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EO 걷기 프로젝트] 휘휘 돌았으니 다시 처음부터…경기도 파주 심학산 둘레길

    입력 : 2014.09.19 17: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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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럼프는 젊을 때나 있으려니 했는데 아니더군요. 요즘 괜히 센치해져서 혼자 생각이 많아졌다니까. 이 나이에 이 길이 정말 내 길인지 되지도 않는 고민을 하지 않나… 보고하는 팀원 앞에선 아무 말 않다가 혼자 있을 때 중얼중얼 그놈 욕을 하고 있어요. 더 이상 직장생활이 맞지 않는 건지 원….” 툭 던진 말에 뼈가 있었다. 기름 빼고 따귀 빼고 뽀얀 국물 휘휘 저어 내용물을 들여다보니 ‘제대로 따라오는 팀원이 없어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속내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이럴 땐 그저 들어주는 이가 묘약이자 훌륭한 폭발물 처리반이다. 이게 맞네, 저게 맞네, 추임새 없이 고개만 끄덕여도 바짝 선 핏줄이 느슨해진다. 어쨌거나 잘나가던 양 부장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 건 두어 달 전 상반기 실적보고 때문이었다. 입사 동기 중 가장 먼저 부장으로 승진한 그에게 첫 실적보고는 데뷔 무대나 다름없었다. 목표치 달성은 기본이요, 뭐든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무엇보다 간당간당한 실적에 직속 임원의 불호령이 꼬리를 물었다. 차장 땐 뭐든 잘하더니 이렇게 해서 임원까지 가겠냐는 말도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내 게시판엔 그를 빗댄 조소까지 올라왔다.

    “입사하고 그런 말은 난생 처음 들어봤어요. 잘못했단 말도 정도껏이지, 위에서 하도 뭐라 하니 잘 지내던 후배들까지 미덥지가 않더군요. 은연중에 그런 짜증이 비쳤는지 부장 되고 사람이 달라졌다는 둥, 첫 보고에서 미끄러졌으니 이미 찬밥이라는 둥… 그렇게 위해줬던 놈들인데 수군수군 뒷담화 실력이 끝내줘요. 님과 남은 점 하나 차이라더니, 아군이 적군 되는 거 직장에선 한순간입디다. 믿을 놈, 내 편, 그런 건 애당초 없었어요. 그래서 머슴이라던가 허….”

    생채기가 컸다. 엘리트 코스만 밟아 온 그로선 그동안 악담보다 칭찬이 익숙했다. 늘 활짝 핀 장미였지 이름 없는 들꽃이었던 기억이 없었다. 때늦은 들꽃이 된 양 부장은 요즘 무명초에 대한 탐구가 한창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분명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에 유심히 살펴보고 있단다.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보니 후보 선수가 눈에 들어옵디다. 내가 이 만큼 잘났다고 말로 포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후보처럼 뒤에 서 있더군요. 그래서 그분들을 유심히 봐요. 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옆에서 살랑거리는 것들보다 훨씬 미덥습니다. 다 같은 머슴인데 연줄 따지면 뭐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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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니 입추가 지났다지만 한여름 바람은 여전히 뜨거웠다.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뒤에 자리한 심학산은 오르는 이들의 옷차림 때문에 초입부터 울긋불긋했다. 고작 해발 192m밖에 안되는 동산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09년부터. 당시 제주도에 올레길 열풍이 일자, 시 차원에서 공공 숲 가꾸기 사업이 진행됐고, 심학산 7~8부 능선에 둘레길이 조성됐다. 총 6.8㎞에 이르는 길은 곳곳에 속이 탁 트이는 전경을 감추고 있다. 이토록 낮은 산에 이처럼 광활한 풍경이 숨어 있는 건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다. 첩첩산중이라면 눈에 띄지 않았을 산은 후보선수 마냥 나 홀로 뚝 떨어져 있어 오히려 빛을 발한다. 여기에 유유히 흐르는 한강 둔치가 평야처럼 펼쳐져 있다.

    서패리 꽃마을 부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쪽 고른 배 밭을 오르니 벌써 산의 7부 능선이다. 사람 두서넛이 지나도 충분한 둘레길은 이곳부터 동서로 길쭉한 심학산을 한 바퀴 휘감아 돈다. 서패리 꽃마을 외에도 약천사와 교하배수지 인근에 주차장이 있어 울긋불긋한 풍경은 길을 걷는 내내 이어진다. 서패리꽃마을~배밭~정자~낙조전망대~전원마을~솔향기쉼터~교하배수지~약천사~정상~배밭~서패리꽃마을로 돌아나가는 길은 쉬엄쉬엄 걷다 쉬기를 반복해도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일부러 걷기 편하라고 만들어 놓은 길 주변엔 간간이 체육시설도 눈에 띈다. 바위나 날카로운 돌이 적어 보드라운 흙길을 맨발로 걷는 이들도 있다. 간혹 움푹 패거나 통로처럼 길게 땅을 정리한 흔적이 있는데, 이는 주변 군부대의 작품이다. 지휘차량이 오를 수 있게 닦아 놓은 길이 등산로가 됐으니 길옆에 패인 곳은 포 자리요 참호 등 훈련의 흔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낙조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장엄하다 못해 엄숙했다. 출판단지를 끼고 도는 웅장한 한강의 왼편이 김포 신도시라면 오른편 끝자락에 흐릿한 건물이 들어선 뭍의 풍경은 황해도 개풍군이었다. 분단의 현실은 여전했지만 풍경의 기운은 창대했다.

    약천사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
    약천사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
    작지만 사방을 아우르는 위엄 걷는 길 위의 동무는 둘이어도 좋고 셋이어도 좋다. 홀로 걷는다고 흉보는 이 없으니 산에 오르는 이들은 저마다 사연을 안고 걸음을 옮긴다. 길 위에 제각각인 삶이 채이고 버려지면 산은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을 내보내 걷는 이들이 쉬어가게 한다. 심학산은 그 중심에 약천사가 있다. 둘레길을 걷던 이들은 이곳의 거대한 좌불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른다. 고려시대 절터로 전해오다 1932년 다시 지어진 약천사는 2008년 높이 13m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이 들어서며 유명세를 탔다. 한류 팬들에겐 배우 고 박용하의 추모식이 열리는 곳으로 알려졌다.

    물이 유명해 창건하게 됐다는 말이 돌 만큼 유명한 약수를 들이켜고 위쪽으로 약 100m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심학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닿는다. 말이 능선이지 둘레길보다 폭이 넓은, 제대로 닦은 길이다. 물론 정상에 가까워지면 등산로의 경사가 가팔라진다. 세상사 쉬운 일이 어디 있냐는 듯 숨이 턱 밑까지 차면 정상에 조성된 팔각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의 시야는 거칠 것이 없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막힌 곳 없이 탁 트였다. 이 야트막한 산을 가로막고 있는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백두대간 긴 산줄기 앞이라면 기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할 동네 뒷산의 모양새지만 이곳 파주에선 험한 산세 부럽지 않은 위엄을 자랑한다. 백두대간의 후보군이 한순간 홈런타자가 된 격이랄까. 날이 좋으면 멀리 강화도까지 볼 수 있어 낙조 명소로도 이름이 높은 곳이다.

    여름 산의 묘미 중 하나는 정상에서 파는 아이스바라 했던가. 한 입 커다랗게 베어 물고 다시 걸음을 옮기면 하산을 재촉하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팔각정에서 둘레길로 내려서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두 시간 넘게 산행을 했으니 가파른 길에선 정신 바짝 차려야 마무리가 한가롭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다시금 배 밭이다. 한 바퀴 휘 돌고 나오니 울긋불긋한 트래킹 동호회 무리가 품평회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돌아본 산 중 가장 낮은 산이지만 볼 게 많아요.”

    “생각보다 숨겨 놓은 게 많아서 놀랐네. 산은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엔 모르겠어요.”

    “직접 보니 대단하죠. 아, 그러니 사람은 어떻겠어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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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 웬 철조망? 심학산에 등산객이 몰리게 된 건 둘레길 덕분이다. 자유로와 제2자유로를 통해 서울 도심에서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라 주말이면 사람 반 나무 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등산로 초입엔 음식점도 성업 중이다. 아예 먹거리촌이 생겨났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둘레길이 통과하는 사유지 구간 토지주 일부가 파주시에 도시자연공원구역 해제와 토지 매입을 요구하면서 철조망이 등장했다. 토지주들은 지난해 5월 동의 없이 설치된 심학산 둘레길 철거와 공원구역 지정에 대한 부당이득금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올해 4월 승소했다. 이후 최근 사유지 구간 4개소에 윤형 철조망을 설치한 것이다. 파주시 측은 예산부족으로 토지매입이 어렵다며 토지주가 다른 목적으로 사유지를 사용하기 전까지 둘레길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있다. 234필지 142만96㎡ 규모의 심학산은 대부분이 사유지다. 복잡한 상황을 알기 쉽게 정리한 건 산 중턱 아이스바 아저씨였다.

    “둘레길에 사람이 몰리니 산 주인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해온 거죠. 소송에서도 이겼는데, 시 측에선 예산이 없으니 매입할 순 없고 동의 없이 설치해 미안하다 이겁니다. 그런데 오는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으니 당신들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건데, 이미 오기 시작한 등산객들이 가만있질 않아요. 어떤 분들은 절단기를 들고 오기도 합니다. 각자 입장은 이해하지만 글쎄요, 안전을 위해서라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파주 =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8호(2014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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