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ax] 한국인 스위스 비밀계좌 뚜껑 열리나

    입력 : 2012.03.26 17: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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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개봉된 맷 데이먼 주연의 ‘본 아이덴티티(The Bourne Identity)’. 작품성과 오락성을 겸비한 최고의 첩보영화로 손꼽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지중해 마르세유 인근 바다에서 총상을 입은 채 표류하는 주인공을 어부들이 끌어올린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부들에게 치료를 받은 주인공은 간신히 의식을 되찾지만 기억을 잃어버린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다.

    주인공인 제이슨 본에게 남겨진 유일한 단서는 살갗 속에 감춰져 있던 스위스 비밀계좌뿐이었다. 제이슨 본은 스위스 비밀계좌에서부터 자신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실타래를 풀어나가게 된다.

    이 영화에서처럼 스위스 비밀계좌는 오랫동안 은밀함의 대명사로 존재해왔다. 예외 없는 비밀주의 때문이었다. 적어도 로버트 러들럼이 이 영화의 원작인 제이슨 본 시리즈를 책으로 발간했던 1980년대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돈을 갖고 튀어라… 그런데 어디로? 올 하반기부터 조세 정보 교환을 위한 국제 공조가 대폭 강화된다. 조세피난처의 중심격인 스위스가 대표적이다. 한·스위스 조세조약이 지난 2월27일 국회에서 비준됨에 따라 두 나라간 조세 정보 공유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스위스의 경우, 비준안이 하원을 통과한 상태다. 앞으로 상원 통과와 100일의 유예기간을 감안하면 7월에는 비준이 완료될 전망이다. 따라서 올 하반기에는 조세 관련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한·스위스 조세조약이 하반기에 발효되더라도 2011년도 정보부터 교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만약 제이슨 본이 한국인이었다고 가정하면, 앞으로는 한국 정부의 정보망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는 셈이다.

    한국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지난 2009년부터 외국과의 조세 정보 교환에 각별한 공을 들여왔다. 조세피난처를 통해 새는 세금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조세피난처에 대해 ‘쌍심지’를 켠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재정을 쏟아 부었던 각국 정부들은 한 푼의 세금이 아쉬워졌다. 당연히 매서운 시선이 조세피난처로 모아졌다. 그 중에서도 한국 정부의 활약은 유난히 눈부셔 보인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최근 OECD 글로벌 포럼의 상세평가(Peer Review)에서 조세 정보 교환체계가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전 세계 68개국과 조세 정보 교환 2009년 이후 한국 정부가 구축한 조세 정보 교환 네트워크는 총 64개국에 걸쳐져 있다.

    방법은 세 가지다. 한국 정부는 △조세조약을 새로 맺거나 개정해 정보 교환을 강화하고 △조세조약을 맺지 않은 국가와는 별도의 정보교환협정(Tax Information Exchange Agreement)을 체결하거나 △다자간 조세행정 공조협약(Multilateral Convention on Mutual Administrative Assistance in Tax Matter)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조세 정보 교환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

    우선 한국 정부는 2009년 이후 20개국과 조세조약을 제·개정해 정보 교환 강화를 추진 중이다. 스위스는 조세조약을 개정해 국회 비준 동의 절차를 밟고 있으며, 싱가포르·벨기에는 조세조약 개정안에 서명을 마쳤다. 또 이탈리아·룩셈부르크·호주·말레이시아·오스트리아 등 5개국은 가서명 상태다.

    아예 조세조약을 제정한 나라도 12개국에 이른다. 이 가운데 파나마는 국회 비준 동의 절차가 진행 중이고, 콜롬비아·우루과이·가봉 등 3개국은 조약에 서명했다.

    2009년 이후 정보교환협정을 통해 조세 정보를 교환하기로 한 나라도 14개국에 이른다. 쿡 아일랜드와 마셜 군도는 국회 비준 동의가 완료된 상태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OECD 회원국 중심의 다자간 조세행정공조협약이다. 현재 34개국이 가입해있는데 한국은 지난 2월27일 국회 비준이 완료됨에 따라 오는 6월 이후 발효될 예정이다. 이 협약에 가입한 국가와는 별도의 조세조약이나 정보교환협정을 맺지 않더라도 금융정보 등의 자동 교환이 가능해진다.

    참고로 34개 가입국은 벨기에, 캐나다,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슬로베니아, 스페인, 스웨덴, 영국, 미국,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한국, 멕시코, 포르투갈, 몰도바, 아일랜드, 아르헨티나, 호주, 브라질, 인도네시아, 일본, 러시아, 남아공, 터키, 인도, 아제르바이잔, 그리스 등이다. 한마디로 어지간한 나라와는 조세 정보 교환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셈이다.

    계좌 정보 콕 찍어야 자료 요청 가능 물론 한국 정부가 해외에 만들어진 탈세용(用) 계좌를 샅샅이 색출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국세청이 스위스 비밀계좌 정보를 받아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로 탈세 목적으로 스위스 은행에 돈을 빼돌린 경우여야 한다. 둘째, 탈세 혐의자로부터 계좌번호를 넘겨받아 스위스에 특정해 통보해야 계좌 관련 정보를 받아볼 수 있다. 이를 테면 ‘2000년 이후 스위스 A은행에 예치된 모든 한국인 계좌 내역을 알려 달라’거나 ‘이 아무개가 스위스 은행에 맡긴 모든 계좌 정보를 알려 달라’고 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셋째, 2011년 이후 정보만 요청할 수 있다.

    따라서 스위스 은행에 묻어놓은 모든 비자금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전직 대통령이 스위스 비밀계좌에 거액을 예치해놓고 있다’는 식의 의혹을 풀 수는 없다.

    더구나 계좌가 탈세 목적으로 쓰였음을 입증해야 할 책임은 국세청에 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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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촘촘해지는 그물, 찜찜한 자산가들 하지만 스위스에 탈세용 비밀계좌를 갖고 있는 자산가라면 ‘뒷골’이 땅길 수밖에 없다. 한국은 지난해부터 해외금융계좌 신고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발 가능성을 따지기에 앞서 심리적으로 상당한 압박 요인이 될 수 있다.

    해외금융계좌 신고제란 국내 거주자나 내국법인이 보유하고 있는 10억원 이상의 해외금융계좌를 국세청에 신고하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이에 따라 연중 하루라도 10억원이 넘는 해외계좌를 가진 국내 거주자 및 내국법인은 다음 연도 6월에 세무서에 계좌 내역을 신고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해외주식에 투자했는데 단 하루만 원화 환산 평가액이 10억원을 넘은 경우도 신고 대상이다. 신고하지 않았다가 적발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지난해는 도입 첫해인 점을 고려해 예외적으로 미신고분의 5%로 감경해줬지만 올해부터는 최대 10%(50억원 초과)를 납부해야 한다. 특히 미신고금액이 50억원이 넘을 경우에는 여기에 더해 정액으로 2억9000만원을 추가 납부해야 한다. 특히 과태료는 5년간 누적된다. 단순계산으로 미신고금액의 최대 50%까지 과태료를 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한국 정부가 전 세계에 걸쳐 펼쳐놓을 ‘그물망’은 더욱 촘촘해질 전망이다.

    한국 정부는 네덜란드, 이집트, 인도네시아 등과의 조세조약을 뜯어고쳐 정보 교환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또 새로 조세조약을 체결할 홍콩, 그루지야 등에는 기존 국제조약보다 한층 강화된 정보 교환 규정을 적용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아직 조세조약을 체결하지 못한 지브롤터, 안도라 등과는 정보 교환 협정 체결을 추진 중이다. 탈세의 유혹에 흔들리는 자산가 입장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적 부담이 가중되는 셈이다.

    시중은행에서 웰스 매니지먼트(Wealth Management) 업무를 맡고 있는 한 고위 임원은 “국내외를 넘나들며 거액을 굴리는 자산가들이 요즘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임원은 “이들 중 상당수는 미국에 금융계좌를 갖고 있는데,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해외계좌 신고제가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걱정이 많다”며 “지금 당장은 문제가 안 되더라도 나중에 적발되면 밀린 과태료를 한꺼번에 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찜찜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진우 매일경제 경제부 차장 jeanoo@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9호(2012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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