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연의 인문학산책 ⑤ 조선의 르네상스인 정약용

    입력 : 2019.06.07 10:3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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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은 조선의 르네상스맨이다. 그가 얼마나 걸출하게 한 시대를 살다 갔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정말 놀라운 건 정약용이라는 한 천재가 손을 대지 않은 분야가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조선시대 검무(劒舞, 칼춤)를 연구할 때도 정약용의 업적이 필요하다. 몇 년 전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 다산 시의 소재가 되었던 ‘진주검무’를 다산 유적지에서 재현한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었다. 필자는 즉시 다산이 진주검무를 보고 지었다는 시를 찾아보았다. 다산이 학자이기 이전에 뛰어난 시인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시는 유독 빼어났다. 그의 시 <검무를 추는 미인에게(舞劍篇贈美人)>의 일부분을 옮겨본다.

    계루고 북소리에 풍악이 시작되니

    넓디넓은 좌중은 가을 물처럼 고요한데

    진주성 여인 꽃 같은 그 얼굴에

    군복을 입히니 영락없는 남자로다



    보랏빛 쾌자에 푸른 전모 눌러쓰고

    좌중에게 절 한 후 발꿈치 들고서

    박자에 맞춰 사뿐사뿐 잔걸음으로

    쓸쓸히 물러가서는 반갑게 돌아오네



    사방으로 휘둘러도 칼끝 서로 닿지 않고

    치고 찌르고 뛰고 구르니 소름이 끼치는 구나

    회오리 소나기가 겨울산에 퍼붓고

    붉은 번개 푸른 서리 골짜기서 다투는 듯



    기러기 멀리 간 듯 높이 날더니

    성난 새매처럼 감돌아 내리 덮치네

    쨍그렁 칼 던지고 사뿐히 돌아서니

    호리호리한 허리 처음 모습 그대로네



    서라벌의 여악은 우리나라 으뜸이고

    황창무보라는 옛 곡조 지금까지 전하네

    백사람이 칼춤 배워 겨우 하나 성공할 뿐

    살찐 몸매 가진자는 둔해서 못한다네

    - <검무를 추는 미인에게 舞劍篇贈美人> 중

    이 시는 다산 정약용이 1780년 진주를 방문했을 때 쓴 시다. 당시 장인인 홍화보가 경상우병사로 진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를 만나기 위해 진주에 들른 것이다. 장인은 젊은 사위를 위해 진주 촉석루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때 다산은 진주검무를 처음 본다.

    시는 매우 사실적으로 검무를 묘사한다. 시를 읽고 있으면 흡사 그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에 빠질 정도다. 단순히 검무의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검무’라는 춤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시를 살펴보자.

    촉석루 넓은 무대에 앳된 여인이 남장을 하고 나선다. 그것만으로도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사람들은 다음에 펼쳐질 춤사위를 기다리고 촉석루에는 적만만이 흐른다.

    드디어 움직임이 시작된다. 전투복에 전투모를 쓴 무희는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것을 다산은 ‘쓸쓸히 물러가서는 반갑게 돌아오네’라고 묘사한다. 압권이다. 앞으로 뒤로 발걸음을 옮기는 준비동작 하나를 보고 이별과 재회를 읽어내다니.

    본격적으로 춤이 펼쳐지자 무희는 ‘칼을 든 선녀’가 된다. 손가락 사이에서는 뜬구름이 흘러가고 바닥에 연꽃이 깔린 듯 아름답기만 하다.

    다음은 칼을 휘두르는 춤사위에 대한 설명이다.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푸른 뱀이 온몸을 휘감는 듯하고 양손에 칼을 휘저으니 운무만 가득하다는 표현은 다산이 얼마나 검무에 몰입했었는지를 보여준다.

    아무리 휘둘러도 두 칼의 날은 서로 부딪히지 않고, 때로는 기러기처럼 때로는 매처럼 인간의 몸에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곡선을 보면서 다산은 ‘백사람이 칼춤 배워 겨우 하나 성공할 뿐’이라고 탄식한다.

    시 속에는 진주검무가 서라벌에서 시작되어 ‘황창무보’라는 기록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언급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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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가이자 사상가였으며, 시인이자 다독가였던 다산이 조선의 지성사에 드리운 그늘은 매우 크고 넓다. 조선의 지성사는 ‘다산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야 할 정도다.

    다산의 지적 업적은 사실 아픔의 산물이었다. 정약용은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3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까지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그 기나긴 고독과 회한의 시간 동안 그를 지켜준 것은 학문과 창작이었다. 그는 읽고 쓰는 것으로 한 세월을 이겨냈고, 대학자가 됐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두 아들 학연과 학우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눈길 끄는 대목들을 옮겨본다.



    “폐족(廢族)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겠느냐.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글을 읽는 다면 성인이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못 되겠느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세상을 구했던 책들을 즐겨 읽어라.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져야 참다운 독서를 할 수 있다. (중략) 나보고 너무 실현성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하지 말거라.”



    다산 정약용은 출중한 실력과 인격을 겸비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우했다. 1762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난 다산은 10세 때 이미 자신이 쓴 한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이라는 책을 냈을 정도로 천재적이었다. 1783년 문과 회시에 합격하고 1785년 성균관에 입학한 다산은 정조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가 성균관에 “중용강의 80조에 답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정약용의 답변을 읽어본 정조가 “정모(丁某)의 경지가 대단하다. 훗날 반드시 명성을 떨칠 것”이라며 극찬을 한 것이다.

    벼슬길에 들어선 그는 서학(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정치 인생은 가시밭길을 걷는다. 당시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심했는데 서인들은 끊임없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다산을 모함했다.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정조가 번번이 그를 보호했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면서 다산의 고난은 시작됐다.

    1801년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에서 촉발된 신유박해 때 그는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18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다산의 유배생활은 개인적으로는 큰 불행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대학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그의 저서 500여 권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쓰였거나 초안이 마련된 것들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였으며, 시인이었다. 그는 어떤 정치적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학문과 창작에 전념했다. 다산은 후학 정수칠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한 상자의 책도 남기지 못한다면 삶은 없는 것과 같다. 그런 것을 삶이라고 말한다면 짐승과 다를바 없다. 세상에서 가장 경박한 사람이란,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일을 한가한 일이라 말하고,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고담(古談)’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맹자는 대체(大體)를 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된다고 했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전문기자·시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5호 (2019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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