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절에서 비롯된 자살보험금 1조원

    입력 : 2014.11.21 15: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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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보험에 가입한 후 자살하면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까.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입 후 2년 이내 자살하면 사망보험금을 수령할 수 없지만 2년이 지난 이후 자살하면 받을 수 있다. 가입 후 2년 이내 자살한 사람에게 사망보험금을 주지 않는 것은 자칫 자살이나 보험사기 등을 부추길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사망보험금이냐, 재해사망보험금이냐 생명보험에 가입한 후 2년이 지나 자살했다면 일반사망보험금을 줘야 할까, 아니면 재해로 사망했을 때 지급하는 재해사망보험금을 적용해야 할까. 참고로 생명보험에 가입할 때 특약 형태 등으로 재해사망보험금을 추가하면, 재해로 사망했을 때 일반사망보험금의 2~4배에 달하는 재해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면 자살에 대해서는 상식적으로 일반사망보험금을 주는 게 맞다. 사회통념상 자살을 재해로 볼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2010년 4월 이후 생명보험에 가입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런 상식적인 보험금 지급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2010년 4월 이전에 생명보험에 가입한 경우에는 가입 2년 후 자살한 사람에게 재해사망보험금을 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게 됐다. 왜 그럴까. 배경은 이렇다. 2010년 4월 표준약관이 개정되기 이전에 생보사들이 내놨던 상품 중에 ‘자살 때 재해사망보험금이 지급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약관을 갖춘 것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약관에 실수가 있었던 것이다.



    약관 베끼기가 빚은 보험사들의 집단 오류 ‘약관’에 도가 튼 전문가들이 모인 보험사에서 어떻게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원인은 ‘표절’이다. A생보사가 잘못된 약관으로 상품을 내놓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나머지 보험사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 약관을 베껴 상품을 내놓다 보니 죄다 잘못된 약관을 쓰게 된 것이다. 물론 그동안 보험사들은 이런 ‘약관 오류’를 쉬쉬한 채 자살 때 일반사망보험금을 지급해 왔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이 ING생명을 검사하다가 이런 사실이 발견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가입자와 시민단체 등은 당연히 약관에 명시된 대로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게 이른바 보험업계를 뜨겁게 만들고 있는 ‘자살보험금(자살 때 재해사망금 지급)’문제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생보사들은 약관에 실수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생보사들이 지급 불가를 고집하는 근거는 두 가지이다. ‘사회 통념상 자살은 재해로 볼 수 없다’는 점과 ‘자칫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면 자살을 부추기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B생보사 사장은 “자살보험금의 문제가 불거진 후 자신이 가입한 보험에 대해 ‘자살하면 보험금을 더 주는 거냐’는 문의전화가 걸려온다”며 “자살보험금을 지급했다가는 자칫 자살예방단체 등으로부터 항의를 받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든다”고 설명했다. 생보사들이 자살보험금을 지급하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막대한 추가비용발생의 문제이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 4월 말을 기준으로 생보사들이 미지급한 자살보험금만 2179억원에 달한다. 특히 삼성·교보·한화생명 등 대형생보사가 미지급한 금액만 859억원에 이른다. 또 동부·흥국 등 중견 생보사들이 미지급한 자살보험금은 413억원, ING·알리안츠 등 외국계 생보사가 미지급한 금액은 907억원에 달한다.

    여기에다 보험금을 늦게 지급한 데 대한 지연이자까지 감안하면 보험사 부담은 훨씬 커진다.

    또 보험사들이 자살보험금 문제에 얽혀 있는 계약을 281만7000여 건이나 보유하고 있어 추가로 지급해야 하는 보험금 규모가 최대 1조원까지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베껴 썼던 약관이 생보업계에 1조원의 추가부담을 만드는 재앙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생긴 셈이다. 그나마 자살보험금 문제에서 자유로운 생보사는 동양생명과 푸르덴셜생명, 라이나생명 등이다.



    설상가상 생명보험사 전전긍긍 생보사들은 그렇지 않아도 저금리 기조가 계속되면서 수익성 측면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생보사들의 운용수익률은 저금리로 하락세를 보이며 4% 중반대까지 내려갔는데 1998년 외환위기 전후 대거 팔았던 고금리 저축성 상품의 경우 6~8%의 금리를 보장하는 확정금리형이 적지 않았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생보사 보험료 적립금 규모는 405조원인데, 이 가운데 금리확정형 비중이 46.4%(188조원)이고, 금리연동형은 53.6%(217조원)다. 금리확정형 중에서도 3분의 1 가까이 되는 6% 이상 고금리를 제공하는 상품들이다. 한마디로 돈 굴려서 얻는 수익보다 더 많은 이자를 줘야 하는 계약이 적지 않은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B생보사 대표는 “(생보사들이) 서서히 가라앉는 항공모함 같다”며 걱정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생보사들은 저금리로 인한 수익성 악화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구조조정까지 나섰다. 삼성생명이 올 들어 1000여 명을 희망퇴직 시킨 것을 비롯해 주요 보험사들이 구조조정을 했다. 상황이 이런데, 최대 1조원까지로 추정되는 자살보험금 문제까지 불거지니 생보사 입장에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가입자 및 시민단체와 보험사의 입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중재할 수 있는 금융당국은 어떤 입장을 보이고 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 금감원은 여러 가지 사항을 검토한 끝에 ‘생보사가 약관대로 자살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금감원은 지난 7월 제재심의위원회를 통해 ING생명에 대해 기관주의, 임직원 징계, 과징금 등의 제재를 내림으로써 ‘약관대로 자살 때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의 결론을 내렸다. 금감원은 또 지난 9월 삼성생명, 교보생명, 한화생명, 농협생명 등 주요 12개 생보사에 ‘생보사들을 상대로 자살보험금 지급을 요구한 39건의 민원에 대해 민원의 요구대로 지급하라’고 권고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 공문은 이미 제기된 민원에 한정된 내용이지만 보험사들이 ‘지급’을 결정할 경우 자살보험금 전체 계약에 대한 입장표명으로 볼 수 있어 관심이 쏠렸다.



    버티는 삼성·교보 등 12개 생보사 결말은 하지만 대부분의 생보사가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성생명, 교보생명, 한화생명 등 10개 보험사는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거나 ‘이미 진행 중인 관련소송이 있어 그 결과를 본 후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살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뜻을 밝힌 곳은 에이스생명과 현대라이프뿐이었다.

    금감원은 자살보험금과 관련해 ING생명뿐 아니라 다른 생보사들도 검사하겠다며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생보사들은 ING생명이 금감원의 징계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를 바라는 눈치이다. 하지만 ING생명은 생보업계 전체의 문제인데 혼자 소송에 나서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금감원의 권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생보사들이 자살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어 결국 이 문제는 소송 등으로 이어져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0호(2014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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