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차 캐즘에 성장 둔해진 배터리 시장 로봇·드론용으로 새로운 돌파구 모색

    입력 : 2025.04.21 17:14:12

  • 전기차 위기 속 배터리 시장의 돌파구로 로봇·드론 산업이 주목받고 있다. 빅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차세대 배터리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과 수요 다변화가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지난 10년간 빠른 성장세를 기록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EV볼륨스(EV Volumes)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54.4% 증가했다. 하지만 2023년 성장률이 35.2%로 둔화했다. 여전히 성장세는 이어지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폭발적 성장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둔화는 전기차 시장이 초기 급성장 단계를 지나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 둔화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급격한 판매량 증대에 비해 부족한 충전 인프라 시설은 소비자들의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게 하는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장거리 운행이 잦은 소비자들에게 충전소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은 내연기관차량 대비 전기차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또한, 전기차의 가격이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보조금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의 구매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전기차 시장은 성숙기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요 증가 속도가 둔화되고 있다. 정치적 요인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반친환경 정책 기조를 펼치면서 전기차 산업의 성장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에도 친환경 규제를 완화하고 화석연료 산업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펼친 바 있다. 향후 이러한 정책 기조가 이어질 경우 전기차 관련 세금 감면 및 보조금 정책이 축소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이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거시 경제 및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 전기차 업계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테슬라·현대차·혼다·도요타, 로봇 시장서 치열한 경쟁
    글로벌 드론업체 DJI는 네팔 콰몰랑마 산에서 최초로 드론 배달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하여 응급 구조 및 환경 보호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길을 열었다고 밝혔다.<사진 연합뉴스>
    글로벌 드론업체 DJI는 네팔 콰몰랑마 산에서 최초로 드론 배달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하여 응급 구조 및 환경 보호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길을 열었다고 밝혔다.<사진 연합뉴스>

    전기차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자동차 제조업체들도 수익성을 고려한 전략을 재정비하고 있다. 초기에는 정부 지원과 친환경 트렌드에 힘입어 전기차 생산을 확대하는 데 집중했지만, 이제는 비용 절감과 수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 변화가 필요해졌다. 특히 유럽과 중국은 전기차 보조금을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있으며, 이는 전기차 제조업체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미국 또한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등을 통해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을 자국 내에서 구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기차 배터리 기업들은 기존의 자동차 시장뿐만 아니라, 새로운 배터리 수요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변화 속에서 배터리 업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로봇과 드론 산업이다.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은 최근 글로벌 IT 및 자동차 기업들이 적극 투자에 나서고 있는 대표적 산업이다. 이들은 로봇 기술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고 적극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테슬라, 현대차의 보스턴 다이내믹스, 혼다, 도요타 등 자동차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테슬라는 2021년 AI 데이(AI Day) 행사에서 인간형 로봇 테슬라 봇(Tesla Bot)을 발표한 후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옵티머스(Optimus)’라는 이름으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테슬라는 이 로봇을 활용해 단순 노동을 대체하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할 계획이다. 최근 공개된 옵티머스의 시제품은 스스로 걸으며 간단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테슬라는 전기차 및 자율주행 기술과 결합하여, 로봇이 공장 및 가정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옵티머스가 장기적으로 수십억 대 판매될 것이라며 전기차보다 더 큰 사업이 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지난 2월 미국 프로농구 올스타전 개막식에서 현대자동차그룹의 자회사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개발한 4족 보행 로봇개 ‘스팟’이 샤킬 오닐과 무대 중앙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 2월 미국 프로농구 올스타전 개막식에서 현대자동차그룹의 자회사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개발한 4족 보행 로봇개 ‘스팟’이 샤킬 오닐과 무대 중앙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현대자동차그룹은 2021년 미국 로봇제작기업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지분 80%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로봇 시장에 진출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원래 미군과 협력하여 개발된 4족 보행 로봇 스팟과 인간형 로봇 아틀라스로 알려진 기업이다. 현재 현대차의 지원 아래 기술을 더욱 고도화하고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는 2족 보행이 가능하며, 점프, 구르기, 계단 오르기 등 인간과 유사한 동작을 수행할 수 있다. 현대차는 보스턴 다이내믹스 AI 연구소를 설립하여, 자율주행, 로보틱스, AI 기술을 접목한 차세대 로봇 개발에 힘쓰고 있다. 또한, 로보틱스와 모빌리티의 융합을 통해 공장 자동화, 물류, 헬스케어 등 다양한 산업에 적용할 계획이다.

    혼다 역시 2000년대 초반부터 아시모(ASIMO)라는 대표적인 인간형 로봇을 개발해왔다. 아시모는 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손을 사용해 물건을 집거나 계단을 오르는 등 상당한 수준의 인간 모방 동작을 수행할 수 있다. 혼다는 차세대 로봇 기술을 활용해 물류, 의료, 재난 구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는 새로운 로봇을 개발 중이다. 중국 기업 샤오미 역시 2022년 휴머노이드 로봇 사이버원을 발표한 뒤 이후 후속 모델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휴머노이드 로봇은 산업용뿐만 아니라 서비스업, 의료, 가정용 로봇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전망이다. 고령화 사회가 가속화되면서 돌봄 로봇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일본, 유럽 등에서는 이미 로봇이 병원 및 요양 시설에서 보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경찰 업무를 보조하는 순찰 로봇, 화재 진압을 돕는 로봇 등도 도입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2025년 글로벌 휴머노이드 로봇 출하량이 1만 대를 돌파하고, 2030년에는 500만 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배터리 시장의 새로운 기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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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용 드론 배터리 수요 증가

    드론 산업 역시 빠르게 성장하며 배터리 수요를 증가시키고 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군사·산업용 드론의 활용이 급증하면서 배터리 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군사용 드론의 경우, 장시간 비행을 위한 고에너지 밀도 배터리가 필수적이며, 산업용 드론은 운송·농업·건설·측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면서 고성능 배터리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글로벌 1위 드론업체 DJI는 글로벌 드론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배터리 기술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외에도 스카이디오, 베이온드 등 글로벌 드론 기업들은 배터리 기술 개발을 강화하고 있다. 드론용 배터리는 경량화, 고밀도화, 충·방전 속도 향상이 필수다. 하지만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로는 장시간 비행에 한계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리튬메탈, 리튬황,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 연구가 진행중이다.

    최근 배터리업계는 로봇, 드론 등 신규 성장이 유망한 배터리 관련 기술 개발에 열중하며 본격적인 시장 대비에 나서고 있다. 초고속 충전 배터리 기술을 보유한 이스라엘 유니콘 기업 스토어닷이 글로벌 배터리 생산기지로 한국을 낙점하고 대규모 투자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미·중 무역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탈중국과 글로벌 사업 확장의 교두보로 한국에 대한 주목도 역시 커지고 있다. 스토어닷은 국내 배터리 기술 전문기업 JR에너지솔루션과 손잡고 초고속 충전 배터리 양산을 위한 합작법인(JV) 설립을 추진한다. 스토어닷이 보유한 초고속 충전 기술 노하우를 적용해 JR에너지솔루션의 생산기술로 배터리를 만들어내는 형태로 협력한다. 반도체 산업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위탁생산방식(파운드리)과 유사하다. 양사는 올해 연산 1.5GWh 규모 배터리를 생산할 예정이고, 2027년 4GWh 규모로 생산량을 점진적으로 늘려나간다. 또 전기차 배터리뿐 아니라 드론과 휴머노이드 로봇용 초고속 충전 배터리도 함께 양산한다. 글로벌 수요 확대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경우를 대비해 최대 10GWh까지 생산량을 확대한다는 구상도 세웠다. 10GWh는 일반적인 고성능 전기차 약 13만 대에 탑재할 수 있는 용량이다. 일반적인 리튬이온 배터리 기준 10GWh 생산 공장을 지으려면 최소 1조원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초고속 충전 배터리 기술을 보유한 이스라엘 유니콘 기업 스토어닷의 충전배터리.
    초고속 충전 배터리 기술을 보유한 이스라엘 유니콘 기업 스토어닷의 충전배터리.

    2012년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연구원을 중심으로 해 설립된 스토어닷은 세계 최초로 5분 충전으로 100마일(약 160㎞) 주행이 가능한 ‘100 in 5’ 기술을 선보인 초고속 충전 배터리(XFC·Extreme Fast Charge) 전문 기업이다.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 대비 4~5배 빠른 충전 속도로 2400회 이상 초고속 충전이 가능한 배터리 기술을 보유했다. 특히 스토어닷과 같은 초고속 충전기술 보유 기업은 특히 드론과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AI 기술을 접목한 로봇의 전력 소모량이 크게 늘면서 충전 속도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스토어닷 관계자는 “초고속 충전 기술을 접목한 전기차 배터리를 중심으로 시장 수요에 맞춰 드론, 로봇용 초고속 배터리 생산량도 점차 늘려나갈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삼성SDI 역시 현대자동차와 손잡고 로봇에 최적화된 배터리를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현재 대부분의 로봇 산업군에서는 전용 배터리의 부재로 전동 공구나 경량 전기 이동수단(LEV ·Light Electric Vehicle) 등에 쓰이는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하지만 구조가 복잡하고 비정형적인 로봇의 특성상 배터리 탑재 공간이 제한적인 데다 규격에 맞춰 작은 셀을 적용하면 출력 용량도 함께 줄어드는 고질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초고속 충전 신기술 개발 경쟁도 가속

    양사는 이번 협업으로 배터리 형태를 제한된 공간에 최적화하는 동시에 에너지 밀도를 향상시켜 출력과 사용시간을 대폭 늘린 로봇 전용 고성능 배터리를 개발한다. 협약에 따라 현대차·기아 로보틱스랩은 신규 개발 배터리의 로봇 적용 평가 및 성능 고도화를 담당한다. 다년간의 로봇 개발 및 운용 경험으로 축적한 기술 노하우를 활용해 배터리 최대 충·방전 성능, 사용 시간 및 보증 수명 평가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삼성SDI는 에너지 밀도 향상을 위해 고용량 소재를 개발하고, 설계 최적화를 통한 배터리 효율 고도화를 추진한다. 이를 통해 배터리 사용 시간이 기존 대비 대폭 늘어나고 가격 경쟁력도 갖출 것으로 기대된다. CATL 역시 드론 및 로봇 전용 배터리를 개발하며 시장 확대를 꾀하고 있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국내 배터리 기술 경쟁력이 뛰어난 만큼 로봇과 드론용 배터리 기술 개발도 충분히 앞서 나갈 수 있다”며 “그간 지지부진했던 국내 배터리 생태계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추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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