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詩와 낭만이 흐르는 영국 호수지방 컴벌랜드

    입력 : 2020.10.13 10:00:19

  • 새소리, 자욱한 안개, 호수의 잔잔한 물결,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떼 등 한 폭의 수채화가 그려지는 호수지방.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곳이지만, 목가적인 풍경과 보드라운 햇살이 일품인 호수지방은 영국을 대표하는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고향이자, 그의 문학적 영혼이 스민 장소로도 유명하다.

    현지에서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라고 불리는 호수지방은 윈더미어, 그라스미어, 앰블사이드, 코커머스 등 잉글랜드 북서부의 컴벌랜드 일대를 가리킨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서 20㎞, 남북 30㎞에 걸쳐 크고 작은 호수들이 흩어져 있고, 야트막한 언덕과 언덕 사이로 아담한 마을들이 어우러져 자연의 시혜를 마음껏 누리는 모습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워즈워스는 자연의 시가 흐르는 호수지방에서 예술적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특히 경이롭기까지 한 멋진 풍광들이 그를 영국을 대표하는 낭만파 시인으로 만든 원천이 아닐까 싶다.

    호수지방은 워즈워스가 가장 사랑한 곳이자, ‘무지개’ ‘수선화’ ‘초원의 빛’ 등 그의 주옥같은 시들이 모두 이곳을 배경으로 한다. 낮은 언덕과 호수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 앞에 서면 누구라도 시인이 될 것만 같다. 비 갠 오후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워즈워스의 ‘무지개’가, 푸른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과 소를 보면 ‘초원의 빛’이, 호숫가 나무 아래에 수줍게 핀 꽃들을 바라보면 ‘수선화’가 마음속에 일렁인다.

    호숫가 나무 아래/ 미풍에 하늘하늘 춤추는/ 금빛 수선화의 무리/ 은하수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이어져/ 물가 따라 끊임없이/ 줄지어 뻗쳐 있는 수선화/ 즐겁게 춤추며 고개를 까딱이는/ 수많은 꽃을 잠시 바라보네…….(중략) <수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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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시인의 흔적을 따라 유유자적하게 걸으며 느림의 미학을 꿈꿀 수 있는 호수지방은 굳이 지상의 낙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충분하다.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가 흐르는 이곳에서 예술가의 영혼과 만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저 바닥 깊이 눌려 있던 감성들이 스스럼없이 일어선다.

    워즈워스는 1770년 4월 7일 호수지방 북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코커머스에서 다섯째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워즈워스는 당시 영국 북서부 지역의 정치와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제임스 로우터의 법률 대리인이었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윌리엄은 중산층이 다니는 혹스해드 그래머 스쿨을 다녔고, 스무 살 때는 명문대 케임브리지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그 후 프랑스 혁명의 세계를 직접 보겠다는 열망에 불타 파리에서 1년간 머물렀고, 이때 오를레앙에서 아네트 발롱과 사랑에 빠져 예쁜 딸을 낳았다. 서른 살에 고향으로 돌아온 워즈워스는 호수를 끼고 있는 작은 시골 마을, 그라스미어에 정착하였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호수지방을 떠돌며 시를 썼다.

    그의 생가에서 자동차로 30분 남짓 걸리는 그라스미어는 우리의 리(里) 정도에 해당할 만큼 마을의 규모가 아주 작다. 코커머스가 워즈워스 유년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 그라스미어는 시심을 불태우던 곳이자 그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마을이다. 제주도처럼 앙증스러운 돌담이 초원을 가르고, 워즈워스의 시구처럼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마을들이 밀레의 풍경화처럼 그려지는 그라스미어. 시인은 그라스미어를 “인간이 발견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말할 정도로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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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시냇가 주변에는 아담한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고, 시냇물 가에서는 새들이 목을 축이고, 실개천 위에 놓인 다리는 교회만큼이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워즈워스는 교회와 시냇가 그리고 수양버들 밑에서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거나 책을 읽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어휘들은 저마다 그라스미어가 숨겨온 비밀을 품고 있다. 특히, 8년 동안 살았던 도브 코티지에 들어서면 문학적인 삶의 향기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도브 코티지는 현재 ‘워즈워스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당시 그의 일가족이 사용했던 가구, 책, 식기 등 살림살이를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원래 이곳은 여관으로 사용한 것을 워즈워스 부부와 여동생 도로시가 지인의 도움을 받아 살림집으로 개조한 것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코티지의 내부는 생가와 달리 검소하고 소박하다. 벽난로와 주인의 성품을 닮은 꾸밈없는 가구들, 생활용품, 빛바랜 초상화, 복사본의 원고 등이 전시돼 있다. 보잘것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전시품 같지만 가난한 시인의 고뇌와 열정이 남루한 탁자, 낡은 벽기둥, 삐걱대는 마룻바닥 등 곳곳에 스며있다. 조금은 어두운 실내를 천천히 걷다 보면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시를 쓰고 있는 워즈워스를 만날 것만 같다. 잠시나마 흥분되고 가슴 설렌 감정을 추스르고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골목길을 따라 호숫가의 산책로가 눈에 들어온다. 워즈워스는 매일 아침 집을 나와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렸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성찰 등 자신의 내면에 숨겨둔 무한한 감성들을 글로 옮겨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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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8년 5월 워즈워스 가족은 도브 코티지에서 공간이 좀 넓은 알렌 뱅크로 이사를 했는데, 불행하게도 그곳에서 셋째 딸 토마스가 홍역으로 사망하는 일이 생겼다. 어린 자식을 잃은 부부는 더는 알렌 뱅크에 머물지 못하고, 다시 라이달 마운트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워즈워스는 새집을 장만하기 위해 ‘납세 징수 공무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낮에는 세무 공무원으로, 밤에는 가난한 시인으로서 글을 써야 했던 워즈워스. 자식의 죽음과 아내의 우울증,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등을 극복하며 늦은 밤까지 희미한 불빛 아래서 슬픔을 아름다운 글로 승화시켰다.

    도브 코티지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발걸음은 워즈워스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세인트 오스왈즈 교회에 이른다. 중세 시대 때부터 그라스미어를 지켜온 교회는 워즈워스의 시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그저 시인의 삶을 닮아 투박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세월의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늘 그 자리에 있는 교회는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작은 교회를 품고 뒤뜰로 몇 걸음 더 옮기면 ‘1850년 윌리엄 워즈워스, 1859년 마리 워즈워스’라고 새겨진 부부의 비석과 마주하게 된다. 세월의 이끼가 그대로 남아 있는 비석 바로 앞에는 그가 좋아하던 실개천이 흐르고, 물 위에는 오리 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다.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그가 죽어서도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행복이 아닌가 싶다. 1850년 4월 23일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핀 봄날 호수 주변을 산책하다가 감기에 걸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하늘 호수로 떠났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1호 (2020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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