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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eting]‘추억의 팝송’…지하철 상인의 마케팅엔 ○○가 있다
입력 : 2012.12.28 14: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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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안에서 물건을 파는 것은 많이 봐왔지만, 그날의 ‘추억의 팝송’처럼 많이 팔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 아저씨는 압구정역에서 네 정거장 째인 동대입구에서 내렸다. 보일 듯 말듯 흡족한 미소를 띤 그 아저씨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일까 궁금했다. 이후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과연 그런 성공적인 판매를 이끈 요인은 무엇일지 분석해봤다. 판매자나 구매자를 대상으로 직접 조사를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순전히 가설적으로 상상한 것이다.
‘추억의 팝송’ CD를 지하철에서 파는 광경을 오랜만에 봤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보지 못했을 뿐이지 계속 팔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혹시나 지하철에서의 판매 자체가 정말 오랜 공백 이후에 근래 시작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수요는 있는데 그동안 공급이 여의치 않았다가 물건이 시장에 나와서 잘 팔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종류의 CD는 지하철 이외에 노점상 리어카에서 파는 모습을 계속 봤다. 판매하는 측에서 일부러 물량을 조절한 것 같지는 않다. 유통 창구로서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았을 확률도 있는데, 지하철공사에서 특별히 노점상 단속을 했다든지, 지하철 내 다른 품목 판매원들이 급격히 줄었던 것 같지는 않으니 그 확률도 낮다. 평소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지 않는 편이니 내게만 별로 ‘추억의 팝송’ CD를 파는 모습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제품의 타이밍과 사회 트렌드 토요일 정오 무렵이란 시간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그 시간 지하철 승객의 상당수는 결혼식 참석을 위해 혹은 소수이겠지만 참석 후 이동하는 하객들이다. 결혼식 참석 하객들은 표면적으로는 미래를 축하하기 위해서 오지만 그들을 그곳으로 부른 근본 동인은 추억이고, 그 추억을 다른 하객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얘기를 나누며 소비한다. 추억이 그들 주위를 에워싼 상태의 40대 중반 이후의 하객들에게 CD에 담긴 팝송들은 너무나도 끈끈한 추억의 실타래를 불러낸다.
제품이 시기를 타는 경우가 많이 있다. 특정한 연도에 히트하는 제품이 있다. 길게는 일생에 한 번 오기도 힘든 시기를 노리는 제품들도 있다. 1999년, 2000년에 쏟아진 밀레니엄 특별상품들이 천년에 한 번 오는 것으로 제품의 수명주기로만 하면 사이 간격이 가장 긴 경우다. 12간지로 그 해의 동물을 주제로 한 제품들도 아시아에서는 많이 나오는데 그것도 간격이 아주 긴 편에 속한다. 정기적으로는 특정 계절에 반짝하며 한 해 매출의 대부분을 올리는 제품들이 있는데, 그를 보통 제품의 계절성(Seasonality)이라고 부른다. 하루만을 잡아서 ‘OO데이’하는 식의 ‘기념일 마케팅’도 일종의 타이밍을 잡거나 만들어서 매출을 올리는 방식이다. 하루 중에도 사람들의 생활에 따라서 파는 제품의 구색이나 마케팅 활동도 달리 한다. 어느 식당은 아침에 토스트와 샌드위치를 커피와 함께 팔고, 점심은 분식점으로, 저녁은 호프집으로 변신한다. 토요일 정오 전후의 지하철은 40대 중반 이상의 소비자들에게 추억상품을 파는 적절한 시간과 장소라 할 만한다.
보통의 토요일 오후에서 2012년 12월 1일이란 한 해 속의 시간도 역시 중요하다. 12월에 사람들은 한 해를 돌아본다. 추억을 되새기는 마음가짐이 되는 한 해의 마지막 달의 첫날이니 더더욱 추억상품이 와 닿았을 것이다. 특히 2012년은 복고와 추억상품의 영역이 눈에 띄게 넓어진 해이다. ‘7080’으로만 표현되던 추억산업에 소위 ‘397세대’가 더해졌다. ‘30대, 90년대 학번, 70년대생’의 앞 숫자만을 딴 억지 조어의 느낌을 주지만, <응답하라 1997>같은 직접적으로 그들을 목표고객으로 하고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케이블TV 드라마 사상 최고의 히트작이 됐다. 전 세계를 달군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397세대의 여러 특징을 강하게 보여준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권위주의를 까고 발산하는 유머와 섹스 코드가 세대에 관계없이 열광하게 만들었다. 소위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를 허물었고, 자신의 취향에 어필하는 콘텐츠 구입을 막는 장벽이 낮아진 해가 바로 2012년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물건을 사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덜 의식하게 된 트렌드도 바로 ‘추억의 팝송’ CD가 그날 그렇게 잘 팔렸던 요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토요일 정오의 넉넉해진 마음가짐도 역시 크게 영향을 끼쳤겠지만 말이다. 거시와 마이크로 트렌드가 묘하게 함께 어우러진 사례라고도 하겠다.
지하철에서 파는 물건들의 개당 수익을 생각할 때 대부분 바람잡이를 따로 두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셀프 바람잡이’라고 할까? 혼자서 물건이 팔리는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자주 보았다. 차량 중간에 제품을 담은 박스를 두고, 낱개로 몇 개씩 가지고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연신 “아고, 고맙습니다” “네, 곧 갑니다”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라는 식의 말을 큰소리로 외친다. 물건을 주고 돈을 받는 듯한 제스처도 곁들이는 아저씨들도 꽤 있었다. ‘추억의 팝송’ CD 아저씨는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돌아다니면서 설명을 해주는 게 아주 뛰어났다. 사람이 꼭 듣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제품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설명해주는 말 중에 핵심 카피가 하나 있었다. 바로 ‘특별 한정판’으로 나왔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정판이라는 게 희소성의 효과와 함께 사람의 마음을 바쁘게 해 바로 행동으로 옮기도록 촉구하는 효과가 있다.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시간을 두고 한정판매를 자주 하는데, 아마 이전과 거의 같은 가격으로 판다고 하더라도 한정판매란 말에 가격인하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며 많은 사람이 몰리곤 한다. 그것을 이용하는 대표적인 업종이 바로 홈쇼핑이다. 지하철 안에서는 특별히 효과를 발휘한다. 바로 몇 초 사이에 사지 않고, 파는 사람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가능성이 있다. 바로 사지 않으면 그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이 마구 사기 시작하면 좋은 기회를 자신만 잡지 못하고 흘려버리는 것 같게 된다. 내 옆에 앉았던 아주머니들은 한정판이란 소리에 급히 지갑을 꺼냈다.
기술로 포장으로 압도하지 말라 친누나가 근래 새로운 차를 구입했다. 마침 어머니와 함께 누나가 모는 그 차를 타고 어느 모임에 가게 됐다. 요즘 대개의 신차들이 그렇듯이 계기판과 각종 버튼들이 마치 비행기 조종석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얘기를 했더니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서 현재까지는 아주 극소수의 기본 기능만 이용하고 있단다. 뒤에서 대화를 듣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자동차나 전자제품이나 사용설명서를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누나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저도 사실 읽어도 모르겠어요.”
1989년 삼성전자에서 나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마케팅 부서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소비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일을 했다. 모든 소비자 그룹에서 한 목소리로 나오는 게 사용설명서를 쉽게 좀 써달라는 것이었다. 이후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중반에 전자 국내 소비자들 조사를 하곤 했는데, 역시나 설명서를 쉽게 좀 써달라는 똑같은 말이 계속 나왔다. 2005~2006년경 핸드폰 소비자 조사를 하면 사람들은 음성통화, 문자메시지, 주소록, 일정 정도의 기능만 사용하는데 그들에게 30여 가지의 기능이 수록된 설명서를 안긴다. 그것도 최대한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해. 구입하는 소비자가 기계치가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다양한 기능은 우수한 기술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비자 자신이 조정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압도당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양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추억의 팝송’ CD를 파는 아저씨는 간편하게 팝송을 ‘CD’ 다섯 장에 담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냥 CD플레이어에 넣어 돌리면 되고, 원하면 컴퓨터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오랜만에 추억의 팝송들을 가지고 제작한 물품을 파는 분을 보고는 처음에는 CD가 아니라 기술적으로 업그레이드를 해 팝송들을 USB에 담아서 팔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차량 안을 돌아다니면서 파는 것을 보니 CD가 USB보다 나은 점들이 보였다. 우선 확실하게 눈에 띈다. 손에 쥐었을 때 물리적인 무게감이 있고, 그것을 쥐고 포장지의 리스트와 사진을 보면서 얘기를 이어 갈 수 있다. 무엇보다 목표고객층에게 익숙한 기술인지라 거부감이 없다. USB 안에는 훨씬 많은 노래를 담을 수 있을 게다. 노래만 담아서 파는 상대적으로 작은 용량의 USB의 경우, 제작비에서 CD 다섯 장보다 그리 비쌀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노래가 수천 곡이 든 USB를 판다면 어떻게 팔아야 할까? 비록 수록한 노래는 적어도 손가락으로 잡고 팔락거릴 수 있는 부피와 무게를 지니고, 정보가 기재된 종이로 포장되어 있는 CD가 더욱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 USB를 크게 만들든지, 포장을 크게 한다? 그건 USB라는 나름 첨단이라는 핵심을 퇴색시켜 버린다. 최소한 지하철 안에서는 그렇다.
우리 제품의 시공간을 생각하자 ‘2012년 12월의 첫째 날이었던 토요일 정오 무렵의 서울 지하철 3호선’이란 시간과 공간이 갖는 의미가 있다. 그 속에서 ‘추억의 팝송’ CD란 추억상품이 승객들에게 비춰지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구매로 이끄는 방법을 짚어봤다. 사용자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파악해 그에 맞는 제품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위치기반서비스(LBS·Location Based Service)’가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각광을 받고 있다. 위치만으로는 효용성이 떨어진다. 시간과 연계돼야 한다. 하루 24시간 단위에서의 시간일 수도 있고 한 주간, 한 해, 아주 길게는 천년을 단위로 한 시간대에서의 의미와 트렌드가 연결이 돼야 제대로 된 정보로 기능한다. 무엇보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의 목표고객의 행동양식과 감성코드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기술이 발전한다면서 사고파는 행위가 물리적인 접촉 없이 일어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파는 이와의 물리적, 정서적 교감이 힘을 발휘한다. 모두가 디지털로 달려갈 때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차별화해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가 다루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는 시간과 공간적 효용성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제품과 서비스가 팔리는 대표적인 혹은 상징적인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고 마케팅 활동을 점검하고 새로운 기획을 해보자.
[박재항 이노션 마케팅 본부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8호(2013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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