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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제네시스는 제2의 렉서스가 될 수 있을까, 국내선 고급차 시장 1위… 서비스·품질 차별화 관건
입력 : 2020.10.12 14: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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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도요타 에이지 사장이 특명을 내렸다. “메르세데스-벤츠와 BMW에 대적할 세계 최고의 차를 만들라.” 코드네임 ‘F1(Flagship1·플래그십1)’으로 명명한 이 프로젝트에 24개 엔지니어링팀과 디자이너 60명이 달라붙었고 시제품은 400개도 넘게 만들어졌다. 시험 주행 거리는 수백만 ㎞에 달했다.
도요타는 이렇게 6년간의 치밀한 준비를 거친 끝에 1989년 ‘렉서스(Lexus)’ 브랜드를 미국 디트로이트 오토쇼에서 정식으로 선보였다. 렉서스의 첫 차 ‘LS400’과 함께다. 대형 세단 LS400은 최고급 럭셔리 차량의 부드럽고 강력한 주행을 위해 8기통(V8) 4.0ℓ 엔진을 탑재하고 소음을 잡기 위해 고장력강 프로펠러 샤프트를 달았다. 장시간 운용에 따른 차량 손상을 막기 위해 두껍게 크롬을 도금하고 햇빛 손상을 막는 코팅 리어글래스도 적용했다. 도요타 엔지니어들은 차량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애리조나주 사막에서 차량을 수개월 방치하는 실험까지 거쳤다. 30여 년이 흐른 현재, 렉서스는 벤츠와 BMW, 아우디 등 소위 독일 프리미엄 3사와 맞먹는 고급 브랜드 반열에 올라섰다.
지난해 2월 렉서스는 브랜드 출범 이래 전 세계 누적 판매 1000만 대를 달성했다. 지난해 판매량은 약 76만 대다.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서는 벤츠·BMW에 못 미치지만 북미에서는 동급 브랜드로 대우받는다. 적어도 재규어나 볼보 같은 여타 브랜드보다 ‘한 급’ 위 라는 게 공통된 평가다.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대한민국 유일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도 렉서스의 성공을 재현할 수 있을까. 2015년 출범한 제네시스는 2020년 상반기를 기점으로 국내에서만큼은 벤츠·BMW와 겨뤄볼 만한 명차 브랜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싸움은 지금부터다. 전 세계 명차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북미와 중국에서, ‘독3사’ 앞마당인 유럽에서 인정받아야 당당한 글로벌 럭셔리카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러자면 제네시스 임직원들은 렉서스의 면밀한 시장 분석, 부단한 기술 개발을 배우되 차별화된 성공 방정식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독창적 ‘제네시스 웨이(way)’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도로 위 BMW·벤츠 흔해서 제네시스 산다 올해 국내 실적은 현대차 제네시스 사업부를 한껏 고무시켰다. 올해 1~7월까지 제네시스의 국내 판매량은 6만5대다. 벤츠(4만1583대)와 BMW(2만9246대)를 제치고 국내 프리미엄 판매 1위에 올랐다. 이 기간 제네시스 판매량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65% 늘어 3% 증가한 벤츠, 35% 는 BMW를 앞질렀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올해 연간 기준으로도 대한민국 고급차 왕좌는 제네시스가 가져갈 공산이 높다.
사실 제네시스는 2016년에도 국내 고급차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하지만 2016년은 브랜드 출범에 따른 반사효과가 강했다. 올해는 벤츠와 BMW에 대한 고객 쏠림이 가속화한 가운데 제네시스가 준중형~대형까지 세단 라인업과 패밀리룩을 완성하고 첫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을 내놓는 등 브랜드 정비가 1차적으로 완료된 상황에서 맞붙은 것이다. 그만큼 올해 상반기 성적은 의미가 크다. 제네시스만의 ‘룩(look)’이 완성된 준대형 세단 G80 3세대 모델과 첫 SUV GV80은 고급차 선호가 강한 한국 시장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벤츠와 BMW가 너무 많아서 지겹다”는 고객들에게 대안이 될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만족감을 선사한다는 평가다.
G80은 올 들어 8월까지 3만3093대(2·3세대 모델)가 판매돼 지난해 같은 기간 판매 수치를 배 이상 넘어섰다. GV80도 8월까지 2만1826대가 팔리며 연간 목표치인 2만4000대에 다가섰다. 제네시스는 이 추세대로라면 연간 10만 대 돌파도 꿈이 아니라고 본다.
제네시스의 올해 신차 흥행은 벤츠·BMW·아우디·렉서스에 비해 조금 낮은 가격과 디자인·상품성 덕분이다. 그러나 제네시스가 모델 라인업을 어느 정도 완성하며 고급차 브랜드로서 정체성을 강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네시스는 준대형 세단 G80으로 시작했지만 올해 GV80과 G80, G70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 모델을 내놓으며 독자적 디자인을 구축했다. 올해 하반기에는 준중형 SUV인 GV70까지 등장하며 빈약했던 SUV 라인업을 확장할 예정이다. 스포츠 세단 G70으로 젊은 소비자를 사로잡고, 올해는 G80과 GV80으로 중장년층까지 유혹하는 등 제네시스의 고객층이 폭넓은 것도 강점이다.
제네시스 대형 세단 G90
2020년 4월, 제네시스 디자인의 큰 축을 담당했던 루크 동커볼케 현대차그룹 디자인 담당 부사장과 알렉산더 셀리파노프 제네시스 유럽 디자이너가 이직을 했지만 이상엽 현대차그룹 전무의 주도하에 이 같은 디자인 헤리티지는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제네시스의 승부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제네시스는 조만간 GV80을 북미 시장에 수출할 계획이다. 북미 준대형 SUV는 전 세계 럭셔리카 브랜드가 특히 사활을 걸고 경쟁하는 시장이다. 강력한 경쟁자는 아메리칸 럭셔리 ‘링컨’의 에비에이터 등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벤츠 GLE, BMW X5, 볼보 XC60 등이 GV80이 넘어야 할 산이다. 더 어려운 고지는 중국과 유럽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 완성차 시장일 뿐 아니라 독일·일본차에 대한 선호가 각별하다. 2017년 미군의 국내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설치로 격화한 중국의 반한(反韓) 감정도 제네시스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유럽은 말할 것도 없이 독3사는 물론 재규어·랜드로버·볼보가 버티는 프리미엄카의 본산이다. 렉서스도 밀릴 수밖에 없는 곳이다. 제네시스는 유럽·중국에 판매 법인을 최근 설립했다. 정식 출시는 내년부터 서서히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제네시스 유럽 법인은 영국 럭셔리카 애스턴마틴의 유럽 영업을 책임졌던 엔리케 로렌자나를 영업총괄 책임자로 선임했다. 가장 기대를 모으는 GV80부터 미국과 현지에서 좋은 평가를 얻은 스포츠 세단 G70, 3세대 G80이 총출동할 것으로 보인다.
렉서스는 1989년 데뷔 후 30년간 1000만 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비슷한 시기 론칭한 일본 혼다자동차의 고급 브랜드 ‘어큐라(Acura)’, 닛산자동차 ‘인피니티(Infiniti)’의 누적 판매량은 200만~300만 대 수준이다. 이밖에 프랑스 푸조시트로엥그룹(PSA)도 고급 브랜드로 ‘DS오토모빌’을 출범했지만 아직 확실히 안착한 상태는 아니다. 제네시스는 이들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다. 제네시스는 지난해 전 세계에서 7만7135대를 판매했다. 2015년 11월 브랜드 출범부터 올해 8월까지 누적 판매량은 내수 31만2225대, 해외 9만2770대(7월까지 판매량) 등 총 40만4995대다. 단순 어림계산을 해보면 30년 뒤 누적 판매량은 약 250만 대 정도로 짐작된다.
지금 제네시스는 갈림길에 서 있다. 여기서 한 단계 브랜드 업그레이드에 성공하면 ‘값싸고 품질 좋은 대중차’라는 인식을 벗어던지고 ‘독3사+렉서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프리미엄 완성차로 도약할 수 있다. 도약에 성공하지 못하면 어큐라·인피니티처럼 ‘그럭저럭 좋지만 고급차로 보기 애매한’ 브랜드에 머무르게 된다. 만만한 싸움은 결코 아니다. 포뮬러1(F1)에 엔진을 공급할 정도로 정상급 기술을 갖춘 혼다도 고전 중이다. 하지만 현대차그룹 전체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해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과업이라는 점에서 제네시스 사업부의 어깨는 무겁다.
▶타깃 고객 ‘코노소어’를 잡아라 렉서스의 성공 전략 중 하나는 세밀한 고객 분석을 기초로 한 선택과 집중이었다. 1980년대 후반 미국으로 파견된 도요타 엔지니어·디자이너팀은 방대한 분량의 설문조사를 통해 럭셔리카 시장의 고객을 세 부류로 나눴다. 우선 1980년대 기준으로 나이가 많은 노년 부유층은 미국 프리미엄 브랜드인 ‘캐딜락’을 선호했다. 이들은 상당수가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이들이 20대가 됐을 때 전성기였던 캐딜락은 당연히 이들의 드림카였다. 두 번째 부류는 젊은 고소득 전문직들이었다. 이들은 BMW를 선호했고 유명하고 화려한 브랜드를 찾았다. 승차감보다는 자신의 성공을 보여줄 수 있는 고성능 모델이 이들의 타깃이었다. 당시 신흥 주자였던 렉서스는 마지막 세 번째 부류의 고객을 타깃으로 설정했다. 최상류층에 속하는 이 세 번째 고객그룹은 벤츠를 선호했다. 이들은 자동차를 통해 자신의 부와 성공을 과시하기보다는 기술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차별화된 사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브랜드를 찾았다. 브랜드 충성도가 절대적이지 않았던 이 그룹은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하는 브랜드라면 차를 바꿀 의사도 있었다. 렉서스는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북미 딜러도 세심하게 골랐다. 정식 출범을 앞둔 1988년, 도요타의 렉서스 북미 딜러 모집에는 1500개 업체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도요타는 벤츠 등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를 판매한 경력이 있는 딜러들을 신중하게 선별했다. 이듬해 렉서스 론칭 당시에는 121곳의 딜러만 렉서스 판매를 시작할 수 있었다. 렉서스의 초기 결함 대응도 프리미엄 서비스의 모범으로 꼽힌다. 렉서스의 첫 모델 LS400은 크루즈 컨트롤 문제가 발견됐다. 도요타는 1989년 12월 초 모든 렉서스 차량을 조건 없이 전량 리콜했다. 리콜 기간 중 고객에게는 렌터카를 무료 대여했고 수리된 모든 차량은 왁스칠과 주유를 한 뒤 딜러들이 직접 고객에게 차량을 탁송해주기까지 했다. 제네시스는 어떨까. 제네시스의 타깃 고객은 ‘코노소어(Connoisseurs)’다. 코노소어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유래한 말로 요리, 와인, 예술품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자신만의 안목으로 감상하는 일종의 ‘감정가’를 일컫는다. 제네시스 사업부의 한 관계자는 “코노소어는 자신만의 명확하고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합리적 소비를 하는 고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네시스는 진정성 있게 고객의 삶에 스며들어 코노소어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는 제네시스 마케팅의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제네시스 준중형 스포츠 세단 G70의 부분변경 모델
제네시스는 고객들에게 모빌리티 케어에 특화한 프리미엄 서비스도 지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제네시스 버틀러 서비스’는 고객 개인별로 매니저를 두고 세심하게 차량을 관리하는 제도다. 고객이 요청한 시간과 장소에서 각종 소모품을 교환하는 ‘찾아가는 오토케어 서비스’, 여행이나 출장을 떠난 고객의 차를 점검하고 관리하는 ‘제네시스 에어포트 서비스’도 있다.
제네시스 홈투홈 서비스는 제네시스 멤버십 회원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고객맞춤형 프로그램이다. 직접 정비업체를 방문하기 어려운 고객을 위해 고객이 원하는 곳에서 차량을 인수하고(픽업), 차량 수리 후 고객이 원하는 장소로 차량을 인계하는 서비스(딜리버리)다. 제네시스 사업부 관계자는 “고객 맞춤형 서비스로 프리미엄카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고 자연스럽게 브랜드 이미지 상승으로 연결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발생하는 자잘한 품질 논란은 제네시스의 고급 시장 안착을 훼방 놓는다. 제네시스 GV80 디젤 모델은 올해 6월 엔진 진동결함이 불거져 차량 출고를 일시 중단했다. 이밖에 자잘한 소음이나 계기판 주행가능거리 표시가 실제와 다른 문제가 소비자 원성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품질 논란은 제네시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성장통이다. 관건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제네시스가 얼마나 차별화된 서비스로 고객을 사로잡는가이다. 향후 10년의 서비스가 제네시스의 도약을 결정할 것이다.
[이종혁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1호 (2020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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