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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어떤 생각] (8)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입력 : 2015.05.29 17: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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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일도 맥락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고 어떤 진실도 맥락 없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은, 어떤 문맥에서 발화된 것인지를 고려할 때 옳게 파악될 수 있다. 가령 “내 딸을 구해 온다면 나라의 절반을 자네에게 주겠네”라고 어떤 왕이 말할 때,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주절은 ‘내 딸을 구해온다면’이라는 조건절에 제한적으로 걸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물론 이 광고 속 남자의 말 “안 하고 싶다…”도 맥락 속에서 나온 것이다. 계산대에 앉은 여자가 속사포처럼 빠르게 묻는다. “마일리지 있으세요? 포인트 카드 있으세요? 할인 되는 카드 있으세요?” 남자의 말은 이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좀 과한 반응처럼 여겨질 수 있는 이 남자의 말에서 일종의 저항 의지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말의 내용과 함께 말하는 사람의 표정을 읽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말의 내용보다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 더 많이 더 분명하게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광고 속의 남자의 표정은 단호하고 격렬하다. 무슨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처럼 엄숙하기까지 하다.
왜 하는지 자각할 여유도 주지 않고 하도록 종용하고, 과도하게 소비하게 하는, 그것을 발전과 행복의 표징으로 광고하는 지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으로 읽을 수 없을까. 물론 이 광고가 촉진하는 것 또한 왜 하는지 자각할 여유도 주지 않고 하도록 종용하는 이 시스템의 역설적인 전략이라는 걸 놓치면 안 되겠지만, 거기서 얻을 교훈이 있다는 것 또한 역설이다.
너무 복잡해진 스마트폰과 애플리케이션을 생각해 보라. 유용한 것이 없지 않지만, 꼭 필요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것들도 많다. 어떤 것들은 그런 것이 생긴 다음에야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꾸로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상품이나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없던 ‘필요’가 그 상품이나 프로그램을 소비시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격이다. 필요가 발명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투명사회>와 <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은 자기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의 착취의 방법에 대해 말한다. 착취당한다는 의식 없이, 오히려 자기 기쁨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는 착각 속에서 기꺼이 착취당한다는 것. ‘하면 된다’는 식의 긍정과 적극성의 사고방식이 발전과 진보의 원동력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까지 인류를 끌고 온 것이 그런 가치들이었다. 그렇지만 발전과 진보에 한계점은 없는 것일까? 물어야 할 시점이다. 인류는 더 발전하고 진보할 것이다. 들고 다니는 전화기에 불과했던 휴대폰-스마트폰은 어떻게 진화할지 모른다. 인류는 인간 복제도 해낼 것이다. 더 엄청난 것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온실 가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지구의 시계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발전과 진보의 부작용이다. 핵개발의 위험은 어떤가. 편리와 발전을 앞세운 인간의 탐욕이 초래할 파멸과 종말에 대한 각 분야의 예고와 경고가 그냥 해보는 소리일 리 없다. 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그만하자고, 핵개발도, 인간복제도 하지 말자고, 인류가 선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것이 불가능한 희망이라는 걸 나는 안다. 인간의 욕망이란 게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이 광고 속의 남자가 ‘격렬하게 안 하고 싶다’는 모순의 문장을 사용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격렬하게’ 안 할 수는 없다. ‘격렬하게’는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안 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아니다. 하기 위해서는 격렬함이 필요할 수 있지만 안 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런데 이 모순의 문장은 우리에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린다. 안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암시한다. 안 하려면 ‘격렬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친다. 이 시대는 하라고 하고 더 하라고 한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시스템화되고 거리가 좁혀지고 투명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가만히 있어선 무엇을 안 하기가 어렵다. 가만히 있으면 이 시대의 과도한 ‘함’의 물결에 휩쓸려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치 런닝머신 위에 올라 있는 것과 같다. 런닝머신 위에 올라선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없다. 시대의 흐름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렵다. 욕망에 저항하는 것은 어렵다. 쓰이고자 하는 것이 힘의 속성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사용하지 않기는 어렵다. 유혹자는 40일 굶주린 광야의 예수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다. 이 유혹은 보통 사람에게는 유혹이 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은 돌로 떡을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유혹이 예수에게 유혹이 된 것은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돌을 떡으로 바꿀 능력이 있었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힘 가진 사람들의 불법자금 수수 문제로 세상이 다시 시끄럽다. 뇌물을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힘을 많이 가진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을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진짜 힘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이 진짜 힘이고 능력인 것은, 사랑이 자기가 가진 힘을 자발적으로 쓰지 않기로 하고 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소박한 윤리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물론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기는 어렵다. 힘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의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호함이, 격렬함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6호(2015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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