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기 특파원의 차이나 프리즘] 치솟는 돼지고기 가격에 비상 걸린 中, 아프리카돼지열병 탓 공급 10년래 최저
입력 : 2019.10.04 15:34:23
“돼지고기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치적 리스크로 떠올랐다.”
9월 4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으로 인해 중국 돼지고기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며 이 같이 보도했다. ‘돼지파동’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후춘화 중국 국무원 부총리가 9월 2일과 6일 각각 쓰촨성과 헤이룽장성에 위치한 돼지 농가를 황급히 방문해 돼지고기 가격 안정을 약속했다. 그는 “돼지고기 가격이 오르는 것은 공산당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고 경제 안정을 해칠 수 있다”며 “돼지 생산량 증대는 공산당의 주요 정치적 과업”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돼지고기 가격 폭등 현상은 지난 6월부터 본격적으로 감지되기 시작됐다. 중국 상무부에 따르면 6월 첫 주 ㎏당 20.69위안(약 3517원)을 기록했던 돼지고기 평균 도매가격은 그 이후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더니 8월 넷째 주(19~25일)에는 ㎏당 30위안을 돌파한 31.77위안(약 5400원)/㎏으로 치솟았다. 급등세는 계속 이어졌다. 8월 다섯째 주(8월 26일~9월 1일)에는 전주 대비 8.9% 상승한 34.59위안(약 5880원)을 기록했다. 불과 13주 만에 67.2% 급등한 것이다. 9월 들어 돼지고기 가격은 중국 당국의 수급 안정화 덕분에 폭등세는 다소 꺾였지만 여전히 ㎏당 20위안 후반에서 30위안 초중반을 유지하며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돼지고기 가격이 급등한 이유는 ASF 여파로 돼지고기 공급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중국 농업농촌부은 “작년 8월 중국 랴오닝성에서 첫 ASF 감염 사례가 적발된 이후 올해 7월까지 돼지 116만 마리가 도살됐다”며 “7월 기준 돼지 재고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32.3%가량 줄어들면서 돼지 공급량은 최근 10년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중국 경제 매체 금융계는 “9월 기준으로 광시좡족자치구, 광둥성, 푸젠성 등 지역의 돼지고기 가격이 30위안/㎏을 넘어서며 전국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신장과 윈난 지역은 ㎏당 각각 21위안, 18위안으로 돼지고기 가격이 가장 낮은 것으로 기록됐다”고 전했다. 중국의 성시(省市)마다 돈육 비축량과 가격 관리 정책이 다르다보니 돼지고기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곳에서 고기를 사다가 고가에 팔 수 있는 지역에 공급하는 개인 사업자들도 생겨날 정도였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베이징 지역에 위치한 대형 마트, 정육점, 돈육을 취급하는 주요 식당 등 10여 군데를 돌아본 결과 돼지고기 가격이 최근 1~2개월 사이 빠르게 올랐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징 지역의 한 중식당 관계자는 “7월 말 ㎏당 20위안대에서 유통되던 돼지고기가 9월 초에는 27~28위안 정도로 뛰었다”며 “이대로 장사를 하게 되면 100% 손해를 보기 때문에 메뉴판 가격을 높이는 대신 식재료로 쓰이는 돼지고기의 양을 다소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돼지고기 사재기 현상도 감지됐다. 왕징의 한 대형 마트에서 만난 주부 장하이리(32) 씨는 “돼지고기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6월 이후부터 틈만 나면 돼지고기를 계속 사다가 보관하고 있다”며 “가격이 너무 많이 오른 요즘엔 돼지고기 대신 닭고기 등을 사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세계 최대 돼지고기 생산국이자 소비국이다. 중국산업정보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중국의 돼지고기 생산량은 5469만t으로 전 세계 돼지고기 생산 비중의 약 49%를 차지했다. 같은 해 중국 내 돼지 소비량은 5624만t에 달했다. 중국인의 돼지고기 사랑은 교역 규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중국의 돼지고기 수입 규모는 160만t으로, 수출 규모인 5만t보다 무려 32배나 많았다. 문제는 돼지고기 공급을 단기간 내 늘릴 수 없어 돼지고기 가격이 당분간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일본 노무라증권은 내년 상반기 중국 돼지고기 가격이 ㎏당 45위안(약 7650원)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했다. 또 돈육 가격 급등으로 내년도 중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3%를 넘어설 수 있다고 내다봤다.
돼지고기 가격이 폭등하자 중국에서는 일종의 돼지고기 교환권인 ‘육표(肉票)’가 등장했다. 인당 하루 최대 2㎏의 돼지고기를 살 수 있도록 구매 제한을 설정했다. (사진 = 중국 금융계)
돼지고기 가격 급등으로 서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중국 당국은 고기 가격 안정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6일 중국 농업농촌부와 중국은행보험관리감독위원회(은보감회)는 ‘돼지고기 공급 안정을 위한 업무 통지’를 발표하고 돼지 농가에 대한 보조금 및 대출 지원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저장성의 경우 양돈장이 씨돼지를 들여올 경우 1마리당 500위안(약 8만5000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일부 지방정부에서는 돼지고기 구매 제한 조치에 나섰다. 난닝시는 1인당 하루 1㎏의 돼지고기만 살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샤먼시에서는 1인당 하루 구매량을 2.5㎏으로 제한했다.
올해 3월까지도 일부 농가에서는 돼지고기 가격 하락으로 수익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사료 비용마저 충당하지 못해 돼지 사육을 포기하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엔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돼지고기가 소위 ‘돈’이 된다는 인식과 함께 정부의 돼지농가 지원책에 힘입어 돼지사육에 나서는 개인이나 기업들이 빠르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농업농촌부에 따르면 9월 초 기준 씨돼지의 평균 거래 가격은 2982위안(약 50만6940원)으로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중국 경제 매체 금융계는 “현 시세에서 돼지 한 마리를 잘 키워 팔면 비용을 제하고도 1500위안(약 25만5000원)을 손에 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농가가 많다”며 “돼지고기 수요가 늘고 있어 향후 돼지의 마리당 가격이 더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베이징에 위치한 대형 마트에서 소비자들이 정육 코너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 김대기 베이징 특파원)
중국 중신증권은 돼지고기 가격 분석을 경제학 이론인 ‘거미집 이론(cobweb theory)’을 통해 설명했다. 거미집 이론은 농축산물과 같이 공급량이 시장 수요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시차(time-lag)를 두고 조절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중신증권은 “돼지를 키우려는 농가가 늘어나고 있고, 당국에서도 돼지고기 수입을 확대하고 있지만 돼지고기 가격을 빠르게 안정시킬 만큼 공급량을 단번에 늘리기는 쉽지 않다”며 “당국이 돼지고기 구매 제한 정책을 펼치면서 수요 억제를 통한 가격 안정을 꾀하려는 이유”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