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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日 정부의 무너지는 40대 살리기
입력 : 2019.07.05 10: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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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40대를 살려내자.
일본 총리관저에서는 지난 6월 11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경제재정자문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선 <경제재정운영과 개혁의 기본방침>이란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에 담긴 내용은 6월 말 각료회의(국무회의에 해당)를 거쳐 정책에 반영될 예정이다. 시간당 최저임금 1000엔(약 1만원) 조기 달성, 여성인력 활용을 위한 방안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는 이 보고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취직빙하기세대에 대한 대응책이다. 취직빙하기란 말 그대로 취직이 쉽지 않던 시절을 뜻한다. 일본에선 통상 1993년에서 2004년까지를 뜻한다. 이 시기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현재 37~48세에 해당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현재 33~44세다. 일본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세대(1947~1949년생)의 자녀들이라 숫자도 적지 않다. 생산가능인구인 15~64세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22.4%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일본경제의 거품이 터지면서 급격한 일자리 감소가 시작됐다. 구직자 1명당 아르바이트 등을 포함해 가능한 일자리가 몇 개인지를 보여주는 구인배율(후생노동성 통계)은 1999년엔 0.87배까지 낮아졌다.
아시아통화위기 후 한국에서 나타난 것처럼 일본에선 이 시기를 전후해 대학원 진학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면서 사회생활을 아르바이트 등으로 시작한 사람이 많았다. 조금만 지나면 상황이 개선될 것을 기대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1997년엔 아시아통화위기가 닥쳤고 2000년에 들어서면서는 IT거품이 터졌다. 매년 취업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은 그대로인데 경기 상황까지 좋지 않으면서 비정규직 등을 전전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됐다. 당시 대학교와 고등학교 졸업 시점에 직장을 구하지 못한 사람이 매년 10만 명에 달했다. 가장 심각했던 2000년의 경우엔 직장을 정하지 못한 채 졸업한 사람이 12만 명에 달했다. 현재의 5배에 가까운 규모다. 한창 일을 배우고 실력을 키워야할 시기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서 이들 세대 중에는 지금까지도 비정규직으로 일하거나 아예 취업을 포기한 사람도 많다. 이 세대를 기회를 잃어버린 세대란 뜻에서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으로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 정부에서는 작년 말 기준으로 35~44세 인구 1689만 명 중 정규직은 절반을 조금 넘는 916만 명 수준으로 보고 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은 371만 명에 달한다. 이중 정규직을 희망하고 있지만 비정규직에 머물고 있는 사람만 50만 명에 달한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설명이다. 이와는 별도로 일자리를 원하지만 무직 상태인 사람도 40만 명에 달한다. 대학과 고등학교 졸업 후 지속적으로 비정규직 등 임금이 낮은 일만 하다보니 소득 역시 변변치 않고 모아놓은 자산 역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들이 40대 전후가 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이 본격화되자 ‘아라포 크라이시스(crisis)’란 말도 나왔다. 아라포는 40대 전후(around forty)를 의미한다.
일본 경제가 전후 최장기간에 걸친 호황을 겪고 있다지만 이들 세대에겐 남의 얘기다. 렌고총합연구소가 연령대별 2010년과 2015년 임금을 비교한 결과 수입이 증가한 타 연령대와 달리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에서만 각각 월 4300엔, 월 2만3300엔 감소가 나타났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면 관리직을 맡거나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업무를 해야하는 연령대인데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보니 5년 전 해당 연령대 사람들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생활이 불안하다보니 결혼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 버블 경기의 끝자락이던 1990년엔 30대 후반과 40대 초반 남성 미혼율이 각각 19.1%와 11.8% 수준이었으나 2015년엔 이 수치가 35%와 30%까지 치솟았다. 졸업 시점의 경기 상황이 인생 전체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얘기다.
고용시장이라도 유연했다면 상황이 조금은 나았을 수 있었다. 대학·고교 졸업 시점에만 채용이 진행되고 또 한 번 고용하면 평생 고용을 유지하는 일본식 고용은 졸업시점에 우연히 빙하기에 접어든 세대에겐 가혹하기만 했다.
다만 이들 세대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일본 정부도 더 이상 모르쇠로 일관하기 어렵게 됐다. 이들의 생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던 부모 세대들이 은퇴하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여기에 이들 세대의 빈곤 문제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일본학술협회의 츠지 아키코 전 연구원은 “취직빙하기세대 문제를 이대로 방치할 경우 이들이 사망할 때까지 각종 복지비용 증가가 10조4220억엔에 달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취직빙하기 세대 중 직업이 없거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 중 연금 등을 체납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됐을 때를 가정해 계산한 금액이다. 이 규모만으로도 현재 생활보호 대상자들에 지급되는 금액의 3배 규모라고 NHK는 보도했다. 가뜩이나 커진 의료 및 연금 부담을 더 키울 수 있다는 위기감에 일본 정부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는 2020년부터 향후 3년간을 집중 기간으로 정해 약 100만 명 가량을 대상으로 직업교육 및 취업알선 등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이들 세대의 정규직 인원수를 30만 명 더 늘리겠다는 목표다. 다만 20년가량 비정규직으로 일해온 사람들에게 정규직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어떻게 습득시킬 것인지부터 불확실한 상황이다. 또 이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 과연 정규직 30만 명 증가를 받아들일 체력이 있는지도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정규직화의 핵심은 소득 증가와 권한 확대지만 밀어붙이기식 추진으로는 근로시간만 정규직화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한국에서도 사상 최악이라는 청년실업률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으면서 일본과 같은 취업빙하기가 시작됐다는 얘기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지난해 말 내놓은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취직빙하기가 2009년 이후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이 연구원은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에 비해서도 실업률 증가 속도 등이 더 빠르다고 지적했다.
지금 일본 사회가 직면한 문제가 언제든 한국에도 닥칠 수 있다는 얘기다. 궁극적인 해답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지만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묘안을 찾기는 쉽지 않은 얘기다. 일자리 늘리기에선 좀처럼 실적을 내지 못하는 현 정부가 상황을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때다.
[정욱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6호 (2019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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