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13) 근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 영화 `레오파드`와 이탈리아 통일

    입력 : 2021.01.07 15:49:16

  • 유럽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벨기에가 네덜란드의 지배로부터 독립해 국가로 형성된 때가 1830년대이고,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와 독일이 각각 하나의 민족으로 정치적 통일을 이룬 때가 1860년대와 1870년대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년 이내 시점이다.

    영화 <레오파드>의 시대적 배경은 이처럼 민족주의가 성행한 19세기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이다. ‘시칠리아’ 하면 영화 <시네마 천국>과 <대부>가 연상되고 파스타 요리와 친절한 사람들이 떠오르는 휴양지이지만, 이탈리아에서도 독특한 역사를 지닌 지중해 섬이다. 영화 <레오파드>는 시칠리아 귀족인 살리나 공작의 시각으로 이탈리아 통일운동과 이후 시칠리아 사회에서 일어난 주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봉건 귀족의 일인칭 시점 작품이라는 이유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성행한 1860년대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자본가가 대두하는 변혁의 시대를 묘사한 웅장하고 우아한 시대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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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칠리아 귀족을 배경으로 한 영화 <레오파드> 영화 <레오파드>(1963)는 시칠리아의 거대한 저택에서 살리나 공작이 가족과 함께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바깥은 정원에서 발견된 군인의 시체로 어수선하고, 다른 귀족이 보내온 편지에는 피에몬테의 혁명이 일어나 영국 전함으로 도망간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살리나 공작의 조카인 탄크레디는 변화하는 시대를 거부할 수 없다며 가리발디 혁명군으로 지원하기 위해 떠난다. 거리에는 삼색기를 든 가리발디 의병과 왕실 군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살리나 공작은 가리발디 군대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궁이 있는 돈나푸가타로 가족을 데리고 떠난다.

    그곳에서 거대한 환영식을 마친 살리나 공작은 자본가인 칼로제로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을 저녁 만찬에 초대한다. 이 자리에서 조카 탄크레디는 칼로제로의 딸 안젤리카에게 반하고, 얼마 후 살리나 공작은 칼로제로와 이 둘을 결혼시키기로 약속한다.

    1860년 10월, 시가지에 삼색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입헌군주제로서 빅터 엠마뉴엘이 합법적으로 이탈리아 왕위를 계승할 것인지를 놓고 찬반 주민투표가 열린다. 하층민인 치치오는 반대표를 던졌으나 투표 결과는 유효투표 512에 찬성 512, 반대 0표로 발표된다.

    얼마 후 가리발디 군대에 지원했던 탄크레디는 붉은 군복 대신 왕실의 군복을 입고 궁으로 돌아온다. 혁명군이 패퇴하자 이탈리아 국왕 군대로 출세의 길을 택한 것이다. 또한 살리나 공작은 새 정부의 상원의원직을 권유받지만 자신은 낡은 시대의 인물이라며 자리를 거절한다.

    영화의 후반부는 거대한 무도회장에서 펼쳐진다. 부유한 귀족들과 군인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탄크레디와 안젤리카는 행복해한다. 반면에 살리나 공작의 얼굴은 창백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대비되면서 몰락해가는 공작의 뒷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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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이탈리아의 아버지 ‘가리발디’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는 수십 개의 소국으로 나뉘어져 통일된 정치나 시민의식이 없었다. 특히 현대적이고 산업화된 북부지역과 달리 시칠리아, 나폴리 등 봉건적 왕조의 통치를 받은 남부지역은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모습으로 전혀 다른 문화권에 속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은 북부지역에서 먼저 시작됐다. 영화에서 살리나 공작이 받은 편지 속에 피에몬테 혁명이 나오는데, 이는 북부 사보이아 왕조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일환이었다. 이후 북부의 사르데냐 왕국이 각종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해갔고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합병해갔다.

    당시 가리발디는 북부 지역의 민족주의 영웅으로 남부지역에서 봉건 왕조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화 초반 살리나 공작의 저택에서 발견된 죽은 병사가 바로 가리발디 군의 병사이다. 가리발디는 붉은 부대라고 불리는 의용군을 이끌고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한 후 그 땅을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사르데냐의 빅터 엠마뉴엘 왕에게 바쳤다.

    이로써 남부 이탈리아까지 통일되고 1861년 엠마뉴엘 왕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된다. 개인의 영달보다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가리발디는 이를 통해 ‘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급부상한 자본가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왕족, 귀족과 어울리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결혼과정을 통해 잘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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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범(귀족) 자리를 대체한 자칼(자본가) 영화에서 살리나 공작이 칼로제로를 만찬에 초대한 날, 칼로제로는 예의를 갖추기 위해 양복과 구두를 착장하지만 그 모습은 왠지 잘못 끼운 단추 같고, 식사시간에 깔깔대며 웃는 딸 안젤리카는 아름다운 용모이지만 천박하게 묘사된다. 새로운 권력층으로 부상했으나 지위에 걸맞은 도덕이나 미적 취향을 갖추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또한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된 후 한 정부 관료가 살리나 공작에게 상원의원 자리를 제안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미 늙었고 구시대의 일원이며 과거 왕권과 관련되어 새로운 일을 맡을 수는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는 상원위원으로 칼로제로를 천거하면서, 그가 나보다 낫지는 않지만 능력이 있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명석하다고 말한다. 살리나 공작은 또한 관료에게 점잖게 “우리(귀족을 지칭)는 최후의 표범이고 우리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자(자본가를 지칭)는 자칼”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이처럼 영화 <레오파드>는 몰락하는 귀족의 모습을 우아하게 그려내는 반면 새로운 권력층이 된 자본가의 영리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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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오르는 자본가와 저무는 귀족 간 동맹 영화에서는 자본가와 귀족의 동맹을 그리는 장면도 자주 등장한다. 탄크레디와 안젤리카의 결혼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혼을 통해 귀족인 탄크레디는 부(富)를, 자본가인 칼로제로와 안젤리카는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을 수 있어 모두에게 윈-윈인 셈이다.

    살리나 공작은 칼로제로와 이 둘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조카인 탄크레디의 팔코네 가문이 얼마나 훌륭한지 강조한다. 이에 대해 자본가인 칼로제로는 딸이 결혼하게 되면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을 포함해 예쎄떼소리 땅 모두를 딸 명의로 서명하고 결혼식 날 신랑에게 금 20만온스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저물어가는 귀족과 새로 부상하는 자본가의 동맹이 결혼을 매개로 맺어진 것이다.

    동맹을 시사하는 또 다른 장면은 엠마뉴엘을 존속시키는 입헌군주제 찬반투표에서 반대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 찬성으로 발표되고, 시선거위원장인 칼로제로가 귀족의 취향을 흉내 내며 살리나 공작을 접대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모습은 기만적인 입헌군주제 수립과 함께 자본가와 귀족의 정치적인 동맹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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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와 권력을 동시에 탐한 자본가들에 대한 비판 영화 초반 살리나 공작의 조카 탄크레디는 “어차피 모든 것이 변한다”는 말을 남기고 가리발디 혁명군에 합류한다. 이후 살리나 공작 역시 변화하는 시대에 타협하기 위해 탄크레디와 자본가인 안젤리카의 결혼을 추진한다.

    그러나 살리나 공작이 영화 속 사제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깔려있다. “단지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교체하는 것일 뿐입니다. 중산계급은 우리가 망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 자리를 빼앗고 싶은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듯, 영화에서는 구세대와 신세대가 교체되면서 가진 자의 자리를 새로운 사람들이 차지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만적인 주민투표 과정을 통해 치치오와 같은 하층민이 여전히 소외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감독은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급부상한 자본가들이 귀족과의 동맹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는 데만 몰두하는 비도덕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데 무게 중심을 둔 듯하다.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살리나 공작의 뒷모습이 우아한 반면 새로 부상한 자본가의 웃음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과연 새로운 권력을 갖게 된 자본가들은 그 지위에 맞는 윤리나 도덕체계를 잘 구축하고 있는 것일까. 가진 자들만의 교체가 아니라 갖지 못한 자를 아우르는 진정한 통일은 요원한 것일까. 요즘처럼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더욱 강하게 부각되는 화두이다.

    [이미영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4호 (2021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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