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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프로젝트] 백두산 천지 닮은 가평 호명호수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호수인가
입력 : 2019.05.13 13: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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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 홍보실에 근무하는 윤 차장은 올 봄 제대로 속앓이를 했다. 그의 말을 빌면 사회생활 십 수 년 만에 직장인 3년차 증후군이 나타나더니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겹쳐 시도 때도 없이 별의별 망상에 치를 떨었다. 도대체 왜 출근하고 퇴근하는지 치졸한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헤매는데도 주변에선 누구 하나 눈치 채는 이가 없었다.
“내 얘길 내 입으로 하는 게 익숙지도 않고…. 집사람이요? 아이고, 한국 남자가 이렇구나 싶었어요. 입 밖으로 힘들단 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주말에 혼자 산에 올라 중얼대면서 풀었습니다. 걷다보면 왜 혼자 말하고 노래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왜 저러나 싶었는데 내가 그러고 있더라구요. 중얼대다 보면 속에 응어리가 살살 풀리는 것도 같고,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기도 하고. 덕분에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입사할 때 입에 달고 살았던 ‘행복하자’란 말도 다시 하게 됐고, 아마 그게 제 초심이었을 거예요. 혼잣말 하는 분들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그 분들… 어쩌면 생각보다 큰 산을 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기도 가평 호명산에 자리한 호명호수는 산꼭대기에 덩그러니 자리했다. 한국 최초의 양수발전소로 발전소 상부에 물을 저장하기 위해 호명산(632m) 자락에 조성한 인공호수다. 해발 535m에 면적만 15만㎡, 담고 있는 물의 양은 267만여 톤이나 된다. 호숫가를 한 바퀴 돌다보면 저 아래 가평 풍경이 그림 같다. 그래서인지 가평 8경(景) 중 두 번째 풍경으로 손꼽힌다. 산에 오르다 이런 호수가 눈에 들어오면 그야말로 힐링이고 웰빙이다. 잠시 쉬었다 오르기도 좋고 아예 호수를 목적지 삼아 나들이 나서기도 그만이다.
서울 도심에서 출발해 한 시간… 거짓말처럼 시야가 트였다. 평일 오전인데도 서울을 벗어나는 데만 족히 1시간 이상이 걸렸다. 그럼 그렇지, 초심 찾아 떠난 길이 쉬울 리 있을라고….
오랜만에 푸른색을 드러낸 하늘이 그야말로 맑다. 내비게이션에 호명호수를 찍고 도착한 곳은 호수 입구의 주차장. 여기서 첫 번째 갈등이 시작된다. ‘일반 차량 통제’가 큼직하게 쓰인 입간판 옆에 ‘호수까지 걸어서 1시간’이란 표시가 선명하다. 걸어서 호수까지 오르는 길은 차가 다니는 포장도로다. 청평양수발전소와 인근 군부대 관련 차량들이 통행하는 구간인데, 가파르지만 잘 닦인 이 길로 노선버스도 다닌다. 그러니까 갈등의 시작은 걸어서 갈 것인가 아니면 노선버스를 탈 것인가로 요약된다. 주차장 앞에 마련된 버스정류장엔 평일인데도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 10여 명이 모여 앉아 있다. 3월 9일부터 노선버스의 운행이 재개됐다는데, 한겨울엔 길이 얼어 운행이 중지됐다가 3월부터 11월까지 운행이 재개되는 식이다.
“걸어 올라가는 게 보기보다 쉽지 않아요. 길이 가파르니 타고 가는 게 나을 거야.”
주차장 주변 식당 주인의 한마디에 얼른 버스에 올랐다.(버스 시간은 주중과 주말이 다르다. 30~40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시작부터 경사가 급하다. 조금 갔나 싶으면 다시 구불길의 연속이다. 아이고, 이 정도면 겨울엔 걸어서도 오르기 쉽지 않은 길이다.
10여분 쯤 지났을까, 버스 앞창에 장애물이 사라지더니 슬쩍 수평선이 드러났다. 해발 500여m를 오르는 노선버스라니. 교통카드를 체크하고 내려서니 타원형의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1980년 4월에 준공된 국내 최초의 양수발전소인 청평양수발전소는 바로 이 호명호수가 상부저수지이고 산 아래 청평호가 하부저수지다. 전력사용이 적은 심야시간에 청평호의 물을 호명호수로 양수(PumPing)해 저장했다가 전략사용이 많은 시간대나 전력수급 비상시에 이 물을 이용해 발전하는 방식이다. 2008년에 한국수력원자력과 가평군이 협약을 맺고 상부저수지를 개방해 ‘호명호수공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호수 주변 둘레길은 1.7㎞나 된다. 한 바퀴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금방 돌 수 있는 길이지만 주변에 조성해놓은 전망대나 팔각정, 기원탑, 철쭉동산을 돌아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버스정류장 옆 안내소에 문화관광해설사도 관람객을 기다린다. 바로 옆에 자리한 간이매점에선 주전부리와 함께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다. 친환경전기차도 운영 중인데, 놀이동산 관람차처럼 타고 호수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1980년에 지어진 시설이니 군데군데 낡고 녹슨 곳도 눈에 띄지만 위령탑이나 기원탑 등 근 40여 년 전 역사를 발견하는 것도 재미 중 하나다. ‘資源開發의 새 紀元’이란 한자가 선명한 기원탑 아래 사각형의 비석에선 서정주의 시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휘호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옆 언덕의 팔각정으로 지어진 홍보관은 꼭 빼놓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인데, (원자력 때문은 아니고) 2층에 오르면 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풍광 때문이다. 호수 쪽으로 돌아서면 한눈에 호수를 담을 수 있고 뒤쪽을 살펴보면 저 멀리 산 아래 가평의 전경이 펼쳐진다.
팔각정에서 나와 산길로 들어서면 호수 주변을 빙 두른 산을 탈 수 있고, 다시 호수둘레길로 내려오면 나무데크와 갈대숲, 철쭉 등으로 잘 가꿔놓은 공원에 닿는다. 데크 곳곳에는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벤치가 마련돼 있는데, 돗자리를 펴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런데 잠깐, 이곳이 왜 호명호수라 불리는 걸까. 옛날 한 스님이 길을 가다 바라보니 눈앞에 수려한 산이 나타났다. 계곡에서 잠시 쉬어 가려는데 강아지 수놈이 꼬리를 흔들며 옆에 앉았다. 스님은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 근처 양지 바른 곳에 절터를 잡아 움막을 짓고 강아지와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강아지가 호랑이처럼 자랐다. 이 호랑이가 뒷산 바위에 올라 울어대면 절 근처에 살던 암호랑이가 같이 울면서 산 정상 동굴에서 사랑을 나눴다. 이후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면 마을 사람들이 이 동굴로 피신해 화를 면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 산을 ‘호랑이가 우는 산’이라 하여 호명산(虎鳴山)이라 불렀다. 그리고 호랑이가 올라가 포효하던 바위를 ‘아갈바위’라 부르고 있다. 동네사람들이 몸을 피하던 동굴은 양수발전소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호수가 만들어지면서 형태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설로만 전해지고 있다.
-개방기간
해빙 시~결빙 시까지 (통상 3~11월)
개방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입장방법
도보 및 노선버스 이용, 개인차량과 오토바이,
자전거 등 호수 진입 불가
버스운행요금 : 1300원(편도, 교통카드 가능)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4호 (2019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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