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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현대차 회장의 남은 과제, 지배구조 개편… 글로비스·엔지니어링 발판 삼아 연내 끝내나
입력 : 2022.01.26 09: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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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2’의 최고 스타는 IT 기업 CEO가 아닌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었다.
정의선 회장은 ‘이동 경험의 영역을 확장하다(Expanding Human Reach)’라는 주제로 로보틱스를 설명하며 현대차 그룹의 새로운 비전을 밝혔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은 모빌리티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다시 하고 있다”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제한 없는 사물모빌리티(MoT) 생태계를 구축할 것이며 로봇이 이를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지난 2020년부터 그룹을 이끌며 전기차와 수소전기차 중심의 전동화 전략과 ‘로보틱스, UAM, 자율주행, 수소경제’ 등 4대 신사업을 통해 미래형 기업으로 도약을 추진, 일부 성과도 나오고 있다.
올해 정의선 회장에게는 또 다른 과제가 놓여 있다. 지배구조 개편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영 실질적인 경영권 승계 이슈는 마무리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정의선 회장이 사실상 전권을 쥐고 그룹을 이끌고 있고 회장 승진까지 마무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계에선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에 관심을 갖는다.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CES 2022에서 로보틱스 비전 발표를 위해 로봇개 스팟과 함께 무대 위로 등장하는 모습.
문제는 정 회장은 실질적으로 현대차그룹 지주사 역할을 하는 현대모비스 지분을 0.32%만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정몽구 명예회장 지분 7.15%을 전부 물려받더라도 7.47%다. 주요 계열사인 현대차(2.62%)와 기아(1.74%) 지분도 미미하다.
때문에 현대차그룹은 지난 2018년 지주사인 현대모비스와 정의선 회장 지분이 많은 현대글로비스의 사업 재편을 통한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했지만 엘리엇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당시 현대모비스의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사로 전환하고, 사업 부문을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현대모비스의 알짜 사업이 현대글로비스로 넘어간다는 점에서 주주 반대에 부딪혔다. 이후 현대차 그룹은 시장 반발 등을 고려해 신중한 행보를 보여 왔다.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은 정 회장의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현대모비스를 중심에 놓고 정 회장의 지분율을 끌어 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총수 일가가 지분을 보유한 기업의 가치를 키우거나 상장을 추진하는 방법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렇게 하면 기업 가치가 상승하면서 정 회장이 보유한 지분의 가치도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정 회장이 보유한 자산 가치가 높아지면 향후 지주사 역할을 하는 기업의 순환출자 고리를 끊거나 지배구조를 개편할 때 자금 여력도 생긴다. 정 회장의 지분이 많은 곳은 현대글로비스(19.99%), 현대엔지니어링(11.72%), 현대오토에버(7.33%), 보스턴다이내믹스(20%) 등이다.
결국 수조원의 현금을 마련할 방도가 필요하다. 이에 정 회장이 지분을 갖고 있는 기업들의 가치를 올려 실탄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준비 작업도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양상이다.
최근 정의선 회장이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매각한 것도 그 일환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현대글로비스는 현대차그룹 핵심 3사의 지분율이 낮은 정의선 회장이 상장사 중에서 유일하게 최대주주인 회사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1월 초 정몽구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은 시간외 대량매매(블록딜)를 통해 각각 251만7701주(6.71%), 123만2299주(3.29%)의 지분을 칼라일 특수목적법인(SPC) ‘프로젝트 가디언 홀딩스’에 매각했다. 이로써 정몽구 회장은 4103억원, 정의선 회장은 2009억원을 각각 취득했다.
▶현대글로비스 지분 매각 이번 지분 매각은 일단 공정거래법 개정에 따른 것으로 오너 일가 지분율을 20% 아래로 낮추기 위한 작업으로 풀이된다. 당초에는 상장사의 경우 30%까지 허용됐지만 법 개정에 따라 비상장사와 같은 20%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실제 지분 매각으로 정 회장 지분율은 20%로 낮아졌고, 정 명예회장은 주요 주주 명단에서 제외됐다. 현대글로비스가 내부거래 비중이 높은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다. 2020년 기준 현대글로비스의 총 매출액 중에서 국내외 계열사를 통해 올린 매출 비중이 약 70%에 육박한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삼성동 현대차그룹 본사(GBC) 신축 공사 등 매출의 20%가량을 그룹 내부 물량으로 담당한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매각 대금으로 현대모비스 지분을 추가 매입하거나, 정 명예회장이 보유 중인 현대모비스 지분 7.15%를 승계하고 여기에 필요한 세금을 납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면서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칼라일에 지분을 매각하면서 공정거래법 이슈를 해결하는 동시에 현대글로비스 경영권 안정도 도모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현대글로비스의 경우 지분 10%를 보유한 칼라일 그룹이 정의선 회장과 우호적 관계인 점을 들어 총수 일가 지분을 우회적으로 보유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한다. 실제 프로젝트 가디언홀딩스는 지분을 매입하면서 공동보유 계약을 체결했다. 정 회장이 주식을 추가 매각할 경우, 동반 매각을 청구할 수 있고, 현대글로비스 이사 1명을 지명할 수 있다.
증권가의 한 관계자는 “현대엔지니어링의 경우 기존 주주들이 내놓는 구주매출이 75%가량 된다. 상장을 통한 자금유입이 기존 주주들에게 돌아가는 구조로 엄격히 따지면 기업공개를 통해 투자재원, 자금조달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고 귀띔했다.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실탄 마련용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현대엔지니어링은 매출의 20%가량이 그룹 내부 물량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해왔다. 서울 삼성동 현대차그룹 본사(GBC) 신축 공사도 엔지니어링이 7000억원 규모 일감을 담당한다.
현대차가 인수한 미국 로봇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가 미국 나스닥 시장에 상장되면 정 회장은 이를 통해 얻은 자금도 지배구조 개편에 사용할 수 있다. 정 회장은 개인 돈 2500억원을 보스턴다이내믹스에 투자했다.
보스턴다이내믹스는 2025년 기업공개(IPO)를 준비하고 있다. 상장 여부는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실적에 달려있다. 창립 이후 29년간 연구개발에 주력했던 보스턴다이내믹스가 매출 확대에 성공해야 한다. 현대차그룹이 다양한 분야에서 보스턴다이내믹스와 협력을 강화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개인 자격으로 투자한 정 회장도 보스턴다이내믹스가 상장에 성공하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업계에선 정 회장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승계의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을 점친다.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이 물류계열사 현대글로비스 지분의 10%를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에 매각했다.
현대모비스를 쪼개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대신 기존 주주들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연내에 지배구조 개편도 가능하다. 특히 지주사 역할을 맡을 기업 혹은 사업부에 대한 평가를 시장에 맡긴 뒤 지배구조를 개편한다면, 여러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시나리오를 추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시장의 인식이다. 강성진 KB증권 애널리스트는 “2018년 지배구조 변화를 시도했다가 철회했던 현대차그룹의 경험에 비춰볼 때, 향후 지배구조 변화 과정은 시장 친화적인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7호 (2022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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