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우의 명품 와인 이야기] 뉴 스페인 와인 ‘알바로 팔라시오스 레르미타’

    입력 : 2021.01.07 15:10:49

  • 서울 북촌에 위치한 스페인 고급 식당 ‘떼레노’는 2020년에도 어김없이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하나 받았다. 아직 우리나라 미식가들에게 스페인 요리는 생소하지만, 파리에만 가도 젊은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식당은 바로 스페인 식당이다. 무겁고 격식을 차려야 하는 프랑스 요리에 비해 가볍고 경쾌한 스페인 요리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한다.

    스페인에서도 지역에 따라 다양한 와인이 생산된다. 그중에서도 템프라니요 포도를 주로 사용해서 와인을 만드는 리오하(Rioja) 지역 와인과 가르나차를 사용하는 프리오랏(Priorat) 지역의 와인이 가장 유명하다. 스페인 와인은 3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유럽의 와인 생산지들처럼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스페인 와인의 모습은 18세기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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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에 속하는 리오하는 프랑스의 와인 생산지 보르도에서 약 300㎞ 정도 떨어져 있다.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가 보르도에서 약 600㎞ 정도 떨어져 있으니, 보르도의 입장에서는 리오하가 훨씬 더 가까운 이웃인 셈이다. 실제로 보르도에는 스페인 이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현지인 중에서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도 많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리오하에는 와인이 너무 많이 남아돌아 장기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에 창궐한 기생충인 필록세라의 영향으로 보르도의 포도밭들이 황폐화되면서 보르도의 뛰어난 양조가들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해외로 이주하고자 하였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스페인 리오하 지역이 가장 매력적인 대안이 되었다. 때마침 왕위계승 전쟁에서 패하여 해외로 쫓겨난 스페인 정치가들이 주로 런던과 보르도에 거주하였는데, 자연스럽게 와인 비즈니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프랑스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당시 리오하의 와인 생산자들은 와인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으면서도 나아가 와인의 품질을 더 뛰어나게 만드는 프랑스산 225ℓ 오크통과 프랑스 원산지인 세계적인 품종 카베르네 소비뇽을 도입하였다. 물론 오늘날에는 프랑스 포도 품종보다는 토착 품종인 템프라니요로 만드는 것이 더 보편적이다.

    카탈로니아 지역에 위치한 프리오랏은 리오하에 비해 역사는 짧으나 오늘날 가장 다이내믹한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다. 카탈로니아 전체의 와인 생산량은 연간 약 3억ℓ로 카스티야 라만차에 이어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많은 와인이 생산된다. 원래 카탈로니아 지역에서는 고급 와인보다 주로 저가의 와인이 대량으로 생산되었으나, 1980년대에 이곳에 건너온 3명의 와인 메이커에 의해 최고급 와인의 생산지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 3명의 인물은 바로 바르셀로나 태생의 저널리스트 출신인 카를레스 파스트라나(Carles Pastrana), 프랑스 이민자의 아들이었던 르네 바비에(Rene Barbier), 리오하의 오랜 양조장 가문 출신의 알바로 팔라시오스(Alvaro Palacio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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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우선 오래되고 품질이 떨어지는 포도나무를 대부분 뽑아내고, 좋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는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 3명의 젊은이들은 처음에는 최고급 와인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와 지식 그리고 첨단 시설을 함께 공유하며 각자의 와인을 만들었으나, 이후 별도의 와이너리들로 독립하게 된다. 이들의 노력으로 2000년 프리오랏 지역은 스페인 와인의 가장 높은 등급인 DOQ 지위를 갖게 되었다.

    와인 애호가들은 알바로 팔라시오스가 만드는 ‘레르미타(l’Ermita)’를 최고의 프리오랏 와인으로 꼽는다. 레르미타는 1993년 알바로 팔라시오스가 구입한 포도밭의 이름인 동시에 와인 이름으로, 1999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며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14세기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진 지역의 토착 품종인 가르나차(Garnacha)가 90% 정도, 그 외의 지역 품종들이 10% 정도 블렌딩되어 만들어진다.

    아주 약간의 화이트 포도품종이 섞이는 것도 재미있다. 레르미타는 리베라 델 두에로의 핑구스(Pingus), 같은 리베라 델 두에로의 우니코(Unico)와 함께, 스페인 최고의 와인 중 하나로 꼽혀도 손색이 없다. 레르미타는 입안 한가득 부드러운 향기, 산도, 타닌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와인이다. 빈티지에 따라 500병에서 1800병 정도가 생산되며, 매우 오랜 시간의 와인 숙성이 가능하다. 로버트 파커는 2013년과 2016년 빈티지에 100점 만점을 주었다.

    [이민우 와인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4호 (2021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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