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동陵洞-왕릉 터에 자리 잡은 어린이 대공원

    입력 : 2021.08.05 09:37:52

  • 광진구 능동은 사실 귀에 익숙한 동네는 아니다. 다들 ‘어린이대공원 근처’라고 하면 “아!” 하고 그 위치를 떠올리는 곳이다. 능동은 동네 대부분이 서울어린이대공원과 선화예술학교가 차지하고 있고, 그 주변에 일반 주택이 자리한다. 인구수도 2만 명이 넘지 않는다.

    한여름이면 적홍연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서울어린이대공원의 ‘환경연못’, 서울어린이대공원의 ‘바다동물관’에서는 수중 생물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
    한여름이면 적홍연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서울어린이대공원의 ‘환경연못’, 서울어린이대공원의 ‘바다동물관’에서는 수중 생물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
    능동의 한자어는 ‘陵洞’으로 ‘능이 있는 동네’란 뜻이다. 하지만 왕릉은커녕 묘조차 없다. 궁금증은 대한 제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풀린다. 1904년 11월,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되는 대한 제국의 황태자 이척의 태자비 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실에서는 양주 용마산 기슭에 태자비의 능을 마련하고 ‘유강원裕康園’이라 불렀다. 후에 태자가 고종을 이어 순종이 되자 민씨는 순명효황후로 추존되고 유강원은 ‘유능裕陵’이 되었다. 이때부터 이 동네를 ‘능골’이라 불렀고, 바로 지금의 능동이다. 이후 1926년 순종 황제 붕어 후 장지를 양주 미금 홍릉으로 정하자 순명효황후의 유해도 홍릉으로 옮겨 합장했다. 그때부터 능골에 능이 없어진 것이다.

    드넓은 유능 터에는 193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이 들어섰고 이 골프장은 196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다. 그러다 도시가 확장되고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어린이를 위한 대공원을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1972년 공사를 시작했고 준공일은 정해져 있었다. 1973년 5월5일 어린이날. 공사 관계자들은 100일 작전을 펼쳐 마감을 맞추었다. 개장식에는 대통령이 참석했고 그날 무료 개장을 했는데, 약 3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서울어린이대공원은 이후 서울의 유일한 최대 휴식 놀이 공간으로 그 명성을 유지했다. 넓은 잔디밭에 동물원, 식물원, 놀이기구, 관람대 등이 있어 어린이날은 물론 휴일이면 이곳을 찾는 가족 단위 관람객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에버랜드, 롯데월드 등 최신식 놀이기구로 무장한 테마파크가 들어서면서 그 명성을 잃어 갔다. 그러다 2009년 36년 만에 새단장을 하고 나름의 경쟁력을 높였다. 아직도 서울 시민들은 이곳을 자주 찾는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편리한 교통이다.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5호선, 7호선 군자역, 5호선 아차산역 등 지하철에서 내리면 바로 대공원으로 갈 수 있고, 더구나 문이 8개나 되어 접근성도 용이하다. 규모나 시설은 아담하지만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하는 숲과 잔디밭은 서울어린이대공원의 최대 강점이다. 106종 623여 마리의 동물이 있는 동물원과 402종 5506본의 식물원도 꽤 훌륭한 볼거리다.

    세종대학교 정문 맞은편에 있는 대공원 정문은 청기와를 얹었는데 광화문에 필적할 정도의 크기다. 이곳을 지나면 분수대가 관람객을 맞는다. 분수대는 하루에 7번, 30분 단위로 음악과 함께 분수쇼를 펼쳐 동심을 사로잡는다.

    동물원은 말과 염소 등 직접 관람이 가능한 ‘꼬마동물마을’을 비롯해 ‘열대동물관’, ‘물새장’, ‘맹수마을’, ‘원숭이마을’, ‘바다동물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태 연못도 볼 만하다. 이곳의 연꽃은 충남 부여시가 궁남지에서 자라는 연꽃을 기증했다. 궁남지는 신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서동요’ 전설이 깃든 곳으로, 이곳의 연꽃은 크고 화려해 그 자태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상상마을’도 흥미롭다. 일상 생활에서 나오는 폐품을 소재로 제작한 ‘Junk Art’를 전시한 공간으로, 기린, 아바타, 로봇 등이 눈에 들어온다. 대공원 안에는 소파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 유관순, 조만식, 송진우의 동상이 있고, 특이하게도 미군 장교 죤 비 코올터John. B. Coulter 동상도 있다. 코올터 장군은 6.25때 미9군단을 지휘해 포항 전투에서 승리했고, 1951년부터 1958년까지 국제 연합 한국재건단 단장으로 전후 복구에 공훈을 세웠다. 용산구 이태원동 로터리에 있던 것을 남산3호 터널 건설에 따라 1977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서울시설공단 홈페이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91호 (21.08.1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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