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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열 기자의 혼맥지도]⑰ 대림그룹 이재준家 | 경영도 혼맥도 ‘불가근 불가원’
입력 : 2013.08.09 1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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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역시 마찬가지다.
사업을 시작할 때와 현재에 다른 사업을 주력으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활수준이 발전하게 되면서 사업의 트렌드 역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창업 이후 곁눈질하지 않는 ‘건설’을 중심으로 커온 회사가 있다. 바로 건설명가 ‘대림산업’이다. 대림산업을 창업한 故 이재준(수암) 창업주는 모체가 됐던 부림상회 시절부터 건설자재를 취급하기 시작해 지금의 대림산업을 일궈냈다. 7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실상 건설 외길만을 걸어온 조용하지만 선 굵은 대림산업 이재준 가문을 살펴봤다.
이준용 회장
이 사훈은 오늘날의 대림산업을 일궈낸 이재준 창업주가 직접 만들었다. 이재준 창업주는 자신이 만든 사훈을 지키기 위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아침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출근했다.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평생에 걸쳐 몸에 밴 그의 습관이었다. 또 근검절약 역시 이재준 창업주가 평생에 걸쳐 강조했던 생활태도였다. 이런 그의 성격은 대림산업의 성장사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비슷한 시기에 사업을 시작한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과 달리, 오직 건설 외길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6년 상장한 이후 현재까지 30여년이 넘게 주주들에게 배당을 해오며 내실경영 체제를 이어오고 있다.
그렇다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 변화를 받아들이지만 오직 건설에만 집중하며 무리한 사업 확장을 경계한다. 정도를 걸으며, 조용하게 기업을 일구는 것이 바로 대림산업만의 스타일인 셈이다.
대림산업을 설립한 이재준 창업주는 경기도 시흥(현재 산본 신도시)에서 5남 4녀 중 차남(넷째)으로 태어났다. 이 창업주는 조선왕조 27대 선조대왕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인성군의 9대손이다. 왕손 집안인 만큼 이재준 창업주의 집안은 부유했다. 일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서울 서대문에 한일정미소를 따로 운영하고 있을 정도였다.
부친인 故 이규응 옹은 이재준 창업주에게 공부 대신 사업을 가르쳤다. 보통학교(현 초등학교)만 졸업시킨 후 곧바로 정미소에서 일을 돕도록 한 것. 반면 이재준 창업주의 형인 故 이재형(운경) 전 국회의장의 경우 “사업할 성격이 아니니 공부를 해라”면서 고등학교는 물론, 일본유학까지 보냈다.
아버지의 정미소에서 일을 하던 이재준 창업주는 1939년 인천 부평에 ‘부림상회’를 열며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파트너는 고종사촌간인 이석구 전 대림산업 회장과 그의 매제 원장희 씨다. 세 사람은 부림상회에서 목재와 건자재를 취급하며 사세를 키웠고, 이후 1947년에는 건설업에 진출하며 상호를 지금의 ‘대림산업’으로 변경했다.
부림상회 창업 과정에는 재밌는 일화가 있다.
이재준 창업주와 고종사촌지간이던 석구 씨가 당초 사업을 위해 자금을 빌리려 이재준 창업주의 아버지인 이규응 옹에게 왔다가 이재준 창업주가 사업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해줬다는 것이다. 이석구 씨는 이후 대림산업 회장으로 일하다 60년대 중반 심부전증으로 경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이재준 회장이 경영권을 맡았으며, 이석구 회장의 장남인 필웅 씨는 70년대 중반 풍림산업을 갖고 대림산업에서 분가했다.
다시 시간을 거꾸로 돌려 1947년 대림산업은 인천 부평경찰서 신축 공사를 수주하며 명실상부한 국내 3대 건설업체로 이름을 올린다. 당시 3대 건설업체는 대림산업과 현대건설, 삼환기업이었다.
1949년부터는 부림상회 시절부터 해왔던 목재업보다 건설업종의 비중이 늘어났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군시설 공사를 맡았고, 휴전 이후에는 재건공사를 휩쓸며 회사 규모를 키워갔다. 또 1958년에는 청계천 복구공사와 청계고가도로,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건설 등 SOC 공사를 도맡았다.
담백하지만 알짜배기 혼맥 이재준 창업주는 앞서 밝힌 것처럼 부친인 이규응 옹과 모친 양남옥 여사 사이의 5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故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 이 창업주의 형이며, 이재연 아시안스타 회장이 막내 동생이다.
맏이인 장녀 이인출 씨는 이창복 씨와 결혼했지만, 창복 씨가 31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인출 씨의 장남인 준원 씨는 대림산업 계열에서 분가해 풍림산업 회장을 맡았다.
차녀인 임출 씨는 재력가로 알려진 임의순 씨와 결혼했다. 장녀인 시자 씨가 이해익 전 농림장관의 며느리로 출가했고, 차녀 경자 씨는 故 윤용구 일동제약 창업주의 차남인 윤원영 회장과 결혼했다.
장남인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평범한 집안의 류갑경 씨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4남 4녀를 두고 있다. 미국에서 농학교수를 한 장남 홍용 씨는 금융계 유력 인사로 알려진 배상준 씨의 딸인 염자 씨와 결혼했다. 장녀 봉희 씨는 원용덕 전 헌병사령관의 아들인 원창희 장군(육군 소장)과 혼인했다. 차녀 신자 씨는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의 동생인 김종식 민자당 의원과 결혼했으나 나중에 갈라섰다. 차남 두용 씨와 4남 인용 씨는 백경물산이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대림산업을 창업한 이재준 창업주는 19세에 수원 대지주의 딸인 이경숙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 여사는 장남인 준용 씨(현 대림그룹 명예회장)를 낳은 지 4년 만에 세상을 떴다. 이후 박용복 여사와 재혼해 차남인 부용 씨(전 대림산업 부회장)를 얻었다.
이재준 창업주의 둘째 동생 재우 씨는 1952년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56년부터 대림산업에 합류했다가 대림자동차 사장을 거쳐 대림통상 사장으로 근무했다.
막내 동생인 이재연 아시안스타 회장은 재계 혼맥의 본산으로 불리는 LG가문과 결혼했다. 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차녀 자혜 씨가 배필이다. 대림과 LG는 이때부터 사돈관계를 맺었다. 이런 이유로 이재연 회장 역시 대림산업이 아닌 LG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그는 LG카드 부회장과 LG그룹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재연 회장의 장인인 구인회 창업주는 강세원 전 희성금속 사장과 박동복 전 금호전기 회장과 사돈을 맺어 관가와도 곧바로 연결된다.
이준용 명예회장은 1965년 천안의 사업가로 알려진 한순성 씨의 딸 경진 씨와 결혼했다. 당시 두 사람의 결혼을 아버지인 이재준 창업주가 반대했으나, 끈질긴 설득에 결국 혼인을 허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66년 이준용 명예회장은 대림산업의 계장으로 입사했다. 학자의 길을 걷던 이준용 명예회장이 대림산업에 합류하게 된 배경에 대해 그는 “당시는 해외 건설 시장을 개척할 시기였는데, 글로벌 감각과 국제업무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했고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대림산업에 합류한 이준용 명예회장은 아버지를 도와 큰 활약을 펼쳤다. 1966년 베트남 진출 1호 건설업체로 국내 건설사 중 최초로 해외진출에 나섰으며 중동건설 붐을 주도했다. 또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과 포항제철 3, 4호기도 대림이 수주해 시공했다.
경영기법에 대한 진화도 빨랐다. 컴퓨터가 보급되기도 전인 1978년에 건설업계 최초로 업무 전산화 프로그램을 도입해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했다.
1979년에는 대림산업 사장으로 임명된 후 현재 그룹의 양대 축이 된 석유화학 분야에 진출했다.
그러나 어려움도 많았다. 1986년에는 개관 11일을 앞두고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화재가 발생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이후 독립기념관은 더 완벽한 복구공사를 거쳤다.
1988년에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애꿎은 피해자가 됐다. 이라크의 무차별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캉간 가스정제공장 건설현장에서 13명이 죽고, 19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 것. 대림산업 역시 피해자였지만 여론의 뭇매를 견뎌야 했다.
대림건설의 키얀 프로젝트 플랜트 공사현장
동생인 해승 씨는 미국 미주리대 교수인 김현영 씨의 딸 경애 씨와 결혼했으며, 3남 해창 씨는 삼환기업 최용권 회장의 딸인 영윤 씨와 혼인했다.
이밖에도 이재연 아시안스타 회장의 장남인 선용 씨는 오세중 세방그룹 회장의 딸인 오은주 씨와 결혼했으며, 차남인 지용 씨는 추경석 전 국세청장의 딸인 재연 씨와 결혼했다.
혼맥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화려해지고 있지만 대림산업의 오너 일가는 건설과 유화에만 집중하고 있다. 다른 대기업들처럼 형제간 분쟁이나 문어발 확장은 자제한 채 오로지 한 우물만 파고 있는 셈이다. 선비처럼 조용하지만 오롯이 자기 길을 가는 대림산업의 앞날이 기대된다.
[서종열 기자의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5호(2013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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