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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프로젝트] 가평 잣향기푸른숲 | 수령 80년 이상 잣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해발 450m에서 즐기는 힐링 산책
입력 : 2019.11.06 1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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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산에 오르는데, 깊이 들어가면 전화가 안 터지는 곳이 있어. 5G시대에 뭔 소린가 싶겠지만 우리나라에 산이 많다는 거 올라보지 않으면 절대 모를 일이지. 먹통인 곳에서 벗어났더니 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안테나가 만땅이 됐네. 그래서 오랜만에 통화버튼 좀 눌러봤다.”
낙향한 지 1년쯤 지났으니 나름 자연인과에 속한다며 농을 던지는 품이 예전과 전혀 달랐다. 아플 땐 목소리가 쪼그라들어 입만 웅얼거리는 것 같더니, 쩌렁쩌렁한 게 오히려 아프기 전보다 건강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리 변할 수 있느냐고 묻기도 전에 한바탕 수다가 이어졌다.
“한동안 집밖에 나서지도 못하다가 여기 내려와서 매일 산에 오르거든. 그러다보니 그냥 저절로 몸 속 독소가 빠져 나가는 거 같아. 기분만 그러려니 했는데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이제 좀 살아난 것 같다고 해서 날아갈 것 같다니까. 살면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 어떨까, 감도 못 잡았었는데, 지금 내가 정말 날고 있는 것 같다.”
“한 마디 두 마디 건네다 보면 나무가 푸른 향도 주고 기운도 주고 입이 상쾌해지는 공기도 준다. 그렇게 한 바퀴 산책하고 나면 없던 기운도 솟아나오지. 한번 내려와 봐라. 쓴 소주 한잔은 못해도 피톤치드 한 바가지는 내 줄 수 있다. 이게 소주보다 아마 백만 배는 좋을 걸.”
친구 따라 강남 가기 전에 슬쩍 경기도 가평에 자리한 잣향기푸른숲에 들렀다. 그가 그렇게 예찬하던 피톤치드 맛이 그리워…. 숲 입구에 쓰인 “숲을 만나면 건강해집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란 문구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해발 450~600m에 자리한 잣향기푸른숲은 축령산과 서리산 자락에 양발을 걸치고 섰다. 산을 찾는 이들에겐 ‘치유의 숲’으로도 알려졌는데, 여든 살이 넘은 잣나무가 군락을 형성하고 있어 그만큼 피톤치드가 풍부하다는 의미다. 숲 입구까지 자동차로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숲에 들어설 수 있는데, 입장료 1000원(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을 내고 걸음을 옮기면 바람소리, 새소리, 하다못해 냇물 졸졸 흐르는 소리까지 7.1채널 스피커가 따로 없다.
입구부터 숲 주변을 도는 코스는 콘크리트로 마감된 길과 흙길 중 선택해 걸을 수 있다. 숲 곳곳에 가을 단풍처럼 빠알간 색을 띤 담쟁이덩굴이 아름드리 잣나무를 휘감은 모습은 1년 중 지금 이 시기에만 눈에 담을 수 있는 호사 중 하나다.
숲을 걷는 코스는 유치원생을 위한 코스(1.13㎞)와 성인·실버코스(4.05㎞), 가족·연인·초등생코스(3.57㎞), 중·고등생코스(3.1㎞)가 있다. 숲 바깥쪽으로 한 바퀴 크게 돌면 웬만한 시설물과 공방, 마을이 눈에 들어오는데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두어 시간쯤 걸린다.
산의 8부 능선에 자리한 숲이다 보니 간혹 가파른 길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간간이 나무데크로 마감된 길이 있어 코스만 제대로 고른다면 유모차나 휠체어를 타고도 산책에 나설 수 있다.
코스 중 꼭 들러야 할 곳은 ‘화전민 마을’과 ‘물가두기 사방댐’이다. 우선 화전민 마을은 1960~1970년대 축령산에서 실제 사람이 살았던 마을 터에 너와집과 귀틀집, 숯가마 등을 재현해놓았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정자에 누워 살포시 눈을 감으면 가을바람 소리에 귀가 쫑긋 선다. 가족이나 연인과 잠시 앉아 쉬어가기 좋은 휴식공간이자 셀피 포인트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은 특산품을 파는 가게와 맛집들이 늘어서 있다. 가평은 잣과 콩이 유명한데, 곳곳에 가평잣과 두부요리집이 자리했다. 어느 곳을 들러도 맛은 평균 이상이다. 늦가을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이보다 좋은 코스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글·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0호 (2019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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