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비트라 소방서

    입력 : 2011.11.04 17:12:35

  • 사진설명
    건축가가 디자인한 소방서 비트라(Vitra)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가구를 제작, 판매하는 스위스 가구제조사이다. 1981년 독일 Weil am Rhein에 위치한 제조공장에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당시 지역 소방서의 관할지역 밖에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비트라는 부지 내에 자체 소방서를 짓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후, 소방서 설계자로 이라크 출신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선정됐다. 비트라는 그 전부터 자사 프로젝트에 월드 클래스 건축가를 초청했는데 안도 타다오, 프랭크 게리, 알바로 시저 등이 컨퍼런스 파빌리온, 디자인 뮤지엄, 프로덕션 홀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소방서 프로젝트는 1993년 완공됐으며 이전까지 ‘페이퍼 아키텍트(Paper Architect)’로 폄하됐던 자하 하디드가 건축가로서 평가 받게 되는 첫 번째 작품이 됐다. 또한 비트라 소방서는 그녀의 독특한 건축 해석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소방서는 비트라 직원 지원자로 구성된 소방대원들에 의해 운영됐다. 비트라의 생산시설이 마침내 지역 소방서 관할지역에 포함되면서 건물은 소방서로서의 역할을 마치게 됐고, 한동안 특별한 용도 없이 부분적으로 방치되기도 했다. 이를 두고 하디드의 설계 오류로 인해 소방서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버려졌다고 하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의도한 공간의 융통성으로 인해 용도가 바뀐 이 건물은 지금 비트라 의자 컬렉션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변 풍경의 회화적 조작
    비트라 소방서 전경
    비트라 소방서 전경
    일반적으로 건물을 디자인한다고 하면 ‘주어진 공간을 차지하는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하디드는 우선 주변 환경을 분석한 후 ‘주어진 공간을 정의하는 어떤 것’을 디자인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와 같이 ‘형태와 공간 사이의 관계성’을 찾는 작업에 그녀는 주로 기하학적인 그림을 활용했는데 비트라 소방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디자인 단계에서 하디드는 그녀의 동료인 파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와 함께 기존 건물들 사이로 주변의 풍경을 끌어 들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비트라 캠퍼스 주변에는 농경지와 포도밭이 바둑판과 같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회화적인 수법을 동원하여 이들 인근의 농경지와 포도밭이 이루고 있던 패턴의 모양을 형태적으로 다양하게 변형한 후, 이것을 바탕으로 소방서 건물의 배치 및 형태를 디자인 했다.

    90m에 달하는 길고 좁은 건물을 따라 주변 농경지의 풍경이 흘러가는 듯한 모습은 그야말로 ‘하나의 선으로 표현된 풍경(Linear Landscape)’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비트라 소방서는 형태적으로 주변의 풍경을 담아내는 한편, 비트라 캠퍼스의 인공적인 모습도 함께 공유하는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정지된 움직임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건물의 모습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건물의 모습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비트라 소방서는 기존의 건축과는 다르게 휘어지고, 기울어지고, 끊어진 일련의 콘크리트 벽들로 구성됐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마구 움직이다가 마치 한 순간에 얼어 버린 것과 같은 긴장감과 함께, 어느 한 순간 폭발해 다시 움직일 것만 같은 어떤 힘을 느끼게 해준다. 이들 콘크리트 ‘파편들’은 좁고 낮은 옆모습을 그리며 마치 서로 앞서 나가려는 듯 미끄러져 나오는 형상이다. 특히 이러한 긴장감은 소방차 격납고 위로 콘크리트 캐노피가 널찍하게 뻗어 나오는 모습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콘크리트 재질에서 오는 육중함에 더해, 보는 각도에 따라서 이들 벽들이 여러 겹으로 포개어 보임에 따라 건물이 다소 답답해 보이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건물을 돌아 들어감에 따라 포개어졌던 벽들이 서로 멀어지게 되면 이러한 답답함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추상적인 아름다움과 형태의 단순함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창문 주위나 핸드레일, 전등 디자인 등 많은 부분에서 과감하게 디테일을 생략했다. 이와 함께 콘크리트 모서리의 날카로움을 유지하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내부 공간의 융통성
    내부 전경
    내부 전경
    소방서 내부로 들어가면 건물의 외부에서 느껴지는 것과 유사하게 형태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복잡하게 보인다. 건물과 같은 방향으로 늘어선 일련의 높은 벽들은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공간의 용도에 맞게 휘어지고, 기울어지고, 끊어진다. 최소한의 칸막이만 설치함으로써 내부 공간은 어느 한구석 막힘없이 연결돼 있다. 이와 같은 공간의 융통성은 내부 용도가 변함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의 팽창과 수축을 탄력적으로 흡수할 수 있게 해준다. 소방서 내부에는 ‘빛의 벽’이라고 불리는 황금색 벽이 있다. 빛을 벽의 가장자리 틈새로부터 흘러나오게 함으로써 벽의 평면성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여기서 빛은 면을 공간으로 바꾸어 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따라서 이들 공간에서 빛의 양을 조절하는 것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2층으로 가는 계단
    2층으로 가는 계단
    벽을 따라 노출되어 있는 계단을 통하여 2층으로 올라가면 아래층과 약간 틀어져 있는 공간으로 인해 다시 한 번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직원의 훈련과 회의를 위한 공간으로 구성된 클럽은 중정 위로 뻗어 나와 있는 옥외 테라스로 이어져 있으며, 남측 면에 설치된 루버(louver)는 태양빛의 양을 조절하는 기능적인 역할과 함께 입면에 독특한 캐릭터를 부여하고 있다. 비트라 소방서는 내·외부 공간이 시각적으로 자유롭게 열려 있어 어느 순간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질 때가 있다. 이와 같이 건축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을 만듦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생산시설 내로 끌어들여 개념적으로 연결하려는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소방서라는 기능 이외에도 직원들의 친목모임이나 제품의 전시장과 같은 전혀 다른 용도로도 사용 가능하게끔 하는 공간적인 융통성이라고 하겠다. ■ 자하 하디드
    사진설명
    자하 하디드는 1950년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AA스쿨에서 건축 공부를 마친 후 스승이었던 렘 쿨하스(Rem Koolhaas), 엘리아 젱겔리스(Elia Zenghelis)를 도와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에서 함께 일했으며, 1977년 파트너가 됐다. 파격적 디자인으로 인해 그녀의 작품이 실현되기에는 시스템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는데, 쿨하스와 작업 중 만난 유명 구조 엔지니어 피터 라이스(Peter Rice)로부터 일찍이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80년 OMA에서 독립해 런던에 자하 하디드 설계사무실(Zaha Hadid Architects)을 열었으며 현재 350명이 넘는 직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와 함께 AA스쿨에서의 강의를 시작으로 하버드대, 일리노이대, 오하이오 주립대, 컬럼비아대, 예일대 등 세계 유명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론적으로 영향력 있을 뿐만 아니라 획기적인 디자인을 통하여 홍콩 픽 클럽(Peak Club, 1983)과 웨일즈 카디프 베이 오페라 하우스(Cardiff Bay Opera House, 1994) 등과 같은 많은 국제 설계경기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다. 2004년 여성 건축가로는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했다. 이전에도 건축분야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훈작사(CBE; Commander of the British Empire)를, 2010년에는 로마현대미술관 막시(Maxxi) 프로젝트로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의 스털링상(Stirling Prize)을 수상했다. 그녀는 2008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중 69위에 올랐다. 2010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디드는 건축설계 이외에도 고급 인테리어 디자인 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런던의 밀레니엄 돔 내의 마인드 존(Mind Zone)과 피트 존(Feet Zone)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2009년에는 의류업체인 라코스테와 함께 새롭고 혁신적인 신발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에서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와 공원의 설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와 공원(2010)
    Photo by 서울특별시
    Photo by 서울특별시
    서울 도심에서 역사적으로 오래되고 가장 붐비는 곳 중 하나인 동대문에 문화의 중심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서울시민들에게 기쁨과 멋진 영감을 주기 위한 작품이다. “건축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경계 너머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작가의 믿음을 바탕으로 디자인됐다. 형태적으로 디자인플라자와 공원은 도시 성벽으로 상징되는 경계를 따라서 회전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이 그 둘을 물리적으로 연결해 주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유체와 같은 비정형의 디자인 언어를 통해 플라자와 시민의 소통을 극대화하고 있다. 플라자와 공원은 빈틈이 없는 하나의 조경요소로 엮여 있어 서울의 친환경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공원의 여기저기 비어 있는 공간(void)과 솟아올랐다가 가라앉는, 또한 물결치는 듯한 다양한 모습은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에게 디자인의 혁신적인 모습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로마현대미술관 MAXXI(2010)
    Photo by Zio Paolino
    Photo by Zio Paolino
    이탈리아 최초의 현대미술과 건축을 위한 공공미술관인 MAXXI는 예술을 위한 MAXXI Art와 건축을 위한 MAXXI Architecture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디자인·패션·영화·예술·건축 등 다양한 분야가 ‘Innovation’, ‘Multiculturalism’, ‘Interdisciplinary’ 이 세 가지 단어로 표현되는 미술관의 비전 아래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온실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전통적인 미술관의 고정된 건물로서의 역할을 뛰어 넘어, 안과 밖의 확고한 경계선이 없이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장(field)을 제공한다. 도시 그리드를 재해석해 건물 자체와 주변 환경을 통합하고 있다. 벽들은 기존 건물 사이를 자유롭게 흘러가며 모이고, 뒤틀리고, 꺾어지면서 갤러리와 그 밖의 연결 통로들을 형성한다. 유리·철·시멘트 등과 같은 전통적인 재료만을 사용해 작품을 전시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해 주고 있다. 관람자는 미술관 내부를 따라 걸으며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과 기대하지 않았던 다양한 공간적 체험을 하게 된다. BMW 센트럴 빌딩(2005)
    Photo by Maurizio Mucciola
    Photo by Maurizio Mucciola
    기능적인 생산시설을 새로운 미학의 단계로 발전시키려는 BMW의 야심 찬 계획 하에 시작된 독일 라이프치히의 BMW 센트럴 빌딩은 차체제작, 도장, 조립 등 주요 생산라인 건물들 사이에 위치한다. 전체 생산시설의 신경중추 혹은 두뇌와 같은 역할을 해 직원, 방문자의 동선은 여기를 관통해 흘러간다. 건물의 내부에는 거대한 계단과 같이 경사를 이룬 두 공간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교차하며 메인 로비와 카페테리아 등을 연결하고 있다. 사무직, 생산직 직원 간의 전통적인 분리를 피하고 내부 조직 간에 어떠한 경계도 없음으로 인해 모든 직원 간의 긴밀한 협력을 가능하도록 만든다. 업무적으로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직원들 간의 사교 모임을 위한 공간도 함께 제공함으로써 각자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서로를 거부하지 않도록 한다. [이창호 / 한미글로벌 엔지니어링팀 과장 chlee@hmglobal.com]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3호(2011년 10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