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근 상보 회장 | “새롭지 않고 남과 같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입력 : 2015.09.04 10:47:13
-
열일곱 살 철없던 시절, 소년티를 벗지 못한 청년은 악착같이 사각의 링에 올랐다. 일찍 찾아온 아버지의 빈자리에 어떻게든 어머니와 두 동생을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이 전부였다. 하지만 챔피언의 벽은 높았다. 그에겐 아마추어대회 준우승이 전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2등은 기억되지 않았다. 스물 셋 성인이 된 청년은 작은 화학기업에 입사한다. 그곳에서 비닐, 필름, 화학재를 익히고 배운 그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서울 중부시장에 상보화학공업사를 세우면서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남의 공장 자투리 공간에서 비닐 포장지 만드는 일로 시작한 사업은 매출은 좋았지만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특별한 기술 없이 가격 경쟁으로 살아야 하는 영세기업의 한계였다. 그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게 오디오 카세트테이프에 들어가는 폴리에스터 필름이다. 당시 재료의 99.9%를 수입하던 필름을 무작정 만들어보겠다고 덤벼든 지 1년여. 그는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 필름 국산화에 성공한다. 국내에서 유일한 생산업체이다 보니 굴지의 대기업들도 제 발로 찾아와 거래를 텄다. 1984년에 시작한 해외수출은 이후 전 세계 시장의 70%를 점유하며 세계 1위 업체란 수식어를 안겨줬다. 1977년에 창업했으니 올해로 39년, 자투리 공장을 첨단소재기업으로 성장시킨 김상근 상보 회장은 “신뢰와 기술개발이 전부였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카세트테이프 세계 1위 업체는 이후 세계 최초로 신복합 광학시트를 개발했고, 지난해엔 꿈의 소재라 불리던 탄소나노튜브(CNT)를 세계 최초로 스마트폰에 적용하며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최근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한 김 회장은 “늘 경쟁력을 염두에 두고 시장을 바라본다”며 “기업이 불안하다는 건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라고 상보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풀어냈다.
대단한 상을 받았어요. 15년 전에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는데, 창업한 지 39년 만에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럴 만큼 잘한 게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뭐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동안 폭염이 기승을 부렸는데요. 여름휴가는 다녀오셨습니까.
아이고, 아직 못 갔어요. 여름휴가는 늘 가는 둥 마는 둥이네요. 요즘은 홈쇼핑에서 여행상품을 팔더군요. 집사람이 어제 그걸 보구 여행 한번 가자던데, 아직 답을 못하고 있습니다.(웃음). 예전에는 직접 영업활동을 하면서 해외출장이라도 다녀왔는데, 최근에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출장갈 일도 없고, 그러다보니 해외에 나갈 일이 없네요.
▶지난 5월 말에 중국 생산 공장이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국내 필름제조업체 중 첫 중국진출인데요.
국내에 공장을 증설했다면 젊은 인력을 좀 더 수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좀 아쉬워요. 현재 전 세계 디스플레이 공장의 60%가 중국에 있습니다. 중국정부가 고부가가치 기술을 가진 현지 생산 기업에 법인세 감면이나 보조금 지원을 늘리는 추세예요. 기술과 품질이 앞서니 지금은 괜찮지만 하루가 다르게 추격해오는 중국이 우리 기술을 따라오면 수출길이 막히는 건 순식간입니다. 그 전에 중국시장을 살펴야죠. 저희로선 첫 해외생산기지인데, 중국시장 선점과 현지 고객 서비스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첫걸음입니다.
▶현지 업체와 합작이 아니라 단독 진출이라고 들었습니다.
지난해 말에 들어갔는데, 그 땐 합작이었어요. 그런데 기술유출이 염려되더군요. 우리도 문제지만 국내 동종업계 모두의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국내에서 투자받아 단독으로 진출했습니다. 쉬운 길 놔두고 어렵게 돌아간 거죠.(웃음) 중국 내 법제적인 문제가 쉽지 않아서 원래 계획보다 한달 반 정도 늦어졌어요.
▶중국공장을 통해 기대되는 매출이 궁금합니다.
중국공장은 현재 50%정도 갖춰진 상황입니다. 시제품 생산을 시작했고, 하반기에 나머지 50%를 갖추게 됩니다. 모든 세팅이 완료되면 약 1000억원의 매출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올 매출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할 것 같은데, 내년부터는 확실히 나타날 겁니다.
시장 정체, 환율, 성장의 큰 벽 ▶2008년 ‘신복합 광학시트’ 개발에 성공한 이후 매년 눈에 띄는 성장을 기록했는데요. 지난해 주춤했습니다.
우리나라 산업의 전반적인 문제인데…. 전체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습니다. 유럽시장도 그렇고 러시아나 브라질은 환율변동이 심해서 수출을 할 수 없을 정도예요. 환율이 떨어진 곳에 수출하게 되면 나가는 족족 적자거든요. 그러니 판매부진이 이어지고 재고가 쌓입니다. 자연히 생산량까지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우린 완성품이 아니라 부품을 생산하는데, 판매량이 줄어드니 부품의 공급량은 덩달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해야 하는 양은 정해져 있는데 공급량이 줄어드니 적은 물량이라도 받으려고 경쟁이 치열해져요. 여기도 악순환이죠.
▶상보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탄소나노튜브(CNT) 분야는 경기둔화의 타격이 특히 더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CNT만 생각하면 정말이지 속이 엄청 상합니다. 6년 동안 400억원을 투자해서 지난해 상용화 기술을 개발했어요. 이 기술은 전 세계에 상보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장이 변했어요. 그 동안 80~90%나 수입에 의존하던 인듐주석산화물(ITO) 소재를 CNT로 대체할 수 있는데, 그 ITO가 전부 일본 거예요. 엔저영향에 가격이 40%나 떨어졌습니다. 대체하려던 CNT의 가격이 오히려 비싸졌으니 죽을 노릇이죠. 그래서 아직 빛을 못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상보의 중국진출과 퀸텀 닷(Quantum Dot) 소재 등에 대한 기술개발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다시 성장이 예상됩니다.
글쎄요…. 저흰 사실 디스플레이 시장 진입이 늦었던 편입니다. 그러다 2008년에 ‘신복합 광학시트’를 개발했는데, 처음엔 반응이 싸늘했어요. 그 때까지 액정표시장치(LCD) 생산업체에선 휘도를 높이기 위해 프리즘 시트와 보호 시트를 따로 사용했거든요. 그 두 시트의 기능을 통합한 게 복합시트고요. 2장 쓸 걸 1장만 쓰니 공정도 줄고 LCD도 얇아지는 효과가 있는데, 시장에 진입한 지 얼마 안 되는 회사의 제품을 믿지 못하는 거예요. 1년 동안 써본 후에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그 분야에선 아직도 저희가 1윕니다. 제품을 생산할 때도 경쟁업체들이 A란 방식을 고집할 때 저흰 생산성이 높은 B로 밀고 나갔어요. 사내에서도 반대가 심했죠. 검증되지 않은 방식을 믿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후발주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나서면 경쟁할 수가 없어요. 위험을 무릅써야죠.
▶그렇다고 늘 리스크를 감수할 순 없는데요.
경쟁력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자 할 때 경쟁력을 생각하지 않으면 남과 다를 게 없어요. 경쟁력도 없이 남과 동일한 결론으로 대응한다면 항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보에는 ‘3新 전략’이 있는데, 첫째는 새로운 공법, 둘째는 새로운 소재, 셋째는 새로운 제품입니다. 이 세 가지를 늘 염두에 두고 있어요. 똑같은 걸 계속 돌린다면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남과 똑같이 가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일종의 산업트렌드처럼 들립니다.
그게 기본이죠. 모든 일은 기초, 기본에서 시작합니다. 그걸 무시하고 잊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트렌드도 기본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엔지니어나 연구원만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게 아니거든요. 아이디어가 관건이죠. 3新은 모든 직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일례로 스티브 잡스 혼자 아이폰을 만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소재는 세상에 없던 걸 만드는 것인데, 내가 모르고 있던 것, 안 쓰던 것을 유용하게 가져다 쓰면 그것도 우리에겐 신소재예요. 그렇게 하자는 게 제 주장입니다.(웃음)
▶그런 이유로 R&D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데요.
작은 기업에서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게 쉽진 않은데, 저희도 많은 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어떤 기술이 상용화돼 효자 노릇을 할진 아직 모르지요. 제조업체 입장에선 기술개발을 하지 않으면 성장 동력이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실패도 경험이고 교훈이에요. 적은 비용으로 성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죠. 당장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더라도 소 뒷걸음에 쥐 잡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웃음)
▶앞서도 말했지만 퀀텀 닷 소재 개발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초부터 퀀텀 닷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앞으로 TV가 유기발광다이어드(OLED)로 바뀐다면 뭘 먹고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다 그 OLED의 대체재인 퀀텀 닷 소재 개발을 결정하게 됐어요. 현재 퀀텀닷 래이어 소재와 배리어 필름을 모두 제조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 정도 수준의 기업은 서너 곳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TV 트렌드가 어떻게 바뀔 것이냐의 문제가 남아있지만 퀀텀 닷 디스플레이가 상용화된다면 저희에겐 큰 기회죠. 확실한 경쟁력이 확보되는 겁니다.
▶사실 성장도 눈에 띄지만 위기도 많았습니다.
많았지요. 1977년에 창업했는데, 그 때 제가 27살이었습니다. 상보화학공업사로 시작해서 ㈜상보화학으로 이름을 바꿨고, 화학이 들어가니 걸리는 게 많아서 지금의 상보가 됐어요. 39년 동안 남들은 평생 한번 겪을까 말까한 일들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화재로 공장이 전소되기도 했고, 물난리에 회사가 잠기기도 했으니…. 돌이켜보면 주변의 도움 덕분에 다시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가슴에 늘 두 가지를 간직하고 있는데, 하나는 신뢰(신용)고 또 하나는 기술개발이에요. 위기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믿어 주신 분들이 선뜻 내주신 자금 덕에 다시 설 수 있었습니다. 기술이 없었다면 그 자금을 제대로 운용할 수 없었겠죠. 이 두 가지가 제겐 기본입니다.
작게 시작해서 크게 가는 건 물 흐는 것과 같은 순리 아니겠습니까. 기업인들의 꿈이죠.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나라는 그게 쉽지 않아요. 소규모로 시작해서 중소기업이 되고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가는 사다리 성장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따져보면 중견기업이 법적으로 제정된 게 지난해 7월이에요. 이제 막 1년이 지났는데, 수많은 제도가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엔 중소기업이 아니면 대기업이었거든요. 그 잣대가 그대로 인 것이죠. 기업 입장에선 중견기업이 됐을 때 작지만 강한기업, 히든챔피언으로 나갈지 아니면 대기업으로 성장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 밑거름이 정책적 지원입니다. 그런데 막상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올라서면 그 때까지 지원되던 정책이 끊어져 버려요. 답답한 노릇이죠. 중견기업이 되면 손해 본다는 인식은 경쟁력이 없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선 안되죠. 중견기업을 위한 새로운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젠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정책적인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문 앞의 ‘상보 100년 달력’에 대기업으로의 성장도 있는 건지요.
제가 100년을 살 순 없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죠. 창업하고선 기업을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을지 생각해봤어요. 우리 상보를 한약을 지을 때 꼭 들어가는 약방의 감초로 만들자고 다짐했어요. 감초 같은 작은 거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게 제 꿈입니다. 작지만 없어서는 안 될, 거인 같은 기업을 만들자. 그렇다고 대기업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웃음)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하신다면.
무엇을 하고자 할 땐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믿음을 주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상대방이 날 인정해주는 신뢰가 첫째예요. 살다보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럴 때 인정을 받지 못해 도움 받지 못하면 쓰러질 수밖에 없어요. 솥단지 걸고 3년이란 속담이 있습니다. 3년은 버틸 수 있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돌아보면 어떠십니까.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작은 거인이 꿈인데, 아직 그렇게 되질 못했으니.(웃음) 창업할 때 작은 거인이 되면 꼭 뒤를 돌아보겠다고 다짐했거든요. 저로 인해 고생한 분들 피해본 분들을 챙겨야죠. 지금도 걱정이 많은 걸 보면 아직 길이 먼 것 같습니다.
<LUXMEN>이 한국중견기업연합회와 공동기획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견기업인과의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최근 중견기업은 사회·경제적 역할이 부각되며 일자리 창출과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핵심 주체로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중견기업을 결집, 현장감 있는 목소리를 대변하고 경제 한류를 주도하는 글로벌 전문기업으로 견인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LUXMEN>이 한국의 중견기업을 응원합니다.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60호 (2015년 09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