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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⑧ 피아노의 풍운아 프란츠 리스트, 소년의 선율 울려 퍼지는 헝가리 소프론
입력 : 2019.09.06 10: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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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리스트는 8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9세 때 헝가리의 소프론과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에서 처음으로 공개 연주를 했다. 우리는 그를 희대의 바람둥이, 풍운아 등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음악가로 평가한다. 실제로 리스트는 75세까지 수많은 여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을 만큼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예술가와 성직자라는 특이한 삶의 이력, 젊은 시절의 적잖은 방황과 좌절,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수많은 시간을 바람처럼 떠돌아다녔다. 그는 절제할 수 없는 광기와 사랑의 상처에 괴로워하며 늙어서야 비로소 조국인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찾아 ‘마스터 클래스’를 열고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오늘날 ‘교향시의 아버지’, ‘피아노의 파가니니’로 불릴 만큼 뛰어난 음악성을 자랑한 리스트는, ‘소프론’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헝가리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소프론은 리스트가 1820년 10월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초연을 했던 곳이자 서른 살쯤 2년간 머물며 음악적 영감을 키운 작은 시골 마을이다.
건물 안에는 명화에서부터 장신구, 가구, 의복 등 스토르노의 다양한 컬렉션이 전시돼 있고, 2층으로 발길을 옮기면 리스트의 유품이 자그마한 장식장 안에서 빛나고 있다. 드디어 리스트의 영혼과 만나는 순간이다. 물론 소프론 구시가지로 들어오자마자 리스트 거리에 서 있는 그의 흉상과 첫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실질적인 만남은 그의 초상화와 공연 팸플릿 그리고 악보 등이 전시된 스토르노 저택의 2층에서 이뤄진다. 감상하는 데 채 3분도 걸리지 않는 몇 개의 전시물 앞에서 사람들은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그의 열정과 사랑에 빠진다.
소프론에서 리스트의 삶과 아주 짧게 마주했다면 본격적으로 그의 깊은 삶을 만나기 위해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로 가야 한다. 굴곡진 삶을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온 리스트.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다페스트에서 마지막 남은 예술의 혼을 불살랐다.
사실 리스트는 조국에 대한 애국 충정을 듬뿍 담아 헝가리 민속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했지만, 정작 모국어인 마자르어는 거의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9세 때부터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유학을 떠나 카를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고, 20세 이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그 결과 리스트는 조국 헝가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대관식이 부다페스트에서 열리게 됐다. 이때 리스트는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대관식 미사 음악을 의뢰받으면서 부다페스트와 인연을 맺었다.
현재 부다페스트에 있는 ‘리스트 기념관’은 1986년 9월 개관한 것으로, 그가 1881~1886년 살았던 살림집이자 후진 양성을 위해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던 음악 아카데미였다. 내부에는 피아노, 오르간, 초상화, 편지 등을 비롯해 리스트가 사용했던 악기 및 작곡 악보 등이 있어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그가 남긴 다양한 유품과 전시물 중에서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미국 보스턴의 피아노 제작자 칙커링이 리스트에게 기증한 그랜드피아노이다. 그의 손길이 묻은 피아노와 악보를 보는 순간 눈과 귀에는 그가 남긴 아름다운 선율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이처럼 리스트의 연주는 쇼팽보다 더 격렬하고 열정적이었다. 수많은 여성 팬들이 리스트를 항상 쫓아다녔고, 리스트는 팬들을 위해 거침없는 쇼맨십을 보여주었다. 물론 리스트가 피아노를 잘 치게 되기까지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 남모르는 노력이 전제되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리스트의 일화 중에서 재미있는 것이 전설과 신화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832년 21세의 리스트가 첫사랑 생크릭과 헤어진 후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고 있을 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을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회에 참석하였다. 연주회를 통해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화려한 기교와 충만한 연주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그 후 파가니니처럼 청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테크닉과 퍼포먼스를 연마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리스트가 피아노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는 친구였던 피에르 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2주 동안 내 마음과 손가락은 마치 길 잃은 영혼처럼 움직이고 있다네. 호메로스, 성서, 플라톤, 바이런, 위고,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등이 모두 내 곁에 있다네. 나는 이들을 공부하고, 이들에 대해 명상하며, 분노로 그들을 집어삼킨다네. 그뿐만 아니라 나는 하루에 4~5시간 정도를 손가락 연습에 쓰고 있다네. 만약 미치지 않는다면 자네는 내 안에서 예술가를 찾을 수 있을 걸세!”
피나는 노력 끝에 1838년,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b 단조의 마지막 론도 악장의 주제를 기반으로 <라 캄파넬라>라는 명곡을 만들었고, 현란한 손동작에서 빚어내는 선율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성공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번의 사랑을 통해 다양한 음악을 만들었고 연주를 하면서 조국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 노년에 접어든 리스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죽기 전까지 이탈리아 로마, 독일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오가면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선 연주회 등에 참석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8호 (2019년 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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