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우의 어떤 생각] 돈의 위상
입력 : 2016.10.12 15:10:45
-
내 친척 어른 가운데는 국회의원을 해보겠다고 유력한 정치가들을 쫓아다니며 평생을 보낸 사람이 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지만 20~30년 전에는 더욱, 정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줄을 잘 서고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의 눈에 들어야 했다. 사명감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치 지도자의 눈에 들어 공천을 받아낸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는 구조에서는 자신의 사명감과 능력을 키우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유력한 정치가를 쫓아다니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내 기억 속의 친척 어른이 그랬다. 그는 자기를 공천해 줄 정치가를 쫓아다니며 거의 평생을 다 바쳤다. 그가 바친 것은 시간과 돈이었다. 변변한 직업도 가져보지 못한 채 재산을 다 날렸다.
선거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정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가 거느린 그룹에 돈을 풀어줄 능력이 있는 사람을 의미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이 되어보겠다는 정치지망생들과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기업들로부터 효과적으로 정치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정치 리더의 능력이었다. 대개는 자발적 헌금의 모양새를 갖췄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묵시적이거나 심지어 노골적인 압박에 굴복해 갖다 바친 경우가 상당했을 것이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든,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서든,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군림하기 위해서든 돈이 필요했다는 이 이야기는 돈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손색이 없다. 돈만 있고 권력은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 사람과 연을 만들고자 가지고 있는 돈을 쓰는 경우가 흔했는데, 가령 고시에 패스한 가난한 집 수재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졸부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 작가가 고안해낸 허구가 아니다.
가지고 있는 돈을 써서 자녀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 경우도 흔했다. 돈을 써서 공사를 따내고, 기업을 확장하고, 죄를 덮고 권력을 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돈이 얼마나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사례들을 열거하는 것은 아마 쓸데없는 수고일 것이다.
그래도 정치가가 되겠다고, 혹은 사업의 이득을 보장받기 위해 돈을 싸들고 거물 정치인의 집 대문을 들락거리거나 권력을 얻으려고 가지고 있는 돈을 풀어 검사나 판사 사위를 얻는 졸부들 이야기는 돈이 제힘을 아직 덜 발휘하던 시절의 소박한 이야기처럼 내게는 느껴진다. 무슨 이야기냐고? 그 이야기들은 정치와 권력을 살 정도로 대단한 돈의 위력을 맨얼굴로 보여주지만, 동시에 필요하고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돈의 수단적 성격을 표상하기도 한다. 정치나 명예가 더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돈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오해인지 모르나, 그런 돈의 쓰임 속에는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돈은 숭배와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 숭배하고 사랑한다. 좋아하는 대상은 수단일 뿐이지만, 사랑하는 대상은 목적이고 목적이어야 한다. 가령 우리는 소고기를 좋아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 보신탕을 먹는 사람은 개(고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반려견과 같이 사는 사람은 개를 사랑한다. 돈은 좋아할 대상이지 사랑할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돈은 좋아할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다. 유일한 가치가 되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세의 징조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게 된다는 항목을 넣었다. 우리가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이런 세상과 이런 우리가 무섭다. 그냥 좋아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73호 (2016년 10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