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우의 어떤 생각] 허드렛일을 하는 인간

    입력 : 2016.05.02 17:43:59

  • 사진설명
    서유미의 소설집 <당분간 인간>에는 자본이 세계를 지배한 오늘날의 문명사회를 냉정하게 진단하고 비판하는 단편소설들이 여러 편 실려 있다. 그의 소설들에서 사회를 지배하고 인간을 통제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정부나 독재자나 군대가 아니라 ‘회사’로 호명된다. 회사의 지시를 받는 사람들은 이니셜이나 성(姓)이나 ‘남자’, 혹은 ‘여자’ 등으로 불릴 뿐 이름이 없고, 회사의 지시에 따라 서로를 감시한다. 소설에서 인간은 전체를 이루는 극히 작은 ‘일부’로만 기능하고, 물화, 내지는 기계화된 존재로서 주체적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기술된다. 독자가 서유미 소설의 인물들에서 프로그래밍된 대로 행동하고 데이터에 따라 부여된 역할만 감당하는 사이보그 인간을 떠올렸다면 제대로 읽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소설집에 실린 한 단편의 제목은 <저건 사람도 아니다>인데, 여기에는 사람의 일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 로봇이 점차 인간의 중요한 일을 맡아 하게 되고, 사람은 허드렛일을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인간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이 인간이 하던 업무와 대인관계 분야에서 훨씬 유능하게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인간을 대체하고, 결국 인간은 로봇인간을 도와 허드렛일이나 맡아 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인공지능 로봇은 능력만 아니라 매력까지 가진 것으로, 인간은 능력만 아니라 매력도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쯤 되면 <저건 사람도 아니다>라는 소설 제목의 저 단언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 비교적 선명해진다. 처음에는 로봇을 지칭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뜨끔해진다. 본질적으로, 사람도 아닌 저것은 인공지능이지만 현상으로는, 사람도 아닌 저것은 사람이다. 인공지능 로봇을, 아무리 능력이 있고 멋있어 보여도, 그래 봤자 사람이 아니고, 한낱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깔볼 수 없게 될 사회를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예고는 구글이 만든 인공지능 알파고가 현실로 보여주었다. 이세돌 9단과의 이 세기의 대국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전과는 달리 누구도 인공지능 알파고를 ‘저건 사람도 아니다.’라고 깔보고 무시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감탄과 경탄, 심지어 존경, 그리고 공포까지. 무엇보다 티비 중계를 지켜보는 동안 인상적이었던 것은 손이 없는 알파고를 도와 바둑판에 착수를 해주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그는 알파고를 만든 구글 딥마인드 소속 대만인 아자황이라고 한다. 아마추어 바둑 6단인 그가 대국에서 한 일은 인공지능 알파고의 손이 되어, 알파고의 지시에 따라, 알파고가 명령하는 대로 바둑판에 돌을 놓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 그렇게 했고, 그것만 했다. 대국이 끝나고 난 후의 관례적인 복기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는 대국자가 아니고, 그러니까 복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옳음과 그름, 이로움과 해로움, 가치의 있고 없음을 판단하지 않고, 다만 알파고가 시키는 대로 돌을 놓았다. 그밖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을 할 때만 손을 움직이고 그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로봇 같았다. 중요한 일, 의미 있는 일은 인공지능이 차지하고(왜냐하면 인공지능이 더 잘하니까), 인간은 인공지능을 도와 허드렛일을 하는 서유미의 소설이 불길한 느낌과 함께 떠올랐다.

    할 수 있는 능력만 주목할 뿐, 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지를 묻지 않는 효율 지상주의와 천박한 실리주의에 젖은 우리 사회는 인공지능의 세계 지배에 항의할 명분이 없다. 효율적으로 일하고 돈 잘 버는 것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줄을 세우는 사회는 인공지능을 맨 앞에 내세울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업무수행 능력이나 처세의 기술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일을 분별하는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벌써 잊어버린 채 살고 있지 않은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와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역설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독 증상의 대부분은 인간이 인간의 필요와 편의를 위해 만든 것에 지배 받는 전도된 현상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가령 도박이나 게임, 인터넷, 알코올, 포르노, 그리고 최근의 스마트폰까지 어느 것 하나 인간의 필요와 편의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인간은 이렇게 하면 편할 텐데, 이렇게 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하면 힘 안 들이고 능률을 올릴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하면 재미있을 텐데, 하며 이런 저런 것들을 상상하고 발명하고 개발하고 즐기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들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이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물건이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만든 것들이 우리의 시간을 착취하고, 편리를 위해 만든 것들에 우리의 편리를 제공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것들이 우리를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우리가 챙겨주어야 하는 본말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인터넷이 그렇고 스마트폰이 그렇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그럴 거라는 예감은 너무나 선명하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진화된 형태의 인공 지능의 출현에 불안을 느끼는 진짜 이유도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파고를 설계한 딥마인드의 CEO는, 인공지능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선악이 갈린다고, 윤리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동안 인간이 문명의 이기들을 어떻게 써왔는지 돌아보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라는 이 조건문 안에 내장된 불안한 정조를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완전한 기기를 만들어도 인간이 덩달아 완전해지지 않는 이상 어떤 완전한 기기도 인간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인간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거나 불신할 필요는 없지만, 무턱대고 과대평가하거나 막무가내로 신뢰할 수도 없다.

    인간이 허드렛일만 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불필요한 필요를 부추기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라고 권고했다. 오늘날의 과학-인간은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아주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다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있음에도, 유익과 가치를 생각해서 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는 것, 허드렛일을 하는 존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신중하게 결단해야 하는 일인지 모른다.

    이승우 작가 1959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났다.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에리직톤의 초상>이 당선되며 등단했고, 소설집 <구평목씨의 바퀴벌레>, <일식에 대하여>, <미궁에 대한 추측>, <목련공원>,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일기>, 장편소설 <내 안에 또 누가 있나>, <식물들의 사생활>, <생의 이면>, <그곳이 어디든>, <한낮의 시선>, <지상의 노래> 등을 발표했다.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67호(2016년 04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