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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걷기 프로젝트] 휘휘 돌았으니 다시 처음부터…경기도 파주 심학산 둘레길
입력 : 2014.09.19 17: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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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하고 그런 말은 난생 처음 들어봤어요. 잘못했단 말도 정도껏이지, 위에서 하도 뭐라 하니 잘 지내던 후배들까지 미덥지가 않더군요. 은연중에 그런 짜증이 비쳤는지 부장 되고 사람이 달라졌다는 둥, 첫 보고에서 미끄러졌으니 이미 찬밥이라는 둥… 그렇게 위해줬던 놈들인데 수군수군 뒷담화 실력이 끝내줘요. 님과 남은 점 하나 차이라더니, 아군이 적군 되는 거 직장에선 한순간입디다. 믿을 놈, 내 편, 그런 건 애당초 없었어요. 그래서 머슴이라던가 허….”
생채기가 컸다. 엘리트 코스만 밟아 온 그로선 그동안 악담보다 칭찬이 익숙했다. 늘 활짝 핀 장미였지 이름 없는 들꽃이었던 기억이 없었다. 때늦은 들꽃이 된 양 부장은 요즘 무명초에 대한 탐구가 한창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분명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에 유심히 살펴보고 있단다.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보니 후보 선수가 눈에 들어옵디다. 내가 이 만큼 잘났다고 말로 포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후보처럼 뒤에 서 있더군요. 그래서 그분들을 유심히 봐요. 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옆에서 살랑거리는 것들보다 훨씬 미덥습니다. 다 같은 머슴인데 연줄 따지면 뭐하겠어요.”
서패리 꽃마을 부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쪽 고른 배 밭을 오르니 벌써 산의 7부 능선이다. 사람 두서넛이 지나도 충분한 둘레길은 이곳부터 동서로 길쭉한 심학산을 한 바퀴 휘감아 돈다. 서패리 꽃마을 외에도 약천사와 교하배수지 인근에 주차장이 있어 울긋불긋한 풍경은 길을 걷는 내내 이어진다. 서패리꽃마을~배밭~정자~낙조전망대~전원마을~솔향기쉼터~교하배수지~약천사~정상~배밭~서패리꽃마을로 돌아나가는 길은 쉬엄쉬엄 걷다 쉬기를 반복해도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일부러 걷기 편하라고 만들어 놓은 길 주변엔 간간이 체육시설도 눈에 띈다. 바위나 날카로운 돌이 적어 보드라운 흙길을 맨발로 걷는 이들도 있다. 간혹 움푹 패거나 통로처럼 길게 땅을 정리한 흔적이 있는데, 이는 주변 군부대의 작품이다. 지휘차량이 오를 수 있게 닦아 놓은 길이 등산로가 됐으니 길옆에 패인 곳은 포 자리요 참호 등 훈련의 흔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낙조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장엄하다 못해 엄숙했다. 출판단지를 끼고 도는 웅장한 한강의 왼편이 김포 신도시라면 오른편 끝자락에 흐릿한 건물이 들어선 뭍의 풍경은 황해도 개풍군이었다. 분단의 현실은 여전했지만 풍경의 기운은 창대했다.
약천사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
물이 유명해 창건하게 됐다는 말이 돌 만큼 유명한 약수를 들이켜고 위쪽으로 약 100m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심학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닿는다. 말이 능선이지 둘레길보다 폭이 넓은, 제대로 닦은 길이다. 물론 정상에 가까워지면 등산로의 경사가 가팔라진다. 세상사 쉬운 일이 어디 있냐는 듯 숨이 턱 밑까지 차면 정상에 조성된 팔각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의 시야는 거칠 것이 없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막힌 곳 없이 탁 트였다. 이 야트막한 산을 가로막고 있는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백두대간 긴 산줄기 앞이라면 기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할 동네 뒷산의 모양새지만 이곳 파주에선 험한 산세 부럽지 않은 위엄을 자랑한다. 백두대간의 후보군이 한순간 홈런타자가 된 격이랄까. 날이 좋으면 멀리 강화도까지 볼 수 있어 낙조 명소로도 이름이 높은 곳이다.
여름 산의 묘미 중 하나는 정상에서 파는 아이스바라 했던가. 한 입 커다랗게 베어 물고 다시 걸음을 옮기면 하산을 재촉하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팔각정에서 둘레길로 내려서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두 시간 넘게 산행을 했으니 가파른 길에선 정신 바짝 차려야 마무리가 한가롭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다시금 배 밭이다. 한 바퀴 휘 돌고 나오니 울긋불긋한 트래킹 동호회 무리가 품평회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돌아본 산 중 가장 낮은 산이지만 볼 게 많아요.”
“생각보다 숨겨 놓은 게 많아서 놀랐네. 산은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엔 모르겠어요.”
“직접 보니 대단하죠. 아, 그러니 사람은 어떻겠어요? 허허.”
“둘레길에 사람이 몰리니 산 주인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해온 거죠. 소송에서도 이겼는데, 시 측에선 예산이 없으니 매입할 순 없고 동의 없이 설치해 미안하다 이겁니다. 그런데 오는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으니 당신들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건데, 이미 오기 시작한 등산객들이 가만있질 않아요. 어떤 분들은 절단기를 들고 오기도 합니다. 각자 입장은 이해하지만 글쎄요, 안전을 위해서라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파주 =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8호(2014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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