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커피 프랜차이즈 ‘블루보틀’이 지난 5월 3일 성수점을 개점하며 국내에 공식 진출했다. 블루보틀 성수점은 개점 당일 대기 시간이 4시간 이상 소요될 만큼 손님들로 북적였다. 현재도 평균대기 고객이 100여 명, 그야말로 문전성시다. 이곳엔 커피전문점 하면 떠오르는 와이파이도 충전을 위한 콘센트도 없다. 몇 시간을 기다려 주문했다고 바로 커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바리스타가 주문 받은 커피 원두를 저울에 달아 무게를 측정하고 핸드드립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는 이른바 슬로 커피다. 그러니까 한국에선 일상어가 된 ‘빨리 빨리’는 그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개점 첫날 1000여 잔이 넘는 커피가 팔렸다. 과연 왜, 굳이 이곳을 찾아 커피를 주문하는 걸까.
Check : 오픈 열흘 후, 주문하는 데 ‘겨우’ 한 시간 반 남짓…5월 13일 오전 11시 12분
블루보틀 성수점을 찾았다. 그런데 잠깐, 블루보틀이 왜 이곳에 국내 1호점을 냈을까. 성수동이 궁금해 살펴보니 이곳, 요즘 뜨는 핫한 동네 중 하나다. 과거엔 수제화거리로 유명세를 탔고 최근엔 ‘쏘카’나 ‘스켈터랩스’ 등 IT기업부터 ‘패스트파이브’ ‘헤이그라운드’ 등 공유오피스가 둥지를 틀며 새로운 스타트업밸리로 불리고 있다. 일하러 오는 20~30대 직장인이 늘어나니 낡은 공장이나 건물을 개조한 세련된 카페나 유명 맛집이 간판을 올렸다. 교통도 사통팔달이다. 2호선 성수역, 뚝섬역, 분당선 서울숲역 등 3개 역이 인접해 있어 출퇴근이 편리하다. 블루보틀도 이 점에 주목했다. 블루보틀 관계자에게 물으니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한 달간 직접 발품 팔아 탐방한 후 고른 최적의 장소”라며 “도심 속 휴식 공간인 서울숲이 배후에 있는 것도 장점 중 하나”란다.
어쨌거나 뚝섬역 1번 출구로 내려서니 정면 건물에 파란색 병 모양의 작은 간판이 선명하다. 앗, 생각보다 짧은 대기줄. 로또라도 사야하는 날인가.
오전 11시 25분
홀로 줄 선 이가 거의 없다. 대부분이 20~30대인데 여성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간혹 혼자 멀뚱한 이는 십중팔구 포장 손님이다. 줄 선 이들 중엔 휴대폰이나 카메라로 동영상을 촬영하는 인플루언서들도 여럿이다. 네다섯 명 앞에 자리한 커플이 속삭이듯 SNS를 통해 중계방송에 나섰다. 슬쩍 들어보니 개점 당일 이곳을 찾은 유명 인플루언서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보고 당연히 찾아야 할 성지로 점찍었단다. 블루보틀 1층은 보기에도 시원한 통창으로 마감돼 있다. 안쪽을 확인해보니 1층과 지하가 뻥 뚫린 형태인데, 아뿔싸… 밖에 늘어선 줄이 다가 아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앞선 이들이 한참이다.
오전 11시 32분
카페 정문까지 이제 불과 3m 남았다. 들어가려고 줄선 이들은 한 트럭인데, 나가는 이는 드물다. 정문 쪽으로 좀 더 걸음을 옮기니 문 앞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A4 용지에 손글씨로 쓴 ‘블루보틀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요약해보면 ‘음료 주문은 처음 1회만 가능’하고 ‘늦게 오는 분들은 줄에 합류할 수 없고’ ‘줄에서 이탈할 땐 직원에게 꼭 말해야 하며’ ‘주차는 불가’ ‘카페 원두 잠시 품절’이란다. 갑자기 정체된 줄, 움직임이 전혀 없다.
오전 11시 50분
드디어 정문 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다시 줄의 연속이다. 계단 앞까지 3번이나 구부러져 있는, 마치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가 떠올랐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만 눈에 띌 뿐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는 보이지 않는다. 유모차나 휠체어는 도대체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 건지 궁금해 다시 아까 그 관계자에게 물었다.
“유모차를 갖고 오시거나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대기줄 옆에 서있는 직원에게 얘기하면 직접 아래층으로 들어다 드립니다. 줄을 설 필요 없이 바로 카페 이용이 가능하세요.”
아르바이트 없이 20명의 바리스타가 근무한다는 성수점, 이쯤 되면 바리스타도 만능일꾼이다.
오전 11시 59분
조금만 더 전진하면 계단에 진입한다. 1층에서 내려다보니 바에서 드립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들이 분주하다. 호두나무로 만들었다는 테이블과 의자에서 커피와 쿠키를 즐기는 이들도 보이고, 회색이 기본인 오픈 콘크리트와 유리천장,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이 어우러져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별달리 꾸민 게 없는데도 멋스러운 건 있어야 할 것만 갖춰놓은 미니멀한 인테리어 덕분이다. 계단 앞에서 검은 바지에 청색 셔츠를 입은 직원이 줄을 통제하며 손님들과 수다(?)를 나누고 있다. 아, 이런 게 소통인가.
오후 12시 13분
아직 카운터까지는 멀었지만 계단 진입에 성공했다. 이게 도대체 뭐라고… 기쁘다. 그런데 아차, 줄 서는 데 필수품인 스마트폰 배터리를 빠뜨리고 왔다. 줄서는 내내 휴대폰을 켜놨더니 배터리 잔량이 50%밖에 남지 않았다. 이 카페에는 와이파이도 없지만 콘센트도 없다던데. 옆에 서 있는 직원에게 물으니 현답이 돌아왔다. “커피 드실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오후 12시 26분
드디어 카운터에서 주문하는 순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게 어떤 커피냐고. 쓰리 아프리카스 블렌드를 권한다. 여기에 곁들일 레몬 쿠키도 하나 더했다. 커피 한 잔에 5200원, 쿠키 3200원을 결제하고 손님 여럿이 앉아있는 긴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고보니 그 흔한 카드 혜택이나 포인트도 없다. 여타 커피 전문점에서 듣던 내용이 생략되니 살짝 아쉽다.
오후 12시 35분
그렇게 기다리길 10여 분. 바리스타가 내 이름을 부른다. 드디어 커피가 나왔다. 줄서기 시작한 게 11시 12분이니 정확히 1시간 23분 걸렸다. 톡 쏘는 산미와 고소한 뒷맛이 독특하다. 여타 프랜차이즈의 커피보다 깊고 진하다. 커피가 담긴 투명한 잔도 분위기에 어울린다. 휴대폰을 뒤로 하고 오로지 커피에 집중하다보니 이게 커피 맛인가 싶다.
불과 20분도 안 돼 잔이 비워졌다. 비워진 컵과 접시는 테이블에 그대로 놔두면 바리스타가 알아서 치운단다. 시선을 위로 향하니 줄이 오전보다 길어졌다.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 과연 이곳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최근 국내 커피 산업이 주목하고 있는 4개의 키워드(D.E.E.P)가 떠올랐다.
원두에 집중하는 국내 커피 업계, 블루보틀 영향?
스페셜티 커피 블루보틀이 국내에 진출하자 국내 커피 업계에 고급화 바람이 불고 있다. 우선 업계 1위인 스타벅스는 싱글 오리진 스페셜티 커피(최고급 생두로 만든 커피) ‘리저브’의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하는 ‘리저브바’를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2016년 5개점이던 리저브바는 이듬해 15개점, 지난해 44개점, 올 1월에는 46개점으로 수를 늘리고 있다. 업계 2위인 투썸플레이스는 신논현역점에서 에스프레소, 라떼, 콜드브루, 크림모카치노, 커피샘플러 등 스페셜티 커피를 판매하고 있다. 서울 한남동에도 에스프레소 특화 매장 ‘TSP737’을 내고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한 커피 큐레이션(Curation, 맞춤형 추천 서비스)을 진행 중이다. 할리스커피는 2016년 스페셜티 커피전문점 ‘할리스커피클럽’ 3개점을 열었고, 지난 2월까지 10개점으로 수를 늘렸다.
Design :미니멀리즘에 대한 블루보틀의 공간철학
블루보틀 성수점의 점장 역할을 하는 카페 리더 김민혜 씨는 말한다. “바리스타가 손님에게 좋은 경험, 그러니까 맛있는 커피를 제공해야 하는 게 첫 번째 임무”라고. 빨간 벽돌로 외벽을 마무리한 블루보틀 성수점은 일본 스케마타 아키텍트(Schemata Architects)에 소속된 조 나가사카가 설계했다. 자연광을 바탕으로 미니멀리즘에 대한 블루보틀의 공간 철학을 반영했다. 블루보틀이 일본에 진출하며 미니멀리즘과 결합해 오늘날의 디자인을 완성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손님을 위해 마련된 공간
김민혜 씨가 말한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기 위한 공간은 그야말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주문을 받는 공간과 커피를 내리는 공간, 마시는 공간이 전부다. 브라이언 미한 블로보틀 CEO의 말마따나 “가장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는 게 목표”일 뿐이다. 단 성수점은 별도로 바리스타를 교육하는 공간과 로스터리 시설을 갖추고 있다.
매장뿐 아니라 온라인 사이트와 굿즈 등에도 브랜드의 미니멀한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고객이 직접 블루보틀의 스페셜티 커피를 만들 수 있게 다양한 용품을 판매하고 있고,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을 곁들인 영상을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
Essence :좋은 원두로 정성스럽게 내리는 커피
미국 3대 스페셜티 커피(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100점 중 80점 이상을 받은 프리미엄 커피) 중 하나로 꼽히는 블루보틀은 프리랜서 클라리넷 연주자이자 커피광이었던 제임스 프리먼이 200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작은 창고에서 직접 원두를 볶으면서 시작됐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즐기고 싶었던 그는 한 번에 6파운드(약 3㎏)만 로스팅(원두를 볶는 것)해 최상의 커피 한 잔을 만들었다. 1600년대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에서 이름을 딴 블루보틀의 커피는 기다리는 커피다. 성수점에 대기줄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미국에선 블루보틀 매장 앞에 대기줄이 생겼다. 주문과 함께 커피머신에서 한 잔 뚝딱 나오는 커피와 달리 블루보틀의 커피는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진다. 제임스 프리드먼은 커피 맛의 본질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가운데 바에서 주문과 커피 드립이 진행된다
“로스팅한 지 48시간 이내의 원두를 사용한 커피만 판매해 고객들이 최고의 커피를 즐길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곳에서 제공받은 최상의 원두만 사용할 겁니다.”
Eco-essential : 최고급 오가닉에 집중
블루보틀의 창립자인 제임스 프리먼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간단한 원칙을 세웠다. ‘커피 풍미의 정점을 즐길 수 있게 로스팅된 지 48시간 이내의 원두만 판매할 것’. 그리고 ‘최고급 오가닝과 무살충제, 그늘에서 기른 친환경 원두만 사용할 것’ 등이다. 그는 이런 원칙에 따라 블루보틀을 운영했고 전세계로 바이어를 보내 독특한 커피를 찾게 했다. 2017년 네슬레가 블루보틀의 지분 68%를 인수할 때 지불한 금액은 약 5억달러였다. 당시 매장 수가 50개에 불과했던 블루보틀의 가치는 7억달러 이상으로 평가됐다. 업계에선 네슬레가 거액을 투자한 이유로 최고급 오가닉이 중심이 된 스페셜티 커피 제품군을 확보해 포트폴리오를 보완, 밀레니얼 세대 공략에 나설 것으로 분석한다. 밀레니얼 세대에게 어필하는 하이엔드 제품군을 인수해 그 후광효과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블루보틀의 메뉴
Personalizing : 고객의 취향을 파악해 최고의 맛을 제공하는 서비스
블루보틀 성수점을 비롯해 2호점인 삼청점과 연내 오픈이 예정된 2개점까지 4개점의 카페를 총괄하는 라이언 서 씨는 블루보틀 본사에서 근무하다 한 달 반 전 한국에 왔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블루보틀의 장점으로 ‘Hospitality(환대)’를 꼽았다.
“블루보틀은 늘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건 손님이 될 수도 있고 직원이 될 수도 있어요. 직원들 입장에선 호스피탈리티가 중요한 덕목이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내릴 수 있는 기술이 있다 해도 고객의 취향에 맞출 수 없으면 맛없는 커피일 뿐입니다. 그만큼 손님과의 소통이 중요하죠. 결국은 사람이 중요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커피 맛이 결정됩니다.”
내부 로스터리
블루보틀 매장은 기본적으로 노와이파이(No WiFi), 노컴퓨터(No PC) 정책을 고수한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온전히 커피 맛을 즐기라는 의도와 함께 바리스타와의 대화를 유도하기 위한 장치다. 실제로 주문 후 커피를 내리는 바 앞에 서면 바리스타가 어떤 맛을 즐기는지, 왜 좋아하게 됐는지 등 시시콜콜한 대화를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카운터와 바의 높이가 낮고 바리스타가 직접 고객과 대면하며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동안 커피의 맛과 제조방법에 대해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