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원의 마음산책] 내가 통과해온 시간의 길이

    입력 : 2020.09.02 16:29:15

  • 오늘은 여러분과 제가 살아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대관령 동쪽 아래 ‘위촌리’라고 불리는 제 고향마을에 가면 430년 된 대동계가 옛 모습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향약’에 대해서 배우지 않습니까? 마을 단위로 마을 사람끼리 서로 지켜야 할 규범을 만들고 두레패를 만들어서 농사를 같이 짓고 힘든 일은 서로 돕고 어려운 일은 서로 나누어 분담하고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나쁜 일은 또 서로 경계하며 사람답게 살아가자는 것이지요.

    옛날엔 마을의 제일 큰일이 장례 일과 혼사였습니다. 장례 같은 경우는 아무리 가세가 약하고 규모가 작아도 손님이 100명은 왔다 갑니다. 지금은 보통 삼일장을 치르지만, 옛날에는 오일장도 하고 7일장도 하고 그보다 더 긴 기간의 장례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긴 기간의 장례를 하면 많은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도 문제지만, 그렇게 많은 수의 손님을 한꺼번에 겪는 데 필요한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장례식장과 결혼식장에서 보통 일회용 그릇을 쓰는데 예전에는 이런 큰일을 할 때 제일 필요한 것이 식량과 그걸 담을 그릇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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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찬장과 장식장에 아무리 많은 그릇을 쌓아놓았더라도 손님이 스무 명 이상 한꺼번에 오면 무슨 그릇에 음식을 차려내나 걱정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삼백 명이 닷새고 일주일 동안 북새를 친다면 이걸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마을의 대동계란 이런 큰일을 치를 때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집기로는 큰일을 치를 수 없으니 마을별로 그걸 공동으로 장만하고 관리하자는 것입니다. 장례에 제일 필요한 상여도 마을 공동으로 마련하여 관리하고, 잔치와 장례 때 쓰는 그릇도 아예 따로 동네 그릇을 마련해서 사용하고, 혼사 때 쓰는 가마며 결혼할 때 집집마다 사모관대, 족두리 등 이런 일습을 혼자 다 마련하기 어려우니 이것도 공동으로 마련해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입니다.

    또 장례나 혼례와 같은 큰일이 있을 때 혹시 내릴지 모를 비를 피하고 햇빛을 가릴 커다란 천막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천막이 흔해서 시골 초등학교 동문 체육대회를 하더라도 학교 운동장가에 기수별로 많은 천막을 쳐놓는데, 예전에는 이런 천막도 귀해서 이걸 마을에서 공동으로 장만하고 관리했습니다. 그걸 예전에는 천막이라고 하지 않고 ‘차일’이라고 불렀습니다. 해를 가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차일의 이름을 따서 마을 단위의 대동계를 차일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차일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계라는 뜻입니다. 제 고향은 이런 대동계가 400년 넘게 이어온 마을입니다.

    제가 태어난 이 마을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아직도 촌장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지금 강릉 부근에 가면 촌장님이 계시는 마을이 더러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모두 다 없어졌다가 그 시절 일제의 방해에도 끝까지 전통을 고수하며 촌장을 모시고 사는 제 고향마을의 본을 따서 이웃 마을들도 새롭게 촌장님을 모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월 초하룻날에는 집집마다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초이튿날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 다 촌장님 댁에 모입니다. 촌장님에게 합동 세배를 드리고, 마을 사람들끼리 새해 인사를 나눕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요. 이때 할머니 장례를 23일장으로 지내셨습니다. 그럼 23일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 돌아가신 할머니를 마당가 텃밭에 임시로 묘를 씁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겨울 새벽과 저녁마다 마당가 텃밭에 나가서 가묘 앞에 호곡하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석수장이 두 사람이 산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큰 바위를 깨서 그 자리에서 상석과 석물을 만들어 장삿날 발구라는 기구에 실어 소와 사람이 끌어 산소로 옮깁니다. 그것을 손으로 정을 쪼아 만드는 시간이 대략 보름 정도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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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1년 동안 집안에 상막을 모시고,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새로 지은 뜨거운 밥으로 상식을 올리고 또 보름과 삭망 아침에, 이렇게 한 달에 두 번 차례를 올립니다. 그때 아버지가 학교에 근무하셨는데, 직장을 1년간 쉽니다. 강릉 시내에 꼭 보아야 할 볼일이 있어 출입할 때에도 김삿갓이 쓰고 다녔던 방갓을 쓰고 누더기와 같은 베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갓을 쓰는 것은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늘의 해를 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옛날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벼슬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를 살았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지요. 아버님이나 어머님을 자기가 잘못 모셔 돌아가셨다고 집안의 가장이 직장을 그만두면 나머지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두 농경사회 때의 일입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가능했고 지금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사람이 옛날 사람들보다 효성이 못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시대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부모상을 당했을 때 자식이 1년이 아니라 3년을 그렇게 해도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습니다. 바깥에서 벼슬을 하든 아니면 선생님을 하든 가장이 몇 년 산소 옆에서 시묘살이를 할지라도 괜찮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면 당장 한 집안의 경제가 위태로워지는 것이지요.

    어릴 때 이런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 지금 제 나이가 육십이 넘었는데, 그것은 물리적인 시간이고 제 마음속에 제가 통과해온 시간은 300년도 더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제가 실제 지나온 세월은 육십 년이지만, 어릴 때 본 마을의 풍습과 할아버지들의 모습, 지금까지도 지켜져 내려오고 있는 대동계의 모습과 촌장제의 흔적 등 제가 몸으로 경험하고 통과해온 시간이 조선시대 때 태어난 소년이 현재의 시간까지 살아오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기에 서울에 와서 어릴 적 유년의 추억이나 살았던 이야기를 하면, 지금 그분이 살아 계시다면 100세 가까우실 분들이 저를 아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겁니다. 이분들은 저를 보고 나이도 어린 것이 같잖게 자기보다 더 옛날 얘기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시기에 읽었던 김유정이나 이효석의 작품들, 특히 김유정의 작품들을 보면 그게 사오십 년 전의 작품인데도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 한 사람 한 사람의 캐릭터가 우리 동네 사람들 같은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이 불을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요. 전기를 사용하기 전과 그 후는 또 천지차이입니다.

    저는 그렇게 유교 전통적인 마을, 스무 살이 될 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서 자라 지금 이렇게 어른이 되어 그 시절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있답니다.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0호 (2020년 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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