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신화’ 넘보는 K배터리

    입력 : 2022.03.14 14:31:51

  • 세계 각국이 탄소중립 달성을 목표로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를 예고하면서 전기차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르면 2035년에는 전기차 신차 판매가 내연기관차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면서 글로벌 완성차업체 간 기술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기차의 주행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이자 제조원가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이차전지(배터리)’가 주목받고 있다.

    배터리는 상대적으로 기술적 진입장벽이 높은 데다 초기 투자부담이 큰 탓에 전 세계 상위 10개사가 시장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 CATL, BYD 등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풍부한 양산 경험과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5각 생산체제
    LG에너지솔루션의 5각 생산체제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K배터리’ 3사의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은 전년 대비 77% 늘어난 90.1기가와트시(GWh)로 집계됐다. 시장점유율은 30.4%에 달하는데, 사실상 작년 전 세계서 팔린 전기차 3대 중 1대에는 ‘K배터리’가 실렸다는 의미다.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소비심리 위축,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으로 인한 생산차질 등을 이겨내고 이뤄낸 성과라서 더욱 뜻깊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핵심 원자재 확보에서부터 리사이클링 사업까지 거대한 밸류체인을 지닌 배터리 산업을 ‘제2의 반도체’로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삼성과 SK, LG, 롯데, 포스코, GS 등 국내 주요 그룹들 역시 배터리 산업의 성장성에 주목하고 앞다퉈 대규모 투자를 실시하고 있다. 특히 대표주자인 ‘K배터리’ 3사는 글로벌 완성차업체와의 합작투자 계획을 연이어 발표하며 전 세계로 사업 영토를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사진설명
    ▶LG-GM, SK-포드 등 배터리 ‘한미 동맹’ 구축 국내 배터리업체들이 최근 가장 공을 들이는 시장은 전 세계에서 전기차 판매가 가장 빠르게 늘고 있는 북미 지역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북미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2021~2025년 연평균 성장률은 58%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중 무역분쟁의 장기화 속에서 기술력을 입증받은 국내 배터리 제조업체들이 현지 완성차업체와 손잡고 조단위 합작투자 계획을 공개하며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미국 에너지부 등에 따르면 오는 2025년까지 미국 내 건설 예정인 13개 대규모 배터리 생산설비 중 11개가 국내 3사 관련 설비로 파악됐다. 계획대로 투자가 이뤄진다면 미국 내 전체 배터리 생산설비 가운데 국내 기업의 설비 비중이 현행 10%대에서 70% 수준까지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업체별로는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 최대 완성차업체 GM과 합작법인 ‘얼티엄셀즈’를 설립하고 최대 4개의 배터리 합작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얼티엄셀즈는 올해부터 미국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1공장(35GWh)에서 배터리 양산을 시작하고, 테네시주의 2공장(35GWh)을 내년 본격 가동할 계획이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심장부로 불리는 미시간주에서도 연내 3공장(35GWh) 착공에 돌입할 예정이다.

    SK 배터리 공장
    SK 배터리 공장
    또한 LG에너지솔루션은 스텔란티스와의 합작공장(35GWh) 설립, 미시간주 홀랜드 단독공장 추가 투자 등을 통해 향후 200GWh 이상의 생산능력을 확보하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최근 GM의 메리바라 회장이 LG와 협력을 지속하면서 조만간 4공장 계획을 발표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양사의 배터리 합작투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SK온 역시 미국 2위 완성차업체 포드와 합작법인 ‘블루오벌SK’를 설립하고 114억달러를 투자해 테네시주, 켄터키주에 합작공장 3기를 건설 중이다. 오는 2025~2026년 순차 가동 예정이며 완공 시 최대 생산능력은 129GWh에 달할 전망이다. 국내 배터리 3사 중 후발주자로 꼽히는 SK온은 조지아주에도 3조원을 투자해 1~2공장 건설을 추진하며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해외 배터리 공장 증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프리 IPO(기업공개) 유치에 나섰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투자 규모는 점차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SDI는 세계 4위 완성차업체인 스텔란티스와 손잡고 북미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양 사는 배터리 합작법인을 세우고 오는 2025년부터 미국에서 연간 23GWh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셀, 모듈을 생산하기로 했다. 특히 삼성SDI는 최근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스텔란티스 외 다른 고객과도 협력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밝히면서 배터리 합작사 추가 설립에 청신호를 켰다.

    최재원 SK온 대표
    최재원 SK온 대표
    ▶K배터리, 폴란드·헝가리 ‘관문’서 유럽 공략 미국과 함께 양대 완성차 시장으로 꼽히는 유럽연합(EU)은 내연기관차 퇴출이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자동차의 평균 탄소 배출량이 일정 기준을 초과하면 완성차업체에 벌금을 부과하고 있으며, 2035년에는 사실상 내연기관차 신차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같은 변화에 발맞춰 국내 배터리 3사는 수년 전부터 헝가리, 폴란드 등에 생산 거점을 세우고 유럽 전기차 배터리 시장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EU 내 배터리 생산설비 중 국내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64.2%에 달하며, 국내 배터리 3사의 EU 시장 판매 점유율은 71.4%를 기록했다. 3사는 EU 내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 생산설비 규모를 2021년 99.7GWh에서 2025년 204.1GWh로 두 배 이상 늘린다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SK온은 유럽의 ‘관문’으로 일컬어지는 헝가리에서 현지 정부의 지원을 받아 3개 배터리 공장을 짓기로 했다. 지난 2020년 코마롬에 7.5GWh 규모의 1공장을 건설해 운영에 돌입했고 올해 상반기에는 10GWh 규모의 2공장 가동에 착수한다. 최근에는 2024년 양산을 목표로 이반치에 30GWh 규모의 3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SK온은 포드와 함께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배터리 합작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향후 생산거점 추가 확보가 유력한 상황이다.
    삼성SDI 전기차 배터리
    삼성SDI 전기차 배터리
    LG에너지솔루션은 오는 2024년까지 1조4000억원을 투자해 폴란드 브로츠와프 공장을 증설하고, 신규 생산거점을 확보해 유럽에서만 100GWh 이상의 생산능력을 확보할 방침이다. 지난 2017년 완공된 폴란드 브로츠와프 공장은 LG에너지솔루션의 핵심 생산거점으로, 단계적인 증설을 거쳐 70GWh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SDI 또한 헝가리 북부 괴드시에서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지난 2019년 1공장 생산라인 증설을 마친 데 이어 최근에는 2공장 신규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폭스바겐, BMW, 볼보 등을 고객사로 두고 있는 삼성SDI는 헝가리 공장을 주력 생산거점으로 키우고 있다. 업계서는 헝가리 공장의 생산능력이 2021년 24GWh에서 2025년 67GWh 이상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배터리를 차량의 일부 부품으로 치부해왔던 유럽이 전기차 시대 도래를 앞두고 배터리 신기술 개발, 양산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며 “한국은 리튬이온 배터리 관련 글로벌 리딩 파트너 국가로서 유럽에서 배터리 양산 경험과 선도 기술 등을 높게 평가받고 있다”고 전했다.

    최윤호 삼성SDI 사장
    최윤호 삼성SDI 사장
    ▶배터리-완성차 ‘합종연횡’, 내재화 시도까지 전기차 시대 도래를 맞이한 글로벌 배터리, 완성차 업계의 대응 전략은 각양각색이다. 국경을 뛰어넘어 손을 맞잡는 기업들이 나타나는 한편 일부 완성차업체들은 전기차 배터리를 직접 생산하겠다는 ‘내재화’ 선언까지 내놓고 있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국내 배터리 3사 또한 배터리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일본 혼다자동차는 LG에너지솔루션과 북미 지역에서 전기차 배터리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법인 설립 시점과 지분 비율, 공장 용지 등 세부 사항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최대 40GWh 규모의 합작공장 설립 방안이 검토 대상에 올랐다. 이는 고성능 전기차를 연 60만 대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금액으로는 4조원에 달한다.

    폐쇄적인 부품 공급망과 하이브리드차 중심의 판매 전략을 고수해온 혼다는 일본 현지 업체인 GS유아사와 배터리 합작사를 설립했지만 그동안 전기차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최근 미국 GM과 전기차 플랫폼을 공유하는 동맹 수준의 협력관계를 구축하며 활로 모색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GM과 얼티엄셀즈를 설립한 LG에너지솔루션의 기술력에 주목했다는 후문이다. 도요타자동차는 지난 2020년 일본 파나소닉과 배터리 합작회사 ‘프라임 플래닛&솔루션’을 설립하고 배터리 제조비용을 절반 수준으로 낮춘 ‘반값 배터리’ 생산을 예고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중국 CATL, BYD와도 배터리 사업 협력을 강화하면서 ‘일중 배터리 동맹’을 구축했다.

    LG에너지솔루션 전기차 파우치 롱셀 배터리, LG에너지솔루션 전기차 파우치 배터리
    LG에너지솔루션 전기차 파우치 롱셀 배터리, LG에너지솔루션 전기차 파우치 배터리
    닛산자동차는 르노·미쓰비시 연합과 전기차 플랫폼을 공유하고 프랑스와 영국, 중국, 일본에 총 220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함께 확보하기로 했다. 유럽 최대 완성차업체인 폭스바겐은 지난해 노스볼트 등 협력사와 함께 유럽에서 6개 배터리 생산공장을 짓겠다고 전격 발표하며 ‘배터리 내재화’ 청사진을 내놨다. 유럽 신생 업체와 손잡고 배터리를 직접 생산하겠다는 발표에 당시 국내 주식 시장에서 배터리 관련주 주가가 출렁이기도 했다.

    국내서는 현대자동차그룹이 LG에너지솔루션과 손잡고 아세안 시장 공략에 나섰다. 양 사는 11억달러를 공동 투자해 인도네시아 카라왕 지역의 산업단지에 전기차 15만 대 이상의 고성능 배터리 셀을 생산할 수 있는 합작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이곳 합작공장에서는 고성능 리튬이온 배터리셀을 생산해 2024년부터 생산되는 현대차, 기아의 전용 전기차 등에 공급할 예정이다. 인도네시아는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니켈과 코발트, 망간 등이 풍부한 지역이자 동남아 경제의 중심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
    ▶핵심 원재료 수급 다변화는 넘어야 할 과제 전 세계적으로 배터리 산업이 성장하면서 핵심 소재 확보가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리튬과 니켈, 코발트 등 원재료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가운데 지나치게 높은 중국산 소재 수입 비중이 향후 ‘K배터리’의 숨통을 틀어쥘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광해광업공단에 따르면 지난 2020년 배터리 핵심소재인 수산화리튬 수입량의 79.1%가 중국산으로 집계됐다. 수산화리튬은 양극재의 재료로, 니켈·코발트·망간 등을 적정 비율로 배합해 만든 전구체와 섞으면 양극재가 완성된다. 같은 기간 또 다른 원재료인 수산화코발트, 황산코발트의 대중 수입 의존도 역시 80%를 웃돌았고 수산화니켈의 중국산 비중도 절반을 넘었다. 음극재 제작에 쓰이는 흑연의 경우에는 사실상 수입 전량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업계서는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에 배터리 수요가 많은 만큼 원자재, 반제품 가공공장이 몰려 있어 가격경쟁력 측면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례로 리튬의 국제 거래가격은 달러가 아닌 중국 화폐 위안으로 책정된다. 세계 리튬 매장량의 절반 이상이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미에 몰려있지만 이를 가공한 리튬 화합물 최대 생산국이 바로 중국이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GM 합작법인 얼티엄셀즈의 전기차 배터리 팩.
    LG에너지솔루션·GM 합작법인 얼티엄셀즈의 전기차 배터리 팩.
    국내 배터리업체들은 중국 원자재업체들과 전략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장기 공급 계약을 해놨기 때문에 당장 수급 불안이 닥칠 가능성은 적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국 당국의 정책 변화에 대응하고 원자재 수급선 다변화를 위해 해외 합작법인 설립, 지분투자 등에 적극 나서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1월 독일 벌칸 에너지와 2025~2029년 수산화리튬 4만5000t을 공급받기로 했다. 이에 앞서 지난 2020년 말에는 세계 최대 리튬생산업체인 칠레 SQM과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SK온의 모회사 SK이노베이션은 중국 EVE에너지와 양극재 합작법인을 설립했고 삼성SDI는 중국 최대 리튬 생산기업 간펑리튬의 지분 1.8%를 매입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니켈, 리튬 등 원재료 값 폭동 여파로 배터리업계를 향한 우려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러시아의 광물 수출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글로벌 에너지 정보업체 S&P글로벌플래츠에 따르면 지난해 2월부터 올해 2월까지 탄산리튬 가격은 500% 이상 급등했고 수산화리튬 가격 또한 400% 가까이 올랐다. 외신 등에 따르면 전 세계 니켈 수출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49%에 달한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공급망 다변화뿐만 아니라 폐배터리 재활용, 재사용 사업 등을 통해서도 핵심 원자재 수급을 관리하고 있다”며 “원자잿값 상승이 장기화될 경우를 예의주시하면서 거래처와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윤구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8호 (2022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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