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헤밍웨이의 문학적 영혼을 미국 키웨스트에서 만나다

    입력 : 2020.11.03 15:30:06

  • 우리에게 제주도가 최남단의 섬이라면 미국의 최남단의 섬은 어디일까? 미국 마이애미에서 1번 지방도로를 타고 쉴 새 없이 4시간 남짓 달려가면, 2000여 개의 섬들이 모여 있는 ‘플로리다 키스(Florida Keys)’라고 불리는 곳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육지로부터 200㎞ 남짓 떨어진 키웨스트가 바로 최남단의 섬이다. 사실 이름이 섬이지, 플로리다반도에서 42개의 연륙교로 섬과 섬이 연결된 육지 같은 섬, 키웨스트는 미국 본토보다 쿠바가 더 가깝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키웨스트 섬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하지만 1822년 미국령이 되면서 키웨스트에는 아름다운 해변뿐 아니라 호화로운 저택과 아기자기한 상점들, 갤러리, 부티크 등이 거리마다 들어서 마이애미와 함께 플로리다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여행안내서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그런 도시의 이미지를 갖춘 키웨스트. 한 손에는 음료를 들고,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한, 여행자들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만족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노점상들, 거리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독특하다. 그리고 바다로 떨어지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가 없다. 해 질 무렵의 하늘색은 “환상적이다”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또한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던 카페 ‘슬로피 조스’에서 그가 좋아했던 모히토와 프로즌 피냐콜라다를 한 잔 마시고 나면 헤밍웨이가 왜 이 도시에서 10여 년간 살았는지에 관해 궁금증이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한다.

    사진설명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시며 화이트헤드 거리 907번지로 가면 1851년 스페인 식민지풍으로 건축된 이층집에 이른다. 이곳이 바로 헤밍웨이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가 1931년부터 1940년까지 살던 집이자, <오후의 죽음>(1932),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1935), <킬리만자로의 눈>(1938) 등을 포함한 다수의 작품을 집필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68년 11월 24일 미국 국립역사기념물로 지정된 헤밍웨이 집으로 들어서면 한 걸음 더 그의 예술적 영혼과 만나게 된다. 현관을 지나 1층 거실 한 벽면에는 둥근 모양의 방향키와 그 위에 ‘필라(Pilar)’라고 쓴 나무현판이 걸려 있다. 필라는 헤밍웨이가 20여 년간 탔던 낚싯배의 이름으로, 이 배를 타면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인과 바다>를 구상했다고 한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복도 난간을 따라 책이 가득한 책장과 하얀색의 침대가 있고, 그 위에는 이들 부부가 키웠다는 고양이의 후손들이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고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책을 곱씹듯이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면 커다란 헤밍웨이의 초상화 옆에 그와 함께 살았던 4명의 부인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벽면 맨 위에는 헤밍웨이가 22세 때 결혼한 첫째 부인 해들리 리처드슨의 사진이, 그 옆에는 1928년 키웨스트로 함께 건너온 두 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 그 아래로 보그 잡지 기자였던 마사 겔혼,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임지 기자 출신의 메리 웰시 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설명
    피카소가 1904년 파리에 정착해 죽을 때까지 7명의 뮤즈를 만나 다양한 화풍을 만들었듯이 헤밍웨이 또한, 4명의 뮤즈를 통해 대작들을 썼다. 우선 헤밍웨이가 처음으로 만난 뮤즈는 자신보다 여덟 살 많은 연상의 여인 해들리 리처드슨이다. 1921년 만난 지 1년도 채 안 돼 결혼했으며, 몇 달 만에 파리로 이주했다. 이때 헤밍웨이는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F. 스콧 피츠제럴드, 제임스 조이스, 파블로 피카소 등과 교류하면서 첫 장편 소설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1926)를 발표했다. 그러나 1927년 1월 해들리의 친구이자 보그 잡지의 편집자인 폴린 파이퍼를 사랑해 이혼하자마자, 5월에 재혼을 했다. 그해 임신을 한 폴린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자, 1928년 3월 시카고 출신의 소설가 존 더스 패소스의 추천에 따라 키웨스트에 정착하게 되었다. 헤밍웨이와 폴린이 키웨스트로 들어올 땐 지금처럼 섬과 섬을 잇는 연륙교가 없었고, 이들은 플로리다가 아닌 쿠바에서 배를 타고 이 섬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재력가인 폴린의 삼촌이 경매에 나온 지금의 집을 8000달러에 낙찰받아 이들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다. 폴린의 넉넉한 경제적 지원 아래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헤밍웨이는, 1929년 그 유명한 장편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발표하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하였다. 또한, 1933년에는 아프리카를 여행한 후 <킬리만자로의 눈>(1933)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2년간의 결혼 생활도 마사 겔혼이 나타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헤밍웨이보다 아홉 살 아래인 마사는 1937년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면서 자연스럽게 헤밍웨이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0년에 결혼을 한 뒤 이들은 쿠바로 건너가 ‘핑카 비히아’라는 작은 농장에 정착했고,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장편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유명한 소설가의 아내보다는 언론인으로 살고 싶었던 마사는 1945년 헤밍웨이를 곁을 떠났다.
    사진설명
    마지막 흑백사진의 뮤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만난 메리 웰시 타임지 기자이다. 1944년 런던에서 윈스턴 처칠 기자회견을 비롯해 전쟁을 취재하면서 헤밍웨이를 만났다. 이때 둘은 모두 결혼한 상태였지만, 1945년 마사 겔혼이 헤밍웨이 곁을 떠나자 메리 웰시는 전남편과 이혼하고, 1946년 쿠바에서 열린 행사에서 둘은 재혼을 한 뒤 1959년까지 쿠바에서 살았다. 1961년 마사는 미국 케첨에서 헤밍웨이가 극단적 선택을 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1952년 헤밍웨이는 메리와 쿠바에서 생활하면서 불후의 명작 <노인과 바다>를 출판하였다. 이 작품은 1953년 소설부문 퓰리처상을 거머쥐게 되었고, 1954년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벽면에 걸린 몇 장의 흑백사진에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헤밍웨이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본채를 둘러본 후 다시 발걸음은 헤밍웨이가 작업실로 썼던 옆 건물로 이어진다. 이 건물 2층이 바로 헤밍웨이의 문학적 열정과 예술적 영혼이 고스란히 스민 공간이다. 현재 이곳에는 그가 사용하던 타자기, 의자, 가방 등이 전시돼 있다. 사냥과 낚시를 좋아하던 헤밍웨이답게 방안에는 박제된 사슴과 물고기 등도 벽면 한쪽을 차지한다. 매일 이른 아침 이곳에서 하얀 백지 위에 무한한 상상력과 따스한 인간의 삶 등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헤밍웨이. 왠지 어디선가에서 사색하고 열심히 타자기를 치는 모습,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 사냥총을 열심히 닦는 모습,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후 가방을 풀고 있는 모습 등등 헤밍웨이의 다양한 모습이 한 편의 영화처럼 겹쳐서 보인다.

    사진설명
    마지막으로 이 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작업실 앞에 있는 수영장이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 뒤 돌아와 현금 2만달러를 들여 만들었다는 수영장은, 그 당시 키웨스트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수영장 북쪽에는 헤밍웨이가 굳지 않은 콘크리트에 1페니 동전을 꾹 눌러 박았는데, 그것을 찾는 재미도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2호 (2020년 11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