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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카길` 꿈꾼 aT그레인…정부주도 전략이 실패 불렀다
입력 : 2014.01.09 14: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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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수산식품유통공사(이하 aT공사)에 따르면 2011년 4월 민간기업들과 합작으로 설립됐던 곡물유통회사 ‘aT그레인컴퍼니(이하 aT그레인)’는 지난해 9월 말 현재 미국 시카고 법원에 사업청산을 신청하고 관련 절차를 밟고 있다. aT그레인은 aT공사가 지분 55%를 출자해 자본금 250만달러 규모로 설립한 곡물수입유통회사로 컨소시엄에 참여한 민간기업들이 각각 15%의 지분을 보유했다. 컨소시엄에 참여한 기업들은 삼성물산과 ㈜한진, ㈜STX 등이다.
그러나 2년이 흐른 지금, aT그레인은 결국 문을 닫았다. 사업 주체인 aT공사가 청산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혈세인 세금까지 투입하며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해외곡물조달시스템 사업. 지난 2년 동안 aT그레인은 행적을 알아봤다.
해외곡물조달시스템 사업안은 지난 2008년과 2010년 국제곡물가격이 급등하면서 곡물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정부가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면서 시작됐다. 낮은 곡물자급률을 이용해 횡포를 부리는 4대 곡물메이저의 독과점 구조를 깨자는 게 정부의 의도였다.
반면 곡물자급률은 26.7%로 열악하다. 자급률이 104%에 달하는 쌀을 제외하면 다른 곡물들의 자급률은 최대 5%에 불과하다. 특히 옥수수와 밀은 99%, 대두는 91% 수입산을 사용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는 해외에서 곡물을 수입해오고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했다. 국내에 수입되는 곡물 대부분은 4대 곡물메이저와 일본계 종합상사를 거치는데 이들 곡물메이저가 국제곡물가격이 불안정해지면 어김없이 높은 값으로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실제 4대 곡물메이저에 대한 우리나라의 수입의존도는 약 60%에 달해 독과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4대 곡물메이저들이 곡물가격을 올리면 울며 겨자먹기로 값을 모두 치러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해결책으로 직접 조달 방식을 생각했다. 해외에 정부 산하의 곡물메이저 업체를 설립한 뒤, 산지의 곡물생산업체들과 직거래를 하게 되면 좀 더 싸고 안정적으로 곡물을 국내로 들여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정부의 방침이 정해지자 2010년 민·관 합동으로 태스크포스 팀이 만들어졌고,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설립됐다. 정식 명칭은 ‘국가 곡물조달 시스템 구축 사업’으로 정했으며, 사업주체는 농림부 산하의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공사)가 낙점됐다.
2011년 4월 세계 곡물 선물의 80%가 거래되는 미국 시카고에 aT그레인의 사무실을 열었다. 초기 투자금은 27억원 규모로 aT가 55%, 나머지 3개 민간 기업이 각각 15%씩 지분을 보유했다.
시카고에 깃발을 세운 aT그레인은 곡물메이저들의 필수 설비인 ‘곡물 엘리베이터(생산자로부터 곡물을 매집한 뒤 건조·저장·분류·운송하는 설비)’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당시 aT공사는 곡물 엘리베이터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후 이듬해인 2011년부터 콩과 옥수수를 직수입하고, 점차 수입규모를 늘려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 2년이 지나도록 단 한 개의 곡물 엘리베이터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내 강변에 위치한 곡물 엘리베이터는 모두 174개로 이중 117개(67%)와 수출 엘리베이터 58개 중 25개(43%)가 4대 곡물메이저 소유였다. 곡물메이저들은 이들 곡물 엘리베이터 대부분을 소유했고, 매물로 나온 엘리베이터 역시 사들였다. aT그레인 측면에서는 매수 문의조차 받지 못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 부분에 대해 정부의 전략 실수를 지적했다. 곡물 엘리베이터 매입 계획을 밝히면서 4대 곡물메이저들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 셈이 됐다는 설명이다.
엘리베이터 확보에 실패한 aT그레인은 지난 2012년 말 전략을 수정해 현지 곡물회사 인수에 나서기 시작했다. 현지 엘리베이터를 확보한다는 전략 대신 이미 엘리베이터를 소유한 곡물회사를 사들이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지지부진 시간을 끌더니 결국 좌초됐다. 그리고 지난해 9월 aT공사가 시카고 법원에 청산절차를 신청하면서 aT그레인의 야심찬 목표는 결국 무산됐다. aT센터는 12월 중 청산절차를 완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로 설립됐던 aT그레인은 지난 2년 동안 어떤 활동을 했을까. aT공사에 따르면 2012년 콩 1만1000톤을 국내에 들여온 게 전부다. 당초 국내에 들여오기로 한 목표치의 11%에 불과하다. 지난해에는 아예 실적이 없었다.
농수식품부로부터 지원받은 예산 역시 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2011~2012년 aT에 실제지원된 예산 642억원 중 집행된 자금은 고작 44억원에 불과했다. 국정감사에서 aT그레인이 예산만 낭비하고 있다는 야당의원들의 지적도 바로 여기에 집중됐다.
전문가들의 치밀한 계획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aT그레인 사업이 단 2년 만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재계 관계자들은 “정부에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짧은 기간에 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결국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원하는 정부에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정작 제대로 된 시장조사나 대응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결국 시간과 돈만 날린 셈이 됐다는 분석이다.
특히 폐쇄적인 시장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무작정 사업을 추진한 결과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세계 곡물 유통시장의 80% 가까이를 장악하고 있는 카길·번기·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DM)·드레퓌스의 시장장악력을 과소평가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농림축산식품부는 해외 곡물조달 시스템 계획안을 다시 한번 추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기존 전략을 수정해 후속사업에서는 좀 더 치밀한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각오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aT그레인을 반면교사로 삼아 민간 주도의 장기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정부 주도의 곡물유통사업과는 달리 민간기업이 주도한 프로젝트는 서서히 성과를 내고 있다. 4대 곡물메이저 중 하나인 번기와 손을 잡은 STX팬오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STX팬오션은 지난해 9월 미국 워싱턴 주 롱뷰항에 연간 900만톤을 처리할 수 있는 대규모 곡물 엘리베이터를 준공했다. 번기, 일본의 이토추상사와 공동으로 3억달러를 투자해 저장 설비와 부두, 하역설비 등을 갖추고 있다.
STX그룹 관계자는 “STX팬오션은 아시아 지역 곡물 운송 1위업체로 곡물 메이저들과 오랜 기간 신뢰 관계를 구축해 왔다”며 “곡물 유통 사업을 그룹의 신성장 동력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종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0호(2014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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