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Walking] 야트막한 정상에 펼쳐진 너른 겨울 한강 경기도 파주 심학산
입력 : 2021.02.02 16:44:39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수도권 트레킹 명소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는 곳이 바로 심학산(尋鶴山)이다. 우선 야트막한 산과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산세가 객을 유혹한다. 높지 않다고 시야도 얕은 건 아니다.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풍경에 가슴이 뻥 뚫린다. 하산 후 잠시 들러 배를 채우는 국수집도 정겹다. 일주일 내내 걷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올겨울 눈이 다 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어제를 뒤로 하고 심학산 앞에 섰다. 고작 해발 192m의 낮은 산이지만 눈 온 뒤엔 역시 아이젠이 필수다. ‘요까짓 것 후딱 올라갔다오지 뭐’라고 얕잡아보다간 빙판이 된 내리막길에 엉덩이 부여잡기 일쑤다. 평일 오전 시간, 눈 쌓인 심학산 둘레길엔 벌써부터 걷는 이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히말라야 어딘가를 오를 법한 복장으로 멀리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며 차근차근 조심조심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눈 온 뒤 산바람은 매섭다. 마스크 위로 걸쳐 쓴 안경에 입김이 서리지 않는 건 순전히 이 바람 탓인데, 양달에선 안경알에 뿌옇게 입김이 올랐고 응달에선 선명하게 시야가 트였다. 그건 길도 마찬가지. 그늘진 빙판길을 벗어나니 햇빛 찬란한 양지에 마른 땅이 이어진다. 어쩌면 올 한 해도 그렇겠지. 아마 그럴거야….
큰 바람이 산허리를 감아 넘기니 머리가 쭈뼛 선다.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뒤편에 자리한 심학산은 그러나 초입부터 울긋불긋했다. 오르는 이들의 옷차림 때문인데, 하릴없이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곳은 이미 핫한 공간이다. 고작 해발 192m밖에 안 되는 동산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09년부터. 당시 제주도에 올레길 열풍이 일자 시 차원에서 공공 숲 가꾸기 사업이 진행됐고, 심학산 7~8부 능선에 둘레길이 조성됐다. 총 6.8㎞에 이르는 길은 곳곳에 속이 탁 트이는 전경을 감추고 있다. 이토록 낮은 산에 이처럼 광활한 풍경이 숨어있는 건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다. 첩첩산중이라면 눈에 띄지 않았을 산은 나 홀로 뚝 떨어져 있어 오히려 빛을 발한다. 여기에 유유히 흐르는 한강 둔치가 평야처럼 펼쳐져 있어 한려수도 어딘가인 양 눈이 시원하다.
서패리 꽃마을 부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쪽 고른 배밭을 오르니 벌써 산의 7부 능선이다. 사람 두서넛이 지나도 충분한 둘레길은 이곳부터 동서로 길쭉한 심학산을 한 바퀴 휘감아 돈다. 물론 산을 오르는 길이 여럿이라 방향은 정하기 나름이다. 서패리 꽃마을 외에도 약천사와 교하배수지 인근에 주차장이 있어 시원한 풍경은 길을 걷는 내내 이어진다. 서패리 꽃마을~배밭~정자~낙조전망대~전원마을~솔향기쉼터~교하배수지~약천사~정상~배밭~서패리 꽃마을로 돌아 나가는 길은 쉬엄쉬엄 걷다 쉬기를 반복해도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걷기 편하게 만들어놓은 길 주변엔 간간이 체육시설도 눈에 띈다. 간혹 움푹 패거나 통로처럼 길게 땅을 정리한 흔적이 있는데, 이는 주변 군부대의 작품이다. 지휘차량이 오를 수 있게 닦아놓은 길이 등산로가 됐으니 길옆에 패인 곳은 포 자리요 참호 등 훈련의 흔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낙조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장엄하다 못해 엄숙했다. 출판단지를 끼고 도는 웅장한 한강의 왼편이 김포 신도시라면 오른편 끝자락에 흐릿한 건물이 들어선 뭍의 풍경은 황해도 개풍군이었다. 분단의 현실은 여전했지만 풍경의 기운은 강렬했다.
▶얕지만 사방 탁 트인 풍경
심학산은 그 중심에 약천사가 있다. 둘레길을 걷던 이들은 이곳의 거대한 좌불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른다. 고려시대 절터로 전해오다 1932년 다시 지어진 약천사는 2008년 높이 13m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이 들어서며 이름을 알렸다. 물이 유명해 창건하게 됐다는 말이 돌 만큼 유명한 약수를 들이켜고 사찰 위로 난 약 100m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심학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닿는다. 말이 능선이지 둘레길보다 폭이 넓은, 제대로 닦은 길이다. 물론 정상이 가까워지면 등산로의 경사가 살짝 가팔라진다. 세상사 쉬운 일이 어디 있냐는 듯 숨이 턱에 차면 정상에 조성된 팔각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의 시야는 거칠 게 없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막힌 곳 없이 탁 트였다. 백두대간 긴 산줄기 앞이라면 기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할 동네 뒷산이지만 이곳 파주에선 험한 산세 부럽지 않은 위엄을 자랑한다. 날이 좋으면 멀리 강화도까지 볼 수 있어 낙조 명소로도 이름이 높은 곳이다.
배낭에 챙겨간 간식을 오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면 하산을 재촉하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팔각정에서 둘레길로 내려서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두 시간 넘게 산행을 했으니 가파른 길에선 정신 바짝 차려야 마무리가 한가롭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다시금 배밭이다. 먼저 내려온 이들이 일행에게 한마디 건넨다.
“거 겨울 산은 천천히 가야 한다니까 뭐가 그리 급해?”
“아니 이 사람아 천천히 가든 빨리 가든 어쨌든 한 바퀴 도는 코스인데 어때서 그래?”
“속도를 비슷하게 유지해야지. 그래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고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니까. 인생 급할 게 뭐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