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가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와인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로 제어되는 최신 온도조절 탱크나 개당 100만원이나 하는 프랑스산 225ℓ 오크통을 양조 과정에 사용한다면 그만큼 와인 가격도 비싸질 수밖에 없다. 양조 과정보다 비용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원재료인 포도 가격이다. 좋은 품질의 포도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포도밭의 입지가 중요하며, 세심한 관리를 위해 많은 노동력도 필요하다. 최고의 요리사에게는 최고의 재료를 선별하는 능력이 필수적인 것처럼,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품질의 포도가 우선이다.
와인용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와인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농부들은 이웃의 큰 회사에 포도 혹은 원액 형태로 판매를 한다.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돈이 들어가는 양조장비가 필요한 데다 만든 와인을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판매 직원들을 고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큰 회사에 포도를 납품하는 경우,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지만 그 이익은 몹시 작다. 시장 환경이 좋지 않을 경우 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가격에 판매하도록 내몰리기도 한다.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에게 인기 있는 프랑스 보르도나 부르고뉴, 캘리포니아에는 고급 와인을 만드는 부가가치 높은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들도 있으나, 이런 혜택을 누리는 농부들은 일부이다. 이 지역에도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적지 않은 농부들이 있다.
농부가 재배한 포도가 가장 좋은 가격에 거래되는 곳은 바로 프랑스 샴페인이다. 샴페인의 농부들은 프랑스 안에서도 부농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보르도나 부르고뉴의 고급 와인 생산자들은 와인에 필요한 포도를 직접 재배하지만, 대부분의 샴페인 생산자들은 이웃으로부터 포도를 구매한다. 샴페인을 대표하는 모엣 샹동(Moet & Chandon) 역시 25%의 포도만을 직접 생산하며 나머지 포도는 모두 구매한다. 샴페인 한 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 1.2㎏의 포도가 필요한데, 샴페인 하우스들은 이를 위해 평균 약 7유로, 약 1만원 정도의 가격을 농부들에게 지불한다. 병입되어 레이블까지 부착된 와인이 아닌 원자재 포도 가격이 벌써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프랑스 마트에서 판매되는 와인의 평균 가격(4유로)보다 두 배 가까이 비싼 가격이다. 샴페인 하우스들은 비싼 포도 가격을 지불하기 위해 역시 샴페인을 높은 가격에 팔아야 하는데, 다행히 전 세계 시장에서 샴페인의 수요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샴페인이 오래전부터 이런 번영을 누려온 것은 아니다. 지난 20세기 초 샴페인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바로 포도나무의 흑사병이라는 별명을 가진 필록세라다. 필록세라는 엄밀히 말하면,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벌레이다. 1858년 프랑스에 상륙하여 수십 년간 프랑스 포도밭을 황폐화시킨 필록세라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 코로나19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필록세라는 코로나19처럼 외국에서 전염되었고 전파력이 몹시 강하였으며 피해가 큰 반면에 초기에 치료법이 없었다. 19세기 중반 증기선이 대중화되면서 유럽과 미국의 교역이 크게 늘어났다. 이때 프랑스 포도 재배업자들은 미국산 포도를 많이 수입하고 실험하였는데, 당시에 지금과 같은 동식물 검역이 없었던 때라 북아메리카의 포도나무에 자생하던 필록세라가 같이 묻어 들어왔다. 필록세라에 자생력이 있던 미국산 대목을 이용한 해결책이 1890년 프랑스 정부에 의해 공식 승인되었다. 필록세라는 그 이듬해인 1891년, 프랑스 전역을 황폐화시킨 이후에야 샴페인에 모습을 보였다. 그 해 8월 5일 샴페인의 경계에서 겨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샤상(Chassins) 마을에 필록세라라는 적군이 발견되었다. 그 전까지 샴페인 사람들은, 샴페인처럼 부지런한 농부들에게는 필록세라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공식적인 치료법이 승인된 이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샴페인은 필록세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911년 6500ha의 포도밭이 필록세라의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샴페인 포도밭 절반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검증된 치료법이 있었음에도 초기 방역에 실패했던 이유는 첫째로 이 치료법이 농부들에게 너무나 많은 비용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포도나무를 모두 뽑아야 하는 문제도 있었지만, 그 이후에도 포도를 재배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야만 했다. 지금은 프랑스 와인 농가를 방문하면 줄을 지어 질서 있게 늘어선 포도나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필록세라 이전에는 라빈 엉풀(La vigne en foule) 이라는 방식의, 쉽게 말하면 많은 포도나무 군집을 무질서하게 키우는 방식이었다. 포도를 재배하는 새로운 방식은 기존보다 3배 이상의 유지비용이 들었다. 피해가 컸던 두 번째 이유는 필록세라가 샴페인 지역에서 초기에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샴페인 농부들 중에서는 필록세라가 실제로 심각하지 않은데, 정부와 상인들이 세금과 이윤을 내기 위해 꾸며낸 조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르네 라마레(Rene Lamarre)라는 야심찬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샴페인의 혁명이란 뜻을 가진 레볼루시옹(La Revolution Champenoise)이란 신문을 발간하였으며 1891년 농부들을 규합하여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프랑스 최초의 와인 협동조합인 ‘다므리(Damery)’ 협동조합이다. ‘카브 쿠페라티브(Cave Cooperative)’라 불리는 프랑스 와인 협동조합은, 소규모 농가들이 돈을 모아 생산시설과 판매조직에 투자하여 설립한 회사로 오늘날 프랑스의 와인산업을 지탱하는 조직이다. 전국에 600개가 넘는 협동조합에서 프랑스 와인의 절반을 생산한다.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샴페인은 필록세라를 이겨내고 전 세계 명품 와인 시장에 우뚝 서있다. 필록세라라는 음모에 대항하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던 협동조합은, 이후 필록세라 치료법을 농부들에게 교육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와인 상인들도 손 놓고 있지 않았다. 농부들을 돕기 위해 기금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엣 샹동의 경우 샴페인 최초의 실용 학교를 설립하여 지역의 농부들이 필록세라를 이겨내고 좋은 품질의 포도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였다. 프랑스 농협은행인 크레디 아그리콜은 1910년부터 전국에 지점을 개설하였는데, 농가들이 필록세라를 이겨내기 위한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오늘날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 와인 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최고급 샴페인의 대명사로 알려진 ‘돔 페리뇽(Dom Perignon)’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필록세라 역시 끝을 보이기 시작한 1921년에 수확한 포도로 처음 만들어졌다. 필록세라와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1930년이 되어서야 완전히 복구되었고, 오랜 인내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 많은 농부들이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1920년 그리고 1921년의 좋은 작황은 고향에 남은 와인 농부들이 숨을 쉴 수 있는 재무적인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샴페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도승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돔 페리뇽은 필록세라 이후 조성된 새로운 포도밭 체계의 첫 번째 고급 샴페인이자, 오랜 인내의 상징이다. 돔 페리뇽 샴페인의 아이디어는 사이먼 브라더스(Simon Brothers)라는 모엣 샹동의 영국 파트너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돔 페리뇽 이름의 권한도 처음부터 모엣 샹동의 것이 아니었고 1927년, 이웃 샴페인 하우스인 메르시에(Mercier)로부터 양도받은 것이었다. 돔 페리뇽은 1935년 처음 영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미국 시장에 소개되며 대공황 이후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혁신이 생기며, 그 혁신이 이후의 세대를 튼튼하게 해주는 근원이 된다. 만약 필록세라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포도재배 시스템이 생기지 않았다면 돔 페리뇽 역시 탄생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