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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⑪ 욕망을 불태운 광인이자 어리석은 어릿광대, 햇살 빛나는 스페인 말라가서 만난 ‘피카소’
입력 : 2019.12.09 17: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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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가을 햇살이 유난히도 빛나던 날, 스페인 안달루시아 남쪽 해변에 있는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14세 때는 바르셀로나 로잔미술학교의 입학시험에서 성인이 한 달 걸려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단 하루 만에 그려 세상을 놀라게 했고, 23세 때는 천재 예술가들의 본거지인 파리 몽마르트르로 이주해 앙리 마티스를 상대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다.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한 피카소는 마티스가 이끌던 야수파에 대항해 큐비즘(입체파)을 선보이면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아 한 사물을 정면·좌·우·뒤, 때론 위·아래에서 본 시점을 한 면에 그려낸 그의 엉뚱한 상상력은, 미술계와 일반인들의 가치관을 뒤흔들 만큼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그의 왕성한 창조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9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화, 드로잉, 세라믹 등 4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을 만큼 그의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말 그대로 한 편의 영화처럼 살다간 피카소는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추앙받을 만하다.
고색창연한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대성당이 눈앞에 나타난다. 도시가 워낙 작고 아담해 구시가지 어디에서든 대성당을 볼 수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피카소가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은 곳이다. 대성당을 등지고 말라가 서민들의 넉넉한 인심이 살아 숨 쉬는 몇 개의 골목길을 지나자 수백 마리의 비둘기가 메르세드 광장에서 낭만적인 오후 햇살을 즐기고 있다. 광장 끝에는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피카소의 생가가 여행자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현재 기념관으로 바뀐 피카소의 생가는 그의 명성에 비해 작고 초라하지만, 그의 예술적 영혼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과 사진들로 가득하다. 1층에는 스케치와 드로잉 작품이 전시돼 있고, 2층에는 도자기와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비디오실, 그리고 피카소의 아틀리에처럼 꾸며 놓은 작은 방이 있다. 특히 2층 전시장에는 피카소가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입었던 옷과 그가 어릴 때 앉았던 의자, 부모님 사진, 해맑고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찍은 사진, 자식들과 함께 찍은 노년의 사진 등이 전시돼 인간적인 모습과 어린 시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계단 복도에 걸려 있는 피카소의 사진 한 장은 강인한 삶과 예술적인 감성을 느끼게 한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이 촬영한 이 사진은, 둥근 창에 낮은 중절모를 쓰고 강력한 눈빛을 쏘아내며 오만과 자신감으로 넘쳐나는 피카소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 속의 피카소는 황혼의 나이이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청년 시절의 모습 그 이상이다.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은 고스란히 하얀 캔버스에 담겨 피카소를 세계의 화가로 성장시켰다. 그런데 피카소의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면 아주 흥미 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된다. 그의 그림은 그가 만나고 사랑했던 여자들에 따라 화풍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올리비에, 에바, 올가,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 프랑수아즈 질로, 자클린 로크 등 이들은 피카소의 연인이자 뮤즈였다. 피카소가 제일 먼저 사랑을 나눴던 사람은 23세 때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만난 동갑내기 올리비에였다. 지독하게 가난한 시절에 8년간 올리비에와 동거하며 그녀를 모델로 열심히 그렸던 피카소. 이때 그는 부랑자, 매춘부, 거지 등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대상으로 인간의 비극과 우울함을 짙은 청색으로 그렸는데, 올리비에와 사랑을 나누면서 침울한 청색의 화풍을 버리고 붉고 화려한 장밋빛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두 번째 연인 에바 구엘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사랑은 멈췄다. 에바 구엘은 피카소의 친구인 마르쿠스의 연인이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늘 조용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안타깝게도 피카소를 만난 지 3년 만에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에바가 죽은 지 2년이 되던 1917년, 세 번째의 여인 올가를 만나 1918년 7월에 결혼하고 첫아들 파올로를 낳았다. 이때 피카소는 예술가로서 명예와 부도 함께 얻었다. 하지만 올가의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생활 때문에 이들은 1935년 이혼을 했다. 물론 이혼하기 전에 피카소는 이미 17세의 마리 테레즈와 풋풋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순정적이고 소녀 같은 이미지로 피카소의 작품에 등장한다. 밝고 화려한 파스텔 색조로 그려진 ‘꿈(1932년)’이라는 작품이 바로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마리도 무식하다는 이유로 버림을 받았고, 피카소가 죽자 자살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한 여인이다.
피카소의 생가를 차분하게 둘러보는 동안 ‘청색 시대’, ‘큐비즘의 창시자’, ‘시대의 바람둥이’, ‘미술계의 투우사’ 등 피카소를 수식하는 말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말라가의 작열하는 태양이 아름다운 이유는, 피카소의 뜨거운 열정 때문일 것이다. 도시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천재 화가 피카소가 뛰어다니던 골목길과 해변, 세례 받은 성당 등 유년 시절의 피카소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라가 여행은 행복 그 자체다. 이 아름다운 도시를 떠날 때쯤이면 피카소가 남긴 유언 중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나는 오늘날 명성뿐 아니라 부도 손에 넣었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면 나 자신을 진정한 의미의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화가는 조토와 티치아노, 렘브란트와 고야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사람들이 지닌 허영과 어리석음, 욕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끄집어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1호 (2019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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