지 금품을 수령해 나눠 갖는 상납구조를 갖춰 수사관계자들 사이에서 ‘마피아 같다’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다.
원전마피아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지난해 4월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고리원자력발전소의 원전 1호기가 고장으로 가동 중단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당시에는 동일본대지진에 따른 후쿠시마원전 사태가 진행 중이라 고리원전 1호기의 가동중단 역시 대부분의 국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에 한수원은 사소한 사고라며 이튿날 고리 원전의 재가동 날짜를 서둘러 밝혔지만, 원전 안전성을 판단하는 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이 무기한 가동중단을 결정하면서 원전비리 수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한수원 산하의 발전소 관련자들이 검찰에 구속되면서 사태가 일단락되는듯 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신고리 원전 1,2호기와 신월성 1호기가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가동을 멈추면서 원전비리 수사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다. 특히 원전에 사용된 부품의 시험성적서 대부분이 조직적으로 위조됐다는 사실을 검찰이 밝혀내면서 원전마피아에 대한 수사가 다시 확대됐다. 원전비리수사단은 이 과정에서 시험성적표를 조작한 한수원 직원들과 납품업체 간의 리베이트를 확인하면서 원전비리 수사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정부 역시 한수원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다. 가동 중지된 원전 3기와 운영 중인 5기의 원전을 전수 조사한 결과, 총 2010건의 시험성적 조작이 있었던 것을 밝혀냈다. 특히 현재 가동 중인 20기의 원전에서만 277건의 서류조작이 있었다는 점도 찾아냈다. 그렇다면 원전마피아들은 대체 얼마나 많은 서류조작과 금품을 받아온 걸까. 지난 5월 2일 원전비리수사단이 발표한 제2차 중간수사 결과를 보면 원전마피아의 속살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부산지검은 원전 부품 납품과 관련해 금품을 수수한 한수원 및 한국전력기술 등 전·현직 직원 32명(구속 20명)을 뇌물수수와 배임수재 등으로 기소했고, 3명을 징계통보 했다고 밝혔다. 또 시험성적표를 위조하거나 납품 대가 등으로 금품을 공여한 납품업체 임직원 66명(구속 23명)을 뇌물공여, 배임증재, 사기,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중간수사 단계임에도 100여 명에 가까운 이들을 기소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수원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원전마피아의 대부분이 검찰의 수사망에 포착됐다. 이들 중 대부분이 금품 및 향응을 제공받은 혐의로 검찰로부터 기소당했고, 한수원에서 떠나게 됐다.
일각에서는 이와 관련 한수원이 이제는 원전마피아들의 손아귀를 벗어난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많은 이들이 검찰 수사를 통해 구속됐거나 회사를 떠난 만큼, 한수원이 이제는 정상화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냐는 게 이들의 시각이다. 그러나 수사를 담당한 검찰 측의 얘기는 다르다. 한수원에는 여전히 원전마피아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것. 한 수사 담당자는 “원전비리는 지난해 수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큰 규모가 될 것이라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며 “조사를 하면 할수록 새로운 비리 사실이 나왔고, 아직 수사가 종료된 게 아니라는 점에서 냉정하게 한발 떨어져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산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
한 원전업체 관계자는 이와 관련 “원전마피아들은 퇴직공직자들이 산하기관의 수장으로 내려오는 일반적인 관료집단과 다르다”며 “원자력발전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라는 점에서 학연을 통해 구성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전력발전 산업이 국가기간산업이란 점 역시 비리가 터질 때마다 주요사안에 대해 ‘기밀’이라며 공개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원전마피아를 만들게 한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검찰수사 과정을 들여다보면 구속된 한수원 내 전·현직 임원들이 특정 대학의 원자력 관련 공학과 출신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원전마피아의 폐쇄적인 네트워크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원전 관련 사업에 참여하는 민간사업자들도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한수원으로부터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네트워크가 가능한 인물을 주로 채용해왔다.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밝힌 ‘일상적인 향응제공과 금품수수’가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무진들 역시 또 다른 학연으로 뭉쳐 있다. 한수원 감사실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원전비리로 기소된 임직원 53명 중 14명이 한국전력 산하의 S공고인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한수원의 고위 임원 퇴직자들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홍일표(새누리당) 의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한수원 고위 임원 퇴직자 중 59명이 관련업체에 재취업했으며, 1급 이상 임원 출신을 영입한 원전 납품업체 44곳이 2009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한수원과 약 6조4000억원의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계약내용을 살펴보면 한수원 퇴직 간부 2명을 자문위원으로 영입한 한전KPS가 463건의 계약을 성사시켰으며, 179건의 계약을 체결한 두산중공업은 지난해 4월 한수원 퇴직자를 기술자문역으로 채용했다. 또 67건을 체결한 YPP는 2006년 3월 한수원 퇴직간부가 사장으로 선임됐다.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한수원 퇴직자를 영입한 44개사는 약 5년 동안 한수원이 발주했던 총 계약금액 15조800억원 중 절반 가까이를 챙겨 갔다. 문제는 한수원 내 이 같은 특정 학교 출신의 임직원들이 여전히 많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수원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아직 냉랭하다. 한 원전업체 관계자는 “지금이야 제대로 시스템이 움직이겠지만, 원자력 발전 산업의 특성상 고도의 전문성과 기술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새로운 원전마피아가 등장할 가능성은 여전하다”고 귀띔했다.
이 법안은 원전 부품의 구매 입찰과 품질 관리, 조직 및 인사 관리 등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원전 임원과 시행령에서 정한 직원의 재산등록을 의무화하며, 퇴직 후 2년간 관련 사기업 재취업을 금지하고 있다. 특히 부품 품질서류를 위·변조할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는 처벌규정도 담고 있다. 사실상 원전마피아가 발을 붙일 만한 곳이 있으면 모두 규제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안은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산업부는 지난 4월 법안 처리 후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10월부터 시행할 계획이었으나, 산업위 법안소위의 심사조차 받지 못했다.
그래서 업계 전문가들은 한수원의 미래를 여전히 어둡게 보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업체 임원은 “원전마피아를 없애기 위해서는 한수원의 원자력발전 독점체제를 깨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에너지업계 관계자도 “원전마피아들은 그동안 고도의 전문성과 기술력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해 왔다”면서 “원전 정책에 관해서는 산업관료들도 원전 마피아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정권 차원의 강력한 개혁 의지와 경쟁체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로 지난 1년을 허송세월한 한수원. 이제는 적극적인 개혁으로 새롭게 태어나자며 마음을 다잡고 있는 한수원이 진정 ‘해현경장’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서종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5호(2014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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