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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어떤 생각] (5) 나는 타인인가
입력 : 2015.03.06 15: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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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표리부동’이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표현은 거의 나무랄 때 쓰는 말이고 ‘표리일체’나 ‘시종일관’은 주로 칭찬할 때 쓰는 말이다. 표리일체나 한결같음의 상태는 일종의 단순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순성 속에 폭력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얼른 상기되지 않는 듯하다. 이리저리 얽혀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들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이해하려는 것은 일종의 편의주의인데, 이때 차이들은 무시되고 유사한 것들이 동일한 것으로 범주화되는 일이 벌어진다. 차이를 무시하고 비슷한 것은 같은 것이 되어 버리는데, 이 공식은 폭력이다. “비슷한 것은, 비슷하지만, 비슷하기만 할 뿐 다른 것이다.” 라고 할 때 우리는 차이를 발견하고 각자의 개별성에 주목하게 된다. 반대로 비슷한 것을 같은 것이라고 간주하면 차이는 발견되지 않고 각자의 고유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세심과 소심이 구별되지 않고 대범과 무례가 같은 것으로 통용된다. 각자의 고유성과 차이를 무시하고 싶을 때 우리는 비슷한 것을 같은 것으로 묶어서 정리해 버린다. 단순성 속에 폭력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표리일체, 겉과 속이 같은 것, 혼자 자기 방에 있을 때와 남들과 함께 거리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의 행동에 차이가 없다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항상 반드시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선일 수 있는 상황이 있지만 언제나 반드시는 아니다.
혼자 있을 때 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똑같이 행동하는, 그러니까 겉과 속이 다르지 않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자기와 동일시할 때 가능한데,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자기가 아니고 자기일 수 없으므로, 본의 아니게, 혹은 본의를 감춘 채 다른 사람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고유성을 무시하지 않고 이 동일시, 이 한결같음을 발휘하기는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유성을 무시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배려가 다른 사람의 처지를 고려하는 데서 생겨나는 덕목이니까 배려를 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이를테면 몸이 불편한 사람 앞에서는 자기 건강을 과시하지 않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 앞에서는 과식과 미식을 내세우지 않는 것, 실연을 당한 사람 앞에서는 자기 사랑을 너무 자랑하지 않는 것이 배려다. 어떤 이유나 사정으로든 지금 굶고 있는 사람의 면전에서 통닭과 피자를 시켜 게걸스럽게 먹는 시위를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배려의 부재를 폭력이라고 할 것까지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받아야 할 질문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타인은 나와 같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은 나와 다르다, 타인은 내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타인은 내가 아니라는 인식이 타인의 처지를 섬세하게 고려하게 만든다. 굶는 사람 앞에서 폭식하지 않고 실연당한 사람 앞에서 자기 사랑을 과시하지 않는 마음을 생겨나게 한다.
그런데 타인의 처지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때 생기는 부작용은 타인의 개별성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행동할 때 생기는 부작용 못지않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타인의 눈으로 자기를 본다는 뜻이고, 이는 자기를 다른 사람과 동일시한다는 말과 같다. 자기를 다른 사람과 동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위험하다.
‘타인은 나와 동일하다’는 인식이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게 한다면, ‘나는 타인과 동일하다’는 인식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지운다. ‘타인은 나와 같다’고 할 때 타인과 나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타인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처럼 ‘나는 타인과 같다’고 할 때는 나와 타인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나의 존재가 없어진다.
고유한 존재로서의 나는 없어지고 오직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만, 일그러진 형태로 겨우 존재하게 되는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라 비교되는 자고, 따라하는 자고, 전시되는 자에 불과하게 된다. 이때의 나는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보이는 자일뿐이다. 보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다. 보일때만 존재하는 자다.
이 사람이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모자라고,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고, 아무리 꾸며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행복을 느낄 리도 없다. 전시와 보이는 것으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 견유철학자들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부자다. 그런데 비교하고 전시할 때는 언제나 결핍감에 시달리게 된다. 더 크고 더 좋고 더 멋있는 것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이 항상 더 크고 더 좋고 더 멋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선호하는 큰 차, 비싼 가방, 성형 수술의 보편화는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되고 있다는 예증이다. 10억원이 넘는 아파트에 살고 통장에 수억원이나 되는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궁핍하다고 느껴서 가족을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 한 사람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타인을 안중에 두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거나 오직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꾸미고 사는 건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해야 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처지여야 한다. 나는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3호(2015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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