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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놈코어가 대세
입력 : 2015.01.08 15: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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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
오랜 시간 동안 패션이란 단어는 화려하고 한껏 꾸민 스타일링을 의미했다. 패션의 본질이 ‘남들과 다른 것’이라 여긴 사람들은 보다 화려하고 특이한 것만을 좇았다. 그러다보니 이를 조롱하기 위해 ‘패션광대’, ‘패션 공작새’와 같은 말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고급 패션에 싫증을 내기 시작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고급 브랜드를 입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주목받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놈코어라는 용어는 어떻게 생겨나게 됐을까? 그 시작은 공상과학 소설가 윌리엄 깁슨이 2003년 그의 소설 <패턴인식(Pattern Recognition)>에서 주인공의 옷차림을 묘사하면서부터다. 그는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을 “검정 티셔츠, 동부의 사립 초등학교에 납품하는 브랜드에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회색 브이넥 풀오버, 오버사이즈 블랙 리바이스 501!”이라고 묘사하면서, 놈코어 개념을 설명했다. 공상과학소설 마니아들이나 알 법한 이 단어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2013년 10월 뉴욕의 트렌드 예측 회사 ‘케이홀(K-Hole)’이 놈코어를 새로운 경향으로 제안하면서부터다.
케이홀은 놈코어에 대해 “다르지 않음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태도”라며 “남들과 같은 그룹에 속함으로써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만의 개성을 추구하던 시기를 지나 남들과 똑같은 것이 오히려 쿨하다고 여겨지는 시대가 왔다는 얘기다.
이런 케이홀의 주장을 패션의 관점으로 해석한 건 지난 2월, 뉴욕 매거진이 처음이다. 뉴욕 매거진은 ‘놈코어: 자신이 전 세계 70억 인구 중 하나임을 깨달은 사람들을 위한 패션’이라는 기사를 통해 “최근 소호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과연 젊은 아티스트인지, 혹은 그저 평범한 관광객인지 알아보기 힘들다”며 “동네 쇼핑몰에서 구입한 듯 별 개성 없는 부모님 세대의 패션 아이템들이 실제로 뉴욕에서도 가장 핫한 맨해튼 소호에서 인기를 끈다”고 서술했다.
이러한 놈코어 트렌드를 잘 보여주는 사람이 앞에서 언급한 스티브 잡스다. 검은색 터틀넥 셔츠가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불릴 만큼 스티브 잡스는 늘 한 가지 스타일만을 고수했다. 그는 그 패션이야말로 평범하면서도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믿었다고 한다.
(왼쪽부터) 프라다, 유니클로, 럭키슈에트,프라다
갭은 일찌감치 ‘우리는 1969년부터 당신을 위해 놈코어 아이템을 만들어오고 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왔다. 유니클로의 ‘울 블렌드 피코트’는 놈코어 트렌드에 부합하는 좋은 예다.
멜턴 울이라는 좋은 소재를 살린 심플한 디자인이기에 캐주얼뿐만 아니리 비즈니스 룩으로도 즐길 수 있다. 이 트렌드는 옷뿐만 아니라 가방이나 신발로도 흘러간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브루노말리는 군더더기 없는 사각형에 검정색과 회색으로 어떤 의상에도 어울리는 가방 ‘비토리아’를 출시했다.
아식스도 놈코어 트렌드에 발맞춰 운동화 ‘G1’ 신상품의 디자인을 회색, 남색 등으로 평소 옷차림에 어울릴 수 있게 했다. 놈코어 트렌드의 또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이 트렌드가 의류에만 한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 그랬듯이 소품이나 가구에도 번져가는 것이 놈코어다. 지난해 여름 유행한 ‘마이보틀’도 단순함으로 성공을 거둔 예이다. 일본 생활용품 업체 리버스가 판매하는 마이보틀은 투명한 본체에 ‘MY BOTTLE’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플라스틱 물병이다.
안에 담기는 내용물에 따라 여러 색상으로 장식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심플함의 극단을 보여주는 이 물병은 국내에 판매되지 않는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유명세를 탔다.
이 제품의 일본 정가는 1512엔으로 2만원이 채 되지 않지만 일본에 단 2개뿐인 매장 방문이 어렵고 온라인 스토어에서도 품절 사태를 기록하며 국내 공동구매가는 2~3배로 치솟았다.
물론 모두가 놈코어를 하나의 패션 사조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대중지 ‘베니티 페어’는 ‘놈코어가 눈여겨볼 만한 것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놈코어에 대해 지적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칼럼은 놈코어가 ‘남들과 똑같아 보이는 것이 쿨하다’는 깊은 의미를 담았다기보다, 60년대나 80년대 유행이 한 시절을 풍미한 것처럼 이번에는 90년대 차례가 됐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이 90년대 향수로 잠깐 스쳐가는 유행이든, 화려하기만 했던 패션에 저항하는 하나의 중요한 흐름이든 놈코어는 이미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옷장 속에는 물 빠진 청바지, 트레이닝복, 피케셔츠, 터틀넥 스웨터, 면 티셔츠 등 놈코어 트렌드를 보여줄 수 있는 아이템이 이미 수두룩할 터. 평범하고 단순한 데서 패션은 시작된다.
[조성호 매일경제 유통경제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2호(2015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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