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주목받는 폐배터리 재활용, 2040년 87조원 시장… 한국은 기준도 없다

    입력 : 2022.10.18 10:55:29

  •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전기차에 대한 공급망 재편이 본격화하면서 배터리 재활용 시장 성장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IRA법에 따르면 내년부터 전기차 보조금을 받으려면 리튬 등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자재를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폐배터리를 수거해 미국 현지에서 광물을 추출하면 ‘미국산’으로 분류된다. 배터리 재활용이 중국을 제외한 현지에서 소재를 조달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셈이다.

    배터리업체 관계자는 “현재 배터리 공급망에서 리튬 등 여러 소재를 중국에서 조달하는 비율이 높다”며 “IRA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어 폐배터리를 활용해 IRA 조건을 일부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배터리 관련 광물 가격이 치솟는 점 또한 재활용 시장에 불을 붙이고 있다. 실제 니켈과 리튬 등 전기차 배터리에 사용되는 광물의 경우 수요가 늘며 가격이 치솟고 있다. 게다가 코발트와 흑연 등 일부 광물은 중국을 비롯한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큰 상황이다. 특히 리튬의 경우, 리튬이온 배터리에 반드시 필요한 소재지만 생산량을 단시간에 급격히 늘리기도 어렵고 리튬 정제 국가가 칠레와 중국으로 크게 쏠려 있어 공급 차질이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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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자원정보서비스에 따르면 탄산리튬 가격은 최근 1킬로그램(㎏)당 486.5위안까지 올랐다. 지난해 9월 1일 1㎏당 115위안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1년 새 4배 이상 인상됐다. 탄산리튬은 리튬 원석을 채굴한 뒤 가공한 형태다. 이를 다시 수산화리튬으로 정제해 ▲양극재 ▲음극재 ▲전해액 원료로 사용한다. 보스턴컴퍼니그룹(BCG)은 “리튬 가격이 지난 2년간 10배 이상 급등했다”며 “리튬 재활용 프로젝트가 상당 수준 확장되고 업계에서 유망하거나 가능성 있는 모든 신규 리튬 채굴 프로젝트가 실행된다고 가정하더라도 2035년 무렵에는 리튬 공급이 예상 수요 대비 24% 부족해 공급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폐배터리를 사용하면 리튬 채굴에 수반되는 환경오염을 줄이면서 공급량 증가로 리튬 가격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포스코경영연구원에 따르면 폐배터리 재활용을 통해 다시 쓰이는 원자재만 오는 2025년엔 12만 t, 2030년엔 40만 t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2030년 배터리에 필요한 원자재 400t의 10%를 차지하는 규모다.

    하인환 KB증권 애널리스트는 “최근 노골적으로 원자재를 무기화하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자원 안보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며 “니켈, 리튬 등 2차전지의 주요 원료 수입국들은 자원 공급망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폐배터리 재활용 산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EV 시장이 2013년 본격화해 아직 대다수 EV 배터리가 수명을 다하지 않았다. 업계에 따르면 EV 배터리 수명은 10년 정도다. 현재는 배터리 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불량품만 재활용하는 수준이다. SNE리서치는 2025년부터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이 급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향후 승용차에서 폐배터리가 쏟아지면 선점 업체들이 경쟁력을 갖게 되므로 완성차업계와 배터리업계가 일찍이 시장 개화에 대비해야 하는 시점이다.

    업계에선 100만원가량으로 여겨지던 전기차 폐배터리 1개 가치가 최근 2배 이상 증가했다고 본다. 한국광물자원공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니켈 값은 99%, 코발트는 54%, 탄산리튬 가격은 500% 올랐다. 전기차에 주로 쓰이는 배터리엔 니켈 36㎏, 코발트 12㎏, 탄산리튬 7.4㎏이 사용되는데 이를 모두 추출하면 300만원가량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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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정이 이러해지자 각국 정부와 기업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이미 전기차 시장에서 앞서나간다는 평가를 받는 중국은 폐배터리 정책을 다각도로 마련하고 있다. 중국은 베이징·상하이 등 17개 도시에서 폐배터리 재활용 시범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폐배터리에서 회수할 핵심 소재 회수 목표치도 정했다. 유럽연합도 2030년 1월부터 배터리에 사용되는 코발트와 리튬 등에 대해 일정 비율을 반드시 재활용 원료로 써야 한다고 정했고, 2025년까지 폐배터리 회수율 목표를 70%로 잡았다.

    김희영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연구위원은 “폐배터리 기준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재활용 단계별로 표준을 제정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2~3년 내 선도기업 결정 폐배터리 재활용업계에선 앞으로 2~3년간 기술 개발과 설비 투자에 따라 선도 기업의 순서가 결정될 것으로 전망한다. 테슬라의 경우 원자재의 92%를 회수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지난해에만 니켈 1300t, 구리 400t, 코발트 80t을 재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차 배터리 세계 1위 업체 중국 CATL은 자회사 비럼프를 통해 폐배터리 사업을 키워왔다. 완성차, 배터리 업체뿐 아니라 배터리 원료를 생산하는 광산 업체까지 폐배터리 사업에 관심을 보인다. 스위스 광산 기업 글렌코어는 캐나다 폐배터리 업체 리사이클에 2억달러(약 255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국내 업체들도 바삐 움직이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해 중국 최대 코발트 생산 기업 화유코발트와 합작법인 ‘포스코HY클린메탈’을 만들었다. 합작법인은 양극재에 들어가는 리튬과 니켈, 코발트, 망간을 배터리에서 추출해 다시 양극재 소재로 공급하는 리사이클링 사업을 담당한다. 전남 광양에 공장을 짓고 있으며 올해 11월 준공 예정이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7월 말 화유코발트와 배터리 재활용을 위한 합작법인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합작법인은 배터리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인 스크랩과 수거된 폐배터리 등에서 양극재 주원료로 사용되는 니켈과 코발트, 리튬을 추출한다. 추출한 메탈은 중국 난징에 위치한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생산 공장에 공급될 예정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에는 북미 최대 배터리 재활용 기업 라이-사이클과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LG화학과 함께 600억원을 투자해 라이-사이클 지분을 2.6% 확보했고 2023년부터 10년간 니켈 2만 t을 공급받을 예정이다. 국내에서는 에코프로씨엔지와 손잡았다. LG에너지솔루션이 충북 청주 오창과 폴란드 공장에서 나오는 폐배터리를 에코프로씨엔지에 공급하면 에코프로씨엔지가 코발트, 니켈, 망간 등 금속을 추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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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밖에 삼성SDI는 폐배터리 재활용 전문 기업 피엠그로우에 투자했다. SK이노베이션 역시 폐배터리에서 수산화리튬을 추출하는 기술을 보유했다. 현대차는 전기차 폐배터리를 ESS용으로 재사용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전 세계 폐차장과 딜러사 등으로부터 폐배터리를 회수, 운반하기 위한 네트워크와 시스템도 구축하고 있다. GS건설도 자회사 ‘에네르마’를 통해 리튬이온 배터리 재활용 사업에 진출했다. 전기차 배터리와 직접적인 사업 연관성이 없는 기업들도 폐배터리의 성장 가능성과 친환경성을 높이 평가하고 관련 산업에 선제적으로 진출하는 모습이다.

    국내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시장 자체가 아직 초기 단계이고 전기차를 한 번 구입해 6~7년을 탄다고 가정하면 2026~2027년은 돼야 의미 있는 정도의 폐배터리가 발생할 것으로 본다”며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폐배터리 사업뿐만 아니라 중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의 광물 업체와 협력을 늘리는 식으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업체들의 참여가 늘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보통 폐차 업체가 폐차를 사들여 부품과 배터리 등을 분리하고 성능 검사를 한 뒤 재사용·재활용 여부를 결정한다. 문제는 폐차 업체 대부분이 지자체에 등록한 영세업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업체들이 위험 화학물질이 들어 있는 배터리를 차체에서 분리해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제기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폐배터리 관련 제도가 미비한 데다 폐배터리 기준조차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정부가 처리 기준·표준 마련해야 이에 비해 중국은 배터리 이력 관리는 물론 생산자가 재활용까지 책임지는 ‘생산자 책임제’를 시행 중이다. 원자재별로 니켈, 코발트, 망간은 98%, 리튬은 85%, 기타 희소금속은 97%라는 구체적인 회수율 목표까지 정했다. 배터리에는 각종 중금속과 전해액이 들어가 폐배터리를 매립하면 토양 등 환경오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앞서 EU(유럽연합) 입법기구인 유럽의회도 최근 배터리 원자재 채취부터 제품 생산에 이르기까지 ‘지속 가능한 기준’을 담은 ‘지속 가능한 배터리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는 배터리를 제조할 때 재활용 원료 사용을 의무화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리튬과 코발트 재활용 비율은 2030년 각각 4%, 12%에서 2035년 10%, 20%로 늘어난다. 폐배터리 회수율은 2023년 45%, 2025년 65%, 2030년 70%로 정했다. 전기차 보급이 확산되면서 폐배터리 시장도 커질 것으로 예상돼 정부가 나서서 폐배터리 재활용 단계별 국가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선진국들은 배터리 원재료 채굴, 제련 비용 절감을 위해 일찌감치 배터리 재활용 산업 육성에 나섰다. 중국도 정부 주도로 강력한 재활용 정책을 펼치지만 우리나라 폐배터리 재활용 산업은 여전히 초기 단계다. 폐배터리 기준부터 확실히 정하고, 제대로 된 배터리 회수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폐배터리 산업 육성책이 절실하다.” 김희영 연구위원의 우려 섞인 진단이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5호 (2022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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