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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엄홍길 | “지금이 위기라고들 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합니까?”
입력 : 2015.01.08 1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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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재단 일에 주력 “엄홍길휴먼재단은 내 이름을 걸고 하므로 전력투구를 해야 한다. 재단 직원도 있고 이사장과 임원들도 있지만 내가 있기에 하는 것이다. 그만큼 신경을 더 써야 하고 더 움직여야 한다. 많은 기금 갖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일을 하려면 그만큼 더 뛰어야 한다.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보람을 갖고 한다.”
재단의 해외 사업은 네팔에 학교를 지어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내 사업은 산악인 유가족 지원이나 청소년 희망원정대, 대학생 평화대행진 운영 등 다양하다.
“청소년 희망원정대는 중학교 2학년생을 대상으로 연간 단위로 진행하고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닫힌 공간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학생들을 이끌고 매달 두 번째 일요일에 산을 오르며 체험을 통해 스스로를 깨닫게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내력을 기르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성취감을 느끼도록 한다. 진취적 기상과 도전정신을 키워주는 것이다.”
프로그램엔 하계캠프와 동계캠프도 있다. 단체생활을 통해 핵가족 시대 청소년들에게 부족한 조직생활 능력을 길러주고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자는 것이다.
“하계캠프는 나라사랑 병영체험으로 한다. 인제 군부대에서 2박3일간 훈련을 하고 을지전망대에서 DMZ까지 걷게 한다. 이 과정에서 안보의식을 갖게 되며 국가관과 애족 정신도 키울 수 있다. 동계캠프에선 태백산으로 가 1박2일 동안 눈길 산행을 한다. 뒷동산만 오르던 아이들이 1500m급 산을 오르며 고통을 견디는 과정에서 자신을 이겨내고 근성도 키운다. 지난번 올랐던 낮은 산과 비교해보며 성취감도 느낀다. 이런 훈련을 통해 목표와 꿈을 갖도록 동기부여를 한다. 그 뒤 내 경험담을 소개하고 태백시 안전체험관서 안전교육까지 시킨다.”
이런 단체 활동을 통해 학생들은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 특히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나 희생정신까지 갖추게 된다고 했다. 1년 과정을 마치면 모범생 2명을 뽑아 네팔로 데리고 가 함께 봉사활동도 하고 트레킹도 한 뒤 돌아온다고 했다.
이와는 별도로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매년 여름방학 때 100명을 선발해 DMZ평화통일대행진을 한다.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임진각까지 155마일을 동서로 횡단한다. DMZ를 따라 걸으면서 국가관과 안보관을 갖게 된다. 연병장서 막영생활을 하면서 군을 재인식하는 것도 큰 성과다.”
그 외에 매년 휴먼상과 도전상도 시상하고 있다고 했다.
“휴먼상은 인간성 상실 위기에 처한 메마르고 각박한 세상에 휴머니즘을 느끼게 한 인물을 선정해 시상한다. 도전상은 나이에 상관없이 도전적 삶을 살아온 분들을 발굴해 시상한다. 그러다보니 휴먼상은 연세 드신 분들이, 도전상은 젊은이들이 주로 받는 것 같다.”
많은 일을 하지만 재단은 최소한의 인원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꾸려가려 한다고 강조했다. 도움을 주신 분들의 정성을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재단은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십시일반으로 도와줘서 활동할 수 있다. 태산이 한 줌의 흙을 아쉬워하듯이 자그마한 성원이라도 보탬이 된다. 그분들의 정성을 제대로 전해주려면 적게 써야 한다. 중간에서 많이 쓰는 것은 안 된다. 재단 운영하면서 TV광고까지 하는 곳도 있는데 그러면 기금이 실질적으로 집행될 수 있겠나.”
산악인다운 자세다.
네팔 팡보체 휴먼스쿨
“고상돈 선배가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1977년에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정상 등정 후 카퍼레이드까지 했다. 그때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위아래 빨간 다운재킷과 팬츠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커다란 무전기를 든 채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이 너무 강렬하게 와 닿았다. 어린 마음에 그분의 마음을 공감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을 갖게 됐고 히말라야를 꿈꾸게 되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암벽등반을 배웠다고 했다.
“부모님이 도봉산에서 장사를 하셨다. 산에서 살다보니 일찍부터 두꺼비바위에서 바위를 배웠다. 그 당시 두꺼비바위에는 많은 산악인이 모여 야영을 하면서 훈련을 했다. 자연스레 그분들께 암벽기술을 터득했고 본격적으로 등산을 떠나 등반 개념으로 산을 다니게 됐다.”
엄홍길은 1985년 첫 원정을 나갔다. 그렇지만 그 원정이 쉽지는 않았다.
“제대 이듬해인 26살 때다. 그것도 동계 시즌에 갔다.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어떻게 그런 엄청난 도전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그것도 남서벽의 가장 어려운 루트를 꿈꿨는지 모르겠다.”
그는 당시 상황이 떠오른 듯 진저리를 쳤다.
“모든 게 어려웠다. 지금 하라면 아마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 추운 겨울에 갔는지. 히말라야 동계 원정을 다섯 번 정도 갔는데 진짜 춥고 바람이 너무 불었다. 베이스캠프에 앉아 있으면 정상의 바람이 초음속 전투기가 이륙할 때처럼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소리만으로 공포에 질리게 하는 바람이었다. 다운재킷 입고 앉아 차를 마시려고 해도 따라 놓으면 금세 식고 살얼음이 얼었다. 평균 영하 30도까지 떨어졌으니 바람이라도 불면 체감온도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산악인들조차 막연한 도전의 대상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 후원을 받기도 어려웠다.
“예산이 없어 현지에서 배추를 사서 가지고 간 고춧가루를 버무려 대충 김치라고 싸들고 캐러밴을 했다. 국산장비가 형편없을 때라 현지 장비점서 외국인이 팔고 떠난 중고장비를 사들고 갔다. 돈이 없어 셰르파도 최소로 쓸 수밖에 없었다. 기초지식이 전혀 없을 때라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식이었다.”
대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떠난 원정이었지만 첫 도전으론 무리였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엄홍길은 1989년 에베레스트(8850m) 정상에 섰다. 1990년대 초엔 초오유(8201m)와 시사팡마(8027m) 등도 올랐다.
엄홍길은 이 과정에서 스페인 바스크 출신의 세계적 산악인 훠니또 오와르자발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와는 1995년 마칼루를 오를 때부터 5년 동안 함께 산행을 했다.
“왕복 항공권과 개인장비만 가지고 오라고 했다. 나머지는 그 친구가 다 준비했다.”
자신감을 얻은 엄홍길은 그해 14좌 완등 목표를 공표했다. 완등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한 기업이 스폰서로 나섰다. 운동선수처럼 비상근으로 일하면서 고정수입까지 얻게 됐다. 그가 난생 처음으로 가진 직장이었다. 10년 동안 가난한 원정을 다닌 끝에 겨우 얻은 후원이었다.
“돈 생각하고 갔으면 못했을 것이다. 오르는 것에만 미쳐서 가다보니 나머지가 부수적으로 따라왔다.”
그렇게 해서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오른 그는 나중에 에베레스트를 두 번이나 더 오른 뒤 위성봉인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까지 올라 스스로 세계 최초의 16좌 완등을 내세우고 있다. 얄룽캉은 세계 3위봉인 칸첸중가(8603m)의 서봉으로 주봉과 높이 차이가 적어 위성봉으로 불리지만 엄홍길은 별개 봉우리로 간주하고 있다. 로체샤르는 세계 4위봉 로체(8516m)에 딸린 봉우리로 로체에 가려 14좌에 끼지는 못했지만 남벽에 70도가 넘는 급경사가 3000m나 이어지는 히말라야 최대 난코스 중 하나이다. 그가 성과를 내세우는 것도 당연하다.
부러진 다리로 2박3일간 걸어 생환 그에게 가장 어려운 산이 어디였는지를 물었다.
“안나푸르나(8091m)다. 네 번 실패한 뒤 다섯 번째 도전해 겨우 올랐다. 한 산을 다섯 번이나 도전해 겨우 오른 것은 처음이다. 세 번째 산행에선 혈육과도 같은 동료들을 잃었다. 네 번째 원정 때는 내 오른쪽 발목이 완전히 부러지는 엄청난 중상을 입었다. 앞서 올라가던 동료가 미끄러지는 걸 보고 살리려고 순간적으로 줄을 잡아채다가 함께 미끄러졌다. 확보(상대의 추락을 막기 위해 본인의 자세를 고정하고 상대의 줄을 잡아주는 등산 용어)도 못한 상태로 자유등반을 할 때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발목 아래가 덜렁덜렁 돌아가 있었다. 다행히 친구는 말짱했다. 그 상태로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한쪽 다리로 2박3일 동안 걸어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왔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걸었다. ‘안나푸르나의 신이시여 나는 살아서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기도했다. 한국으로 긴급 이송됐다. 의사는 더 이상 산행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엄홍길은 거기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부러진 다리에) 금속 핀을 박고 통깁스를 했는데 5개월 만에 깁스를 깨버리고 억지로 백운대까지 올랐다.”
그렇게 재활에 나섰다. 그리고는 안나푸르나에 다시 도전했다.
“주치의는 만류했다.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이라고 나섰다. 사고 10개월 만이다. 그해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한 뒤 돌아와서 핀을 뺐다.”
(위)청소년 희망원정대 (아래)7차 따로바니 휴먼스쿨 준공식에서
“꿈이 있고 목표가 있으면 거기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능력이 나온다. 해내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와 신념, 거기서 근성이 나온다. 이뤄야 한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고 그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있으면 인간의 무한한 능력이 나온다.”
그런 처절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의 눈엔 젊은이들이 너무나 나약하게 비춰지는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은 작은 산은 고사하고 올라간다는 것 자체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힘든 걸 왜 하느냐고 한다. 일자리가 없다면서 3D업종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편한 것만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게 아니다. 원하는 대로 다 된다면 못 살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면서 일자리 문제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젊은이들은 청년실업이니 어쩌니 하면서 무조건 위만 보려고 한다. 그들에게 무슨 잣대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중소기업은 일손이 없어서 난리다. 노동청 지청에 가 보면 중소기업들이 찾아와 외국인 한 명이라도 더 받게 해 달라고 난리다. 그런데도 한국 젊은이들은 편안한 것만 찾는다.”
그는 진정한 승리는 어렵게 얻는 것이라고 했다.
“쉽게 이루면 쉽게 버린다. 고통의 과정을 감내하고 이뤄야 진정한 성공이고 값진 성공이다. 편한 것만 생각했다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겠는가. 성공의 이면엔 수많은 실패와 좌절, 피눈물 나는 고통이 있었다. 그걸 딛고 이 자리까지 왔다. 주변의 만류도 많았지만 근성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다.”
그러면서 진짜 근성을 키운 UDT도 자원해 입대했다고 밝혔다.
“거기선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을 받는다. 많은 동료들이 훈련받다가 퇴교 당할 정도로 훈련이 혹독하다. 그런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인간병기가 태어난다. 그게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다. 크든 작든 모험을 하고 도전을 하게 된다. 여기서 목표를 갖고 이루고자 하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루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와 꿈이 있으면 의지와 신념이 생기고 도전정신이 생긴다. 또 어떤 일이든 하겠다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열정을 갖고 하면 자신감이 생기고 의욕도 생긴다. 신념과 의지도 생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어떤 일이든 불안요소는 다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걸 극복해야 한다.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라. 도전하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
그러면서 보통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나는 목숨을 걸고 도전했다. 일상적 삶을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게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런데 왜 못하나.”
그러면서 1993년에 올랐던 시사팡마(8027m)를 2001년에 다시 오른 얘기도 들려줬다.
“(남들이) 시비를 걸기에 그냥 올라버렸다. 올랐으니 올랐다고 한 게 아니냐고….”
엄홍길은 산악인이라 ‘인간사랑’ ‘자연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갔는데 오래전부터 상생정신까지 강조한 게 궁금했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가 잘났다고 자연을 무시하면 인간이 어떻게 살 수 있나. 서로가 조화를 이루며 함께 해야 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혼자서만 해선 안 된다. 위아래 상하조직이 서로 조화를 이뤄가며 살아가야 한다.”
엄홍길 여덟 번째로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14좌를 완등한 세계적 산악인이다. 도전정신과 상생정신을 강조하는 잘나가는 강사이기도 하다. 자승최강(自勝最强)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는데 자신을 이기는 게 가장 강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명함엔 청울(淸亐)이라는 호가 적혀 있다. “좋은 기운을 널리 알리라는 뜻으로 아는 분이 지어주셨다”고 한다.
경남 고성 출신으로 부모님이 의정부(도봉산)로 이주하면서 어려서부터 산을 집 삼아 성장했다. 한국외국어대에서 중국어를 전공했고 현재 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와 밀레 기술고문, 대한산악연맹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자료제공 엄홍길휴먼재단]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2호(2015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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