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플’ 따라 자사주 사들이는 한국 기업은

    입력 : 2021.08.02 10:42:16

  • 미국에서도 성장성이 가장 높은 기술주로 구성된 나스닥은 최근 5년 새 전 세계에서 가장 투자 수익률이 좋았던 시장 중 하나다. 2020년 이후 코로나19 위기를 거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7월 14일(현지시간) 종가 기준) 나스닥 지수 상승률은 63.7%에 달한다. 2016년 이후로 계산하면 상승률은 192.47%에 달한다. 나스닥 지수는 5년 반 동안 무려 3배 가까이 성장한 셈이다. 이 같은 수익률이 가능했던 이유는 글로벌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기술주가 급등세를 이어간 덕분이다. 같은 기간 미 S&P500과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114.02%, 100.48% 올랐으나 나스닥 상승률을 하회했다.

    특히 지난해 글로벌 주요국의 금리 인하 단행으로 저금리 환경이 마련되자 성장주 강세가 더욱 두드러지면서 나스닥 투자 수익률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산업의 성장성 외에도 미 기술주 주가 랠리의 동인으로 지목되어 온 요소가 있다. 다름 아닌 자사주 매입 전략이다.

    애플은 2019년 750억달러, 지난해 500억달러 등 자사주 매입을 지속하고 있다.
    애플은 2019년 750억달러, 지난해 500억달러 등 자사주 매입을 지속하고 있다.
    자사주 매입이란 기업이 자사의 주식을 매수하는 것을 뜻한다. 자사주 매입은 보통 시장에 회사의 주식이 저평가되어 있다는 신호를 준다. 기업이 직접 나서서 주식을 사들일 만큼 회사가 생각하는 기업가치 대비 현재 주가가 저렴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할 경우 수익성 지표가 개선돼 투자매력도를 높이는 효과를 불러온다. 기업이 내는 실적은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전체 주식 수 혹은 전체 자기자본이 줄어들면서 수익성 지표가 좋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수익성 지표로는 주당순이익(EPS)과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들 수 있다. EPS는 기업이 순이익을 그 기업이 발행한 총 주식 수로 나눈 값이다. 기업이 자기주식을 취득해 소각할 경우 총 발행 주식 수가 줄어들면서 EPS가 높아진다. ROE는 순이익을 자기자본으로 나눈 값으로, 차입금 등 부채를 제외하고 기업이 보유한 순자산 대비 창출하고 있는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주는 수익성 지표다. 역시 기업이 자기주식을 취득해 소각하면 분모인 자기자본이 줄어들기 때문에 ROE는 높아진다. 이에 기업들은 종종 주주가치 제고를 목적으로 자사주 매입을 시행한다.

    자사주 매입 전략은 주로 미국 테크 기업들이 많이 활용해왔다. 대표적으로 미국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애플은 지난 2013년 이후 매년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실시하고 있다. 올해 2분기까지 누적 자사주 매입 규모는 약 4650억달러(약 535조원)에 달한다. 이 같은 공격적인 자사주 매입의 영향으로 애플의 유통 주식 수는 2014년 1분기 250억 주에서 2021년 1분기 168억 주로 3분의 1가량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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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꾸준한 자사주 매입으로 수익성 지표 끌어 올려 애플은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등 IT 제품에 대한 높은 브랜드 충성도와 시장지위를 기반으로 이익을 꾸준히 개선함과 동시에 자사주 매입 전략을 활용하면서 수익성 지표를 크게 끌어올렸다. 이에 ROE가 우상향하면서 결과적으로 주가도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려왔다. 애플의 ROE는 2017년 말 37.7% 수준에서 2021년 1분기 말 기준 111.8%까지 3년여 만에 3배가량 훌쩍 뛰었다.

    김종현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자사주 매입이 주가 상승의 유일한 요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2014년 이후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과 함께 주가 상승 추세를 이어온 점을 고려하면 자사주 매입이 주가 상승 모멘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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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가 방어 차원서 자사주 매입 늘어 그런데 최근 미국뿐 아니라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도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주가치를 제고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우선 지난해 3월 팬데믹 선언에 따른 증시 충격에 따라 자사주 매입 건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계기가 마련됐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주가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이 전례 없이 증가한 것이다. 특히 증시 충격 우려가 높아지자 금융당국이 자사주 취득 요건을 한시적으로 완화하는 등 자사주 매입 장려에 나서면서, 주가방어 차원에서 자사주 매입에 나서는 기업이 우후죽순으로 늘었다.

    금융위원회는 코로나19로 인한 시장 침체에 대응하고자 지난해 3월 16일부터 9월 15일까지 자사주 매입 시 1일 매수주문 한도를 한시적으로 완화했다. 본래 기업이 자사주를 취득할 때 단기간에 대량의 매수주문이 집중될 경우 증시에 급격한 변동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1일 매수주문 규모가 발행주식 총수의 1%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된다. 금융위의 한시적 완화 조치에 따라 이 기간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가를 방어하고자 하는 국내 기업들은 취득신고 총 주식(신탁취득 시 신탁재산 총액)에 대해 한꺼번에 매수주문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이에 작년 3월에만 자사주 매입 공시 건수가 321건으로 치솟으면서 2019년 전체 자사주 매입 공시 건수(262건)를 훌쩍 넘어섰다. 자기주식 취득 수는 팬데믹 이전인 지난해 2월 1920만 주 수준에서 3월 1억2949만 주로 전달 대비 7배 가까이 뛰었다.

    지난 5월 SK텔레콤이 자사주 2조6000억원어치를 소각했다.
    지난 5월 SK텔레콤이 자사주 2조6000억원어치를 소각했다.
    또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 시 종종 직접 주식을 매입하기보다 신탁계약을 통해 증권사에 돈을 맡기고 자기주식 취득과 관련된 거래를 일임하는 방식을 택한다. 신탁계약을 맺을 경우 맡긴 돈의 총액 범위 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사주를 취득할 수 있는 반면, 기업이 직접 자사주를 매입하게 되면 배당가능이익 한도 내에서만 취득할 수 있는 데다 매매 과정에서의 제약이나 보고의무 등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주식 취득 관련 신탁계약 공시 액수는 2월 1230억원에서 3~4월 7634억원, 1조1398억원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지난해 자사주 매입 붐이 일면서 창사 이래 최초로 주주가치 제고 목적의 자사주 매입에 나선 기업도 여럿 등장했다. 현대중공업지주(1242억원),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500억원), 한국철강(700억원), 한화시스템(333억원) 등이다.

    지난해 가장 큰 규모의 자사주 매입에 나선 기업은 국내 최대 철강사인 포스코다. 포스코는 작년 4월 당시 시가총액(15조5000억원)의 6.44%에 해당하는 1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한다고 밝혔다. 그 외 SK이노베이션(4953억원), SK텔레콤(5000억원), 미래에셋증권(3727억원), KT(3000억원) 등 기업이 지난해 3000억원 이상의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결정한 바 있다.

    주목할 점은 올해까지도 주가 부양을 위해 대대적인 자사주 매입에 나서는 기업들이 줄을 잇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에셋증권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1025억원의 자사주 매입을 결정했으며, 현대모비스는 지난 2019년부터 최근 3년 사이 매년 3225억원, 2348억원, 2233억원의 자사주 매입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SK텔레콤은 지난 5월 2조6000억원대의 자사주 소각에 나서기도 했다. 이는 전체 발행주식의 10.8% 수준이다.

    같은 달 메리츠금융지주는 그간 이어온 고배당 대신 자사주 매입·소각을 통해 주가를 부양하는 방식으로 주주환원 정책 방향을 선회한다고 밝혔다. 이에 메리츠금융지주와 그 상장 자회사인 메리츠증권, 메리츠화재는 올 들어 각각 1000억원, 2000억원, 1183억원에 달하는 자사주 매입 계획을 발표한 상황이다.

    포스코 주가가 올 들어 초강세를 보이면서 최정우(사진) 포스코 회장이 작년 사들인 자사주의 평가익이 1년여 만에 두 배 이상 뛴 것으로 나타났다.
    포스코 주가가 올 들어 초강세를 보이면서 최정우(사진) 포스코 회장이 작년 사들인 자사주의 평가익이 1년여 만에 두 배 이상 뛴 것으로 나타났다.
    ▶매입 규모 크고 실적 받쳐줘야 주가 상승 다만 자사주 매입의 주가부양 효과는 미국에 비해 다소 불명확한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성장성이 두드러지는 테크 기업들이 공격적인 자사주 매입 전략을 활용한 반면, 우리나라는 철강, 통신, 증권 등 경기민감 업종 기업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사주 매입 규모가 크고 실적 성장 모멘텀이 두드러진 기업들 중에는 시장을 상회하는 높은 주가 상승률을 기록한 사례도 드물게 포착됐다.

    지난해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결정한 기업 중 주가 상승률이 시장을 상회하는 기업으로는 SK이노베이션, 포스코, KT 등을 꼽을 수 있다. 지난해 1000억원 이상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공시한 기업 9개사 중 공시 이후 지난달 15일까지 코스피 지수를 상회하는 주가 상승률을 보인 기업은 위 3곳뿐이다.

    이들 기업은 자사주 매입 공시 이후 올해 7월 15일까지 각각 1년 5개월, 1년 3개월, 10개월여 동안 주가 상승률이 116.19%, 91.16%, 44.1%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 상승률인 55.09%, 79.99%, 35.99%를 크게 상회하는 수준이다. 이들 기업은 모두 3000억원 이상의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진행한 기업으로 특히 자사주 매입 규모가 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8월 28일 50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발표한 SK텔레콤은 지난달 15일까지 주가 상승률이 31.96%(같은 기간 코스피지수 39.61% 상승)로 양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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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자사주 매입만으로 이 같은 주가 상승세를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도 존재한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전기차 배터리 사업의 성장성이 부각되면서 작년 말 LG화학, 삼성SDI 등 경쟁사가 모두 주가 급등세를 보인 바 있다. SK이노베이션이 자사주 매입을 공시한 이후 LG화학과 삼성SDI의 주가 상승률은 각각 98.78%, 164.08%로 모두 같은 기간 코스피 상승률인 55.09%를 크게 상회했다.

    포스코의 경우 올해 상반기 글로벌 경기 회복에 따라 실적이 급속도로 회복되면서 주가 상승의 발판이 마련됐다. 철강 가격 호황에 따라 포스코는 올해 2분기 2조2014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분기 실적을 달성한 바 있다.

    KT 역시 본업인 통신을 넘어서 금융업 및 미디어콘텐츠 플랫폼 사업 등 신성장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도약의 시기를 맞고 있다. KT의 자회사인 비씨카드는 KT 고객의 생활데이터를 기반으로 디지털 결제플랫폼, 마이데이터 사업을 확대해 생활 금융생태계를 구축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미디어 사업과 관련해 스튜디오지니는 올해 하반기 방영 예정인 첫 오리지널 작품 <크라임퍼즐>을 제작 중이며 연내 총 5편의 작품 제작에 추가 착수할 계획이다. 올 들어 1000억원 이상의 자사주 매입 계획을 발표한 기업은 메리츠금융지주, 메리츠증권, 메리츠화재, LG유플러스, 현대모비스, 미래에셋증권 등 6곳으로 이 중 메리츠증권과 메리츠화재를 제외한 나머지 4곳은 오히려 공시 시점보다 주가가 하락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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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소현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 연구위원은 “지난해 3월 코로나19 팬데믹 선언을 전후하여 증시 악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자사주 취득 요건이 완화되고 국내 기업들의 자사주 취득은 전례 없이 증가했다”며 “최근 주가관리에 대한 투자자의 요구가 강화되면서 향후 국내 기업들의 자사주 취득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다만 강 연구위원은 “단기적 주가 상승을 위하여 자사주 취득을 이용할 경우 기업의 지속성이나 장기성장이 희생될 수 있으며 향후 취득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재처분할 시 주주환원 효과는 한시적인 것으로 그칠 가능성이 커 유의해야 한다”며 “자사주 취득이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주가 부양책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가치 제고와 주주이익 증진에 기여하고 시장에 올바른 신호로 활용될 수 있도록 기업과 투자자의 의사결정에 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문가영 매일경제 증권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1호 (2021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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