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동진의 명화극장] 영화 <가버나움> 초토화된 베이루트 아이들의 참혹한 일상

    입력 : 2019.03.12 15:20:55

  • 영화 <가버나움>을 보고 경악하게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레바논 베이루트 빈민가의 극악한 삶의 모습 때문만이 아니다. 이건 애초에 영화로 만들 수 없는 얘기다. 영화를 중반쯤 보다 보면 영화 속 아이들이 저 공간에 실재(實在)하는 애들인지 아니면 다른 영화들처럼 캐스팅한 아역 배우인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전자(前者)라면 저건 연기가 아닐 터인데 왜 연기처럼 보이게 찍었을까 싶은데다 그게 가능했을까 하는 것이고, 후자(後者)라면 세상에 저렇게 실감나는 아역 연기는 처음 보는 셈인데 어디서 저런 연기자를 데려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영화는 베이루트에서 거리의 삶을 살아가는 실제 시리아 난민계 아이들을 캐스팅해서 그들의 실제 삶을 기록하듯이 드라마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독은 일정한 설정만 주고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그저 따라 붙게만 했을 터이고 그럼에도 줄곧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다시 표현해 보라는 주문을 했을 것이다. 이건 보통의 ‘정치적 설득’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상대는 어린 아이들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 <가버나움>은 기술적인 면으로 볼 때 촬영하고 제작한다는 걸 아예 생각하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얘기다. 처음엔 다큐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감독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극영화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영화 속 공간과 인물이 너무나 참혹하고 비극적이어서 혹시 허구가 아닐까, 차라리 가짜였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자아내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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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참혹하고 비극적인

    베이루트 빈민가에 살고 있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형제자매가 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많고(일곱 혹은 여덟 명) 지독히도 가난한 집안의 큰 아들이다. 아버지는 일없이 집에서 빈둥대고 엄마도 마찬가지인데, 그 와중에 이들은 자꾸 아이를 갖는다. 이 집안의 소득은 기껏해야 열두 살이 된 자인이 그의 여동생 사하르(하이타 세드라 이잠)와 함께 과일 주스를 만들어 노점에서 팔아 버는 돈이다. 거리 장사를 할 때 두 남매는 갓 걸음을 뗀 어린 동생 한둘을 데리고 다닌다. 그 아이들의 발목에는 쇠사슬이나 끈을 묶어 놓을 때가 많은데, 잘못 도로에 기어 나갔다가 차에 치일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아이들의 몸과 얼굴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남루하기 그지없다. 자인은 자신의 집이 가축 우리 만도 못하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아이들, 가난으로 자존감이 무너지는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은 일찍 큰다. 성정(性情)이 빠르다. 세상 이치를 빨리 체득한다. 눈치가 빨라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영악함을 배운다. 자인이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것,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담배를 피우고 슬쩍 도둑질을 하는 것은 비도덕이나 범죄의 문제가 아니다. 자인에게는 생존을 위한 약간의 유희(遊戱) 정도에 불과한 일이다. 그런 자인은 갓 열한 살이 된 누이동생의 초경(初經)을 금방 알아차린다. 누이를 공중화장실에 데려가 팬티를 씻기고 자신의 웃옷을 말아 임시 생리대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건 자인이 세상을 일찍부터 알아챘기 때문이다. 남부끄러운 얘기가 아니다. 반대로 눈물 나는 얘기다. 실제로 사하르는 창피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 누이를 오빠는 어른 ‘짐승’들에게서 보호하려 애쓴다.

    이렇게 문제는 여동생 사하르의 생리부터 시작된다. 주변에는 이 예쁜 동정(童貞)의 아이에게 눈독을 들여 온 잡화점 청년이 있고, 부모는 ‘입이라도 하나 줄여 보고자’(우리에게도 戰後에 이런 시절이 있었다. 가난한 나라에는 어디든 있는 얘기다.) 열한 살밖에 안 된 여자 아이를 팔다시피 시집 보낸다. 자인은 이에 격렬하게 저항을 하다 집을 나가고 새로운, 더욱 가혹한 시련이 시작된다. 자인은 불법체류자인 싱글맘 라힐(요르다노스 쉬페라우)의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되지만 라힐이 체포되자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은 남자 아이 요나스를 혼자 키우며 점점 더 나락의 길에 빠져 들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심장이 떨리고, 손발이 떨리고, 온몸이 떨리게 되는 장면들은 대개 이 요나스라는 아이를 어린 자인이 품에 안고, 리어카 같은 것을 만들어 끌고 다니며 거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에서 나온다. 놀라운 것은 자인은 모두에게서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자인의 독백에서도 나오지만, 신(神)조차도 이 어린 존재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갓난 아이 요나스를 버리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를 못한다. 결국 아이를 인신매매하는 사내에게 속아서 넘기긴 하지만 아이를 버리려 했던 것이 아니다. 어린 자인만큼 낮은 데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자기가 가장 낮은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인만큼 낮은 데로 스스로 임하려는 자도 없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 자인은 아이를 길거리에 둔 채 도망치려 한 적도 있다. 아이가 졸졸 따라 오면 화를 내는 척 돌려보내지만 못내 다시 돌아오기를 몇 번, 아이 발목을 묶어서 따라 오지 못하게 하려다가도 결국 다시 아이를 품에 안는 모습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가슴에 통증이 일어서 볼 수 없을 지경이 된다. 결코 짜여진 신파가 아니다. 지금 세상 한 구석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점을 나딘 라바키 감독은 간단한 드라마 설정으로, 결단코 간단치 않은 마음의 파장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왜 자인은 법정에 서게 되는가. 그건 여동생을 죽인 잡화점 청년에게 칼을 휘둘러 불구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자신을 이런 지경으로까지 살게 한 부모를 ‘낳은 죄’란 명목으로 고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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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상

    비극적인 이야기를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얘기하는 것도 역설이다. 이 영화는 기이하게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역동적이다. 이야기를 의식하지 못하게 한 채, 2시간을 객석에 꽉 붙들어 놓는다. 영화가 순전히 영화의 힘만으로 세상의 진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면 지금껏 이 <가버나움>만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것이다. 베이루트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목도하는 건 참담하다. 한때 중동의 파리였던 이곳은 이스라엘에 대한 시리아의 실질적인 대리전(1975~1990년)에서 기독 민병대와 이슬람 무장단체 헤즈볼라 간의 끝없는 전쟁, 그리고 시리아 내전의 여파로 번진 레바논 재(在)내전의 상황으로 전 지역이 초토화 돼 있는 상황이다. 이곳에서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하물며 아이들의 삶은 어떠할까. 영화를 보고 있으면 기독교가 무엇이고 회교가 무엇이며, 시아파가 무엇이며 수니파가 무엇인지, 무엇보다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얼마나 흉포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분노의 광풍이 불어온다. 아이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 위정자들, 권력자들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들이다. 그뿐이겠는가. 그 모든 세상의 무질서와 혼란에 눈을 감고 등을 돌리고 있는 신에게 욕지거리가 나온다. 과연 신, 당신은 제대로 하는 일이 있는가. 도대체 일이라는 걸 하는 작자인가, 하는 질문을 퍼붓고 싶어진다.

    사하르가 팔려가기 전, 부모가 아이에게 화장을 해놓은 모습을 보고 자인은 불같이 화를 낸다. 동생의 입술을 짓뭉개며 무슨 꼬락서니냐고 대거리를 한다. 그렇게 화를 내는 오빠를 열 살짜리 소녀는 말 없이, 처연하게 바라본다. 아이는 또 다른 아이에 불과한 오빠가 자기에게 왜 화를 내는지 안다. 자기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님을 알고, 그걸 자기가 알고 있다는 걸 오빠가 알고 있다는 걸 안다. 그 슬픈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가버나움>은 건강한 죄책감을 준다. 삶이란 끝없는 지성의 비관주의를 유지하되 의지의 낙관주의로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다시 한 번 설파한다. 그럼으로 <가버나움>은 아카데미나 국제영화상 수상 따위가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인간은 그 누구든, 존중 받는 삶을 살아가야 할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하는 이런 영화는 이러 쿵 저러 쿵 하는 상찬(賞讚)으로 치장될 필요가 없다. 다들 조용히 자성(自省)의 공유(共有)와 그 연대(連帶)를 넓힐 일이다. 다행히 이 영화의 국내 관객이 1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정치적 올바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실로 반가운 일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2호 (2019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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