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용승 특파원의 월스트리트 인사이트] 201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로머 뉴욕대 교수 “소득주도성장, 신규 인력 채용 막아 현장의 지식 축적 어렵게 만들 수도”

    입력 : 2019.02.13 10:37:07

  • “커피 하시겠습니까.”

    지난 1월 10일 201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로머 미국 뉴욕대 교수(63)와 신년 단독 인터뷰를 위해 뉴욕대 로비에서 기다리던 중 약속 시간에 맞춰 나타난 로머 교수가 기자에게 건넨 첫마디다. 인터뷰 장소로 자리를 옮기기 전에 날씨도 추우니 따뜻한 커피를 뽑아가자는 얘기였다. 세계적인 석학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커피 심부름을 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셀프 서비스’를 자처했다. 그래서 로머 교수와 기자는 만나자마자 인근에 있는 스타벅스로 함께 이동하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동 중에 로머 교수는 사전에 보낸 질문지를 잘 읽어봤다며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선 답변하기 어렵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 질문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대한 내용이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올해 주요 리스크 중 하나로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을 꼽고 있다. 가뜩이나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 둔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연준이 계속해서 금리를 올린다면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연준의 올해 통화정책 방향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로머 교수는 “아무리 경제학자라고 하더라도 최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준 멤버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데 ‘이렇다 저렇다’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답변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서 최고 경지에 오른 이코노미스트이지만 중앙은행 독립성을 위해서 말을 아끼겠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며 “연준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거듭된 정치적인 압박이 세계경제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는 만큼 중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폴 로머 뉴욕대 교수(오른쪽)가 지난 10일(현지시간) 뉴욕대에서 장용승 매일경제 뉴욕특파원과 인터뷰를 마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폴 로머 뉴욕대 교수(오른쪽)가 지난 10일(현지시간) 뉴욕대에서 장용승 매일경제 뉴욕특파원과 인터뷰를 마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이 정도 얘기가 흘렀을 때 주문한 커피가 나와 다시 각각 커피를 들고 뉴욕대 인터뷰 장소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갔다. 자리에 앉으면서 다시 시작된 대화의 첫 소재는 결혼 얘기였다.

    로머 교수는 지난해 12월 10일 재혼했다. 드라마틱한 것은 그 날이 노벨 경제학상 수여식이었다는 점이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수여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는 교회에서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로머 교수는 결혼식 복장 그대로 노벨 경제학상 수여식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인생에서 잊지 못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을 하루에 모두 끝낸 셈이다.

    로머 교수는 결혼을 축하한다는 기자에게 “사실 그날 결혼식 계획은 아무도 몰랐다”며 “모든 사람들이 결혼식 발표에 매우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부인인 프랑스 문학학자인 캐롤라인 웨버(49)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나타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이 발표된 직후인 지난해 10월 8일 뉴욕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개인적으로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여자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다”고 밝힌 바 있다. 기자가 당시 기자회견 내용을 상기시키자 로머 교수는 “그렇다. 그 여자 친구가 현재 내 부인”이라며 “최근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고 환하게 웃었다. 아이스브레이킹(icebreaking)이 끝나면서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갔다.

    폴 로머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
    폴 로머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
    ▶기술 진보와 아이디어 축적이 장기 성장 이끌어

    로머 교수는 기술 진보와 아이디어 축적이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이끈다는 ‘내생적 성장(Endogenous Growth)’ 이론의 선구자로 대표적인 경제 성장 이론가로 꼽힌다. 그래서 경제 성장 쪽에 질문을 집중했다. 2%대 저성장 굴레에 빠진 한국경제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이에 대해 로머 교수는 혁신을 위해 ‘현장지식’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강조했다.

    ‘현장지식 축적→새로운 아이디어 발상→새로운 비즈니스 창출’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직장에서 얻는 현장지식이 핵심 경쟁력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기술 진화 속도가 매우 빠르지만 대학 교육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로머 교수는 “4차 산업 혁명시대에는 현장지식에 기반한 새로운 비즈니스가 활발히 창출돼야 한다”며 “이러한 차원에서 ‘직장이 학교(Work is school)’라는 개념이 강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추진 중인 소득주도 성장에 대해 의견을 물으니 로머 교수는 ‘위험한(risky) 모델’이라며 “인건비 상승 문제로 일자리 창출의 주체인 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4차 산업 혁명시대에 필요한 혁신을 위해선 직장에서 얻어지는 현장지식이 가장 중요한데 소득주도 성장 정책은 기업들의 신규 인력 채용을 가로막아 현장지식이 축적되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로머 교수의 이날 답변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전 질문을 보냈고, 이에 대해 로머 교수는 미리 준비해온 답변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그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선 한국이 (선진국을 따라가는) ‘캐치업(Catch-Up)’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라며 “직장 내에서 습득되는 현장지식을 쌓을 수 있는 경험이 제한된다면 그만큼 한국이 ‘선도(Frontier) 국가군’에 안착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연한 노동시장에 관련해 노조 등 기득권층 반발에 대해 로머 교수는 “생산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다른 자원을 빼앗아 임금을 보전해주는 것밖에 안 돼 국가의 전체 부(富)를 키울 수 없다”며 “어느 특정 집단이 아닌 국가 전체적으로 부(富)를 키운다는 비전으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실업률이 높은 가운데서도 소위 ‘3D(Dirty, Difficult, Dangerous)’ 업종을 기피하는 한국의 일자리 미스매치 현상에 대한 로머 교수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해 그는 어린 시절에 3D 직종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소개하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고학력자 실업 문제가 심각한데 청년들이 일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현장에서 터득하는 지식이 많기 때문에 기업들이 대학 졸업생보다 경력직을 선호하는 게 일반적인 추세”라고 강조했다. 이어 “자기가 맡은 업무에 대한 책임감, 팀원들에 대한 상호 존중 등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들”이라며 “이게 바로 팀워크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10살 여름 방학 때의 경험담을 소개했다. 그는 “울타리를 치는 일을 했는데 힘이 부족해 장비 등을 한꺼번에 옮기지 못하고 나눠서 옮겼다”며 “다른 사람보다 일처리가 늦었지만 그래도 불평하지 않고 일을 마쳐야 한다는 신념을 배웠다”고 말했다.

    어느덧 약속된 인터뷰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기념사진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흔쾌히 응하며 기자와 함께 큰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이렇게 2018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로머 교수와의 인터뷰는 아쉬움을 남긴 채 마무리됐다.

    [장용승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1호 (2019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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