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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여유 율곡수목원
입력 : 2017.08.11 16: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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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이 그러더군요. 왜 하필 덥고 습한 날에 등산이냐고.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데 굳이 사서 고생한다는 거죠.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그 사람 말에 일리가 있어요.”
곰곰이 생각까지 해야 했다니. 35°C 운운하는 긴급재난 문자가 흔해진 요즘, 그것도 햇볕 쨍한 대낮에 일부러 가파른 고개를 찾아 오르는 게 정상이란 말인가. ‘확실히 정상은 아니네요’란 속내가 입 밖에 나올 뻔한 순간, 그 나름의 등산 예찬이 이어졌다.
“그런데 더운 날 산을 찾는 건 아주 당연한 일상이에요. 가볍게 입고 산행에 나서면 우선 마음이 즐거워요. 간간히 부는 바람이 도심에선 뜨거운데 나무 그늘 아래에선 선선합니다. 뜨거운 날 민둥산을 찾는 건 미친 짓이지요. 울창한 수풀 아래, 그러니까 그늘로만 천천히 걷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걷는 내내 에어컨보다 차가운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계곡이 있는 산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예요. 흐르는 물에 발 담그고 그냥 앉아있는 것만으로 피서가 됩니다. 무더위에도 등산객이 끊이지 않는 건 이런 즐거움을 아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흠…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다. 중견기업에서 임원으로 근무 중인 A씨를 만났다. 별다른 일정 없는 주말이면 으레 (골프장 대신) 산을 찾는다는 그는 요즘 전국 둘레길 삼매경에 빠져있다. 비상약, 물 두어 병, 초콜릿바 두어 개면 만족스러운 하루가 마무리된단다. 산행길 주변에 꼭 하나씩 있다는 맛집으로 이야기 주제가 옮겨질 즈음 “왜 그리 산이 좋으세요?”라고 묻자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한동안 저도 제게 그런 질문을 했어요. 그런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오만 가지 생각 중에 단 하나가 맘에 쏙 들더군요. 산행하다 잠시 쉬려고 어디라도 앉아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주변 숲에선 수백만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난 아무것도 안하고 있거든. 산에 오면 아무것도 안 할 여유가 생겨요. 그러니 좋을 수밖에.”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이곳에 자리한 율곡산에 2009년부터 34.15㏊ 규모의 수목원이 조성되고 있다. ‘율곡수목원’이라 이름 붙은 이 너른 공간이 내년 정식 개원에 앞서 침엽수원, 방향성식물원, 율곡정원, 사임당 치유의 숲 등 일부 구간을 임시 개방했다. 아무것도 안 할 여유를 위해 찾은 여름 산책길, 치유의 숲보다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싶어 걸음을 옮겼다.
율곡수목원은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의 유적을 감싸 안으며 조성됐다. 실제로 율곡리는 가족묘와 자운서원, 기념관, 화석정 등 율곡 선생과 관련된 관광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3호 (2017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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