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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1막1장] 오페라 라보엠의 뮤지컬 버전 <렌트> 뉴욕 슬럼가 예술가들의 희망 이야기
입력 : 2020.06.05 13:5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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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25일, 찻잔에 물을 따르던 36살의 젊은 예술가가 갑작스런 통증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급사했다. 그의 이름은 조나단 라슨. 연극을 전공하며 뮤지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브로드웨이의 전통과 현대 대중음악을 결합하는 작품을 구상했다. 그가 사망한 날은 난방도 안 되는 작은 다락방에서 7년간 갈고 닦은 뮤지컬 <렌트>가 세상에 첫선을 보인 다음날이었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에는 ‘올해 최고의 작품, 렌트’라는 헤드라인이 올라갔다. 청천벽력 비보에 남겨진 배우들과 스태프진은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허나 이내 패기 넘치는 열정을 쏟아 그가 남긴 유작을 다듬었다. 그 결과 오프브로드웨이 150석 극장에서 초연한 지 3개월 만에 뮤지컬은 1200석의 브로드웨이 41번가의 네더랜더 극장으로 직행했다. 뮤지컬 <렌트>는 ‘브로드웨이를 재창조했다’는 극찬과 함께 2008년 9월까지 장장 12년 5개월 동안 총 5123회 공연을 브로드웨이에서 이어가며 2000년 전후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조나단 라슨은 뮤지컬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뉴욕 맨해튼은 허드슨 강 하구 매립을 통해 만든 계획도시다. 매립하기 전 도시 형태를 완료해 맨해튼의 길은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다. 그 맨해튼의 남쪽과 북쪽을 가로지르는 큰 길이 240㎞나 되는 브로드웨이로 세계에서 가장 긴 길이다. 브로드웨이에서 극장들이 밀집된 구역은 1904년 뉴욕타임즈 본사가 이전해 명명된 타임스퀘어 지역이다. 이곳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뉴욕 최고의 번화가로,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세계 상업·금융·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한 뉴욕을 문화의 중심지로도 만든 브로드웨이의 역사를 거슬러 가보자. 1737년 영국에서 법령으로 조례된 특허를 발급받지 못한 극장들이 문을 닫자, 공연종사자들이 대거 미국 뉴욕으로 넘어오면서부터 브로드웨이는 시작되었다. 1867년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이 워싱턴 포드극장에서 암살당했을 당시 이미 뉴욕 브로드웨이에는 12~14개 극장이 자리해 미국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유럽에서 발발한 세계대전으로 얻은 경제 호황에 힘입은 브로드웨이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뉴욕의 상업극장들은 쇼 비즈니스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 미국 중산층을 위한 볼거리 흥미위주의 뮤지컬을 제작해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된다. 이후 뮤지컬은 연극적인 요소를 체계적으로 가미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성찰 공연으로 진화하며 황금기를 구사한다.
▶뮤지컬에 시대정신을 불어넣으려 한 라슨의 시도
예술은 당대의 진보적 산물이다. 썩은 고인물이 되지 않기 위해 예술은 변화의 물결에 더욱 민감하게 변화해 시대정신을 담는다. 세상의 변화에 무감각하게 한 우물만 고집해도 안 되지만 욕망이 넘쳐 과욕을 일삼아도 실패한다. 거대 상업주의에 휩쓸려 브로드웨이의 예술성은 이미 좌초되었다고 반성한 일부 예술가들이 브로드웨이에 대항해 오프브로드웨이(Off-Broadway)라는 신인들을 위한 비주류 예술극장들을 만들었다(이후 오프브로드웨이도 변질되자 오프오프-브로드웨이가 또다시 형성된다).
얼핏 느끼기에, 오페라 <라보엠>을 원작으로 했다는 뮤지컬 <렌트>는 우아하게 턱시도를 입고 오페라극장 박스석에서 관람해야할 것만 같다. 허나 뮤지컬은 첫 장면부터 동성애, 마약, AIDS 등 불편한 이야기가 거침없이 쏟아진다. 더구나 지나치게 단순화된 세트는 흥미를 반감시킨다. 작가의 요절로 작품을 세밀하게 다듬지 못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쑤셔 넣은 듯한 거친 내용은 집중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왜 이 뮤지컬에 최고의 찬사가 쏟아질까.
오페라 <라보엠>이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이야기였던 것처럼 뮤지컬 <렌트>는 뉴욕 슬럼가의 절박한 예술가들을 노래한다. 다만 오페라에서 여주인공 미미의 죽음을 비극적인 낭만으로 그렸다면 뮤지컬은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현대사회에서 단절된 예술가들의 열정적인 삶을 절절하게 선사한다. 뮤지션, 영화제작자, 철학자와 대학강사, 팝아티스트 등의 직업을 가진 이들은 인종 또한 히스패닉, 아이랜드계, 유태인, 흑인 등으로 다양하다. 당시 브로드웨이 극장에서는 젊은이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전통적인 젊은 레퍼토리인 <그리스> <미스 사이공> 같은 작품들도 거의 중장년층 이상의 관객들이 대부분이었다. 뮤지컬 <렌트>는 <헤어> 이후에 브로드웨이에 발을 끊은 뉴욕의 젊은 층을 근 30년 만에 극장으로 다시 불러들었다. <렌트>의 성공은 단순히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내일 죽을지라도 오늘의 열정을 노래한다
환영받지 못하는 파격적인 등장인물들은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입장에 놓인 그들은 하나같이 낭떠러지 앞의 풍전등화 입장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이들은 절대 세상을 원망하거나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사랑의 믿음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렌트>는 불안한 내일을 걱정하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뮤지컬은 음악적으로도 타 장르에 배타적이지 않고 열린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음악과 대본, 가사를 모두 창작한 라슨은 음악적으로는 하나의 콘셉트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감행했다. <렌트>에는 강렬한 록과 탱고, 발라드, 가스펠, R&B를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합해 타 뮤지컬에서는 접할 수 없던 음악적인 풍성함이 서려있다. <렌트>는 보수와 진보적 성향으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양대 산맥인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동시에 석권하며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지형을 뒤바꿨다. 또한 뉴욕 드라마 비평가상, 외부 비평가상, 드라마리그상, 오비상 등 뮤지컬과 관련된 거의 모든 상을 휩쓸며 ‘렌트 신화’를 이어갔다. 2000년 한국 초연 당시 <렌트>는 문화적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전달했다. 더불어 강력한 뮤지컬 팬덤 문화를 만들어 한국 뮤지컬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올해는 <렌트>가 한국에 초연된 지 20주년 되는 해이다. 우리는 젠더프리를 넘어 젠더리스를 이야기하고 에이즈도 죽음과 연결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다. 물질만능의 폐해로 인한 비관적 시대가 계속되는 한, <렌트>가 가진 긍정적 희망의 가치는 변치 않는다. 그래서 뮤지컬 <렌트>의 시대성은 2020년 오늘도 유효하다. 뮤지컬 <렌트> - 160분(인터미션 20분) ·공연일시 : 2020년 6월 16일~8월 23일
화~금 20시 | 토·일·공휴일 14시, 18시30분 | 월 공연 없음
·공연장소 : 디큐브아트센터
·출연 : 아이비, 오종혁, 정원영, 최재림, 장지후, 배두훈 등
[황승경 국제오페라단장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7호 (2020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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