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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2014년 봄, 세월호…우리들의 초상
입력 : 2014.06.25 15: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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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만도 못한 것들… 파는 쓸 데라도 있지!”
그것이었다. 이 참혹한 사고 뒤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던 것, 그것은 바로 파만도 못한 인간들이었다. 차고 어두운 바다, 그 거센 물살 속으로 저 많은 생명을 밀어 넣은 지 수십 일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 이제는 도서관으로 변한 옛 시청 벽에는 ‘미안합니다’라고 써 붙인 큰 글자가 보인다. 이곳만이 아니다. ‘미안하다’는 현수막이 온갖 단체들 이름으로 나부끼고 크고 작은 노란 리본으로 장식까지 해서 현관에 내건 건물도 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 부끄러움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은 내 집 앞에까지 보인다.
묻고 싶다, 겨우 ‘미안한 일’로 끝인가. ‘미안하다’고 펄럭이는 그 현수막들은, ‘미안해.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미안해, 한번 봐 줄 수 없어?’ 나는 그렇게만 보인다. 그러나,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건 ‘미안해’로 끝내서는 결코 안 되는 일이다.
‘그냥 좀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말을 잇지 못한 유가족 어머니의 이 말, 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엄마가 억지로 보낸 거니까 미안해’ 팽목항 노란 리본에 적혀 있다는 문구다. 이 어머니는 수학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아들의 등을 떠밀어 보낸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 ‘아이를 말 잘 듣게 키운 게 너무 후회된다’는 유가족의 말에 할 말을 잃는다. 남아 있으라는 안내방송,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 그 악마의 속삭임을 그대로 따른 말 잘 듣는 자식을 키운 것을 이제와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여기 유가족들 중에 정말 잘 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 빌라에서 전세살고 이런 분이에요. 당장 내일이라도 일터에 가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너무 지치게 만든다구요’ 정부를 향해 울먹이는 유가족의 말에는 가슴이 시리다 못해 저려온다.
이분들은 말해도 된다. ‘미안해’라고 말해도 된다. 자신은 목구멍에 물 한 모금이 넘어가지 않는 몸이지만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위해 아이가 잠겨 있는 바다를 향해 음식을 던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짓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말이다.
‘얼마나 배 고프니? 얘야, 미안하구나.’ 아이의 유골을 안치할 곳이 없어서 유골함을 안고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가족은 물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래 놓고도, 사고 후 뒤처리마저 이 지경인데도, 대통령의 사과답지도 않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청와대 대변인은 감히 유가족에게 ‘유감’이라고 그야말로 ‘막말’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돈이 넘치는 이동통신사는 죽은 아이들에게 휴대전화의 위약금까지 받으려고 대든다. 이게 우리들의 나라였다니. 이게 이 나라, 이 정부의 정서이자 의식이란 말인가.
미안하다고 써 붙인 현수막을 보며 내가 느낀 절망감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4대악 근절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 관공서마다, 거리마다, 내 서재가 있는 면소재지 허름한 길가에 내걸린 현수막에도 있는,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불량식품’을 근절하겠다며 이 정부가 내건 현수막이다. 이렇게 써 붙인 현수막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터져 나온 것이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이었다. 안전행정부라고 이름까지 바꿔가면서 안전을 내세우면 다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터진 것이 세월호 참사다. 글자 두 자를 앞으로 내세웠을 뿐 국민의 안전 같은 건 안전(眼前)에 없었으면서도 이름만 갈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이제 미안하다고 현수막에 써서 붙인다.
이번에 확인한 건 또 있다. 세속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래서 무슨 무슨 장(長)이 될수록, 더 많이 가지면 가졌을수록 그래서 그 재산이 몇 백억, 몇 천억일수록 이 땅에서는 도덕성커녕 파렴치에 가까운 정서와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리가 높을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사람 냄새가 사라지는 사회, 사람 냄새조차 없어야 더 높아지고 더 많은 것을 가지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
“물속 시신은 손이 떠 있어요. 저 좀 데려가라고 손짓하는 거예요. 이번에 세 명을 한 번에 몸에 묶어 데리고 나온 적도 있어요. 세 명을 데리고 나오다가는 제가 죽을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꺼내달라고 손짓하는데 어떻게 그냥 두고 갑니까.”
이 잠수사의 말, 이것이 사람의 말이다. 파만도 못한 것들이 득시글대는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말이다. 이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버리지 말라고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다.
‘미안합니다’가 아니다. 감히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건 유가족, 실종자 가족만이 그 피붙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미안하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다. 얼굴화장을 하면 아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상하지 않은 시신으로 돌아온다고 믿으며 화장을 하던 어머니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미안하구나. 얘야. 지켜주지 못한 어미를 용서해라’라고.
<독일영년(Germany Year Zero)>이라는 영화가 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1947년 작품이다.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주인공 소년이 아버지를 독살하고 자신은 투신자살하는 이야기를 담아 패전 후 폐허가 된 독일의 모습을 12살 아이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영년(Korea Year Zero)의 결의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대한민국영년의 마음으로 국가개조에 나서야 할 이때 문득 하나의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누가 그 일을 이끌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연이어 패해 오늘의 참극을 초래했다’는 의식을 가진 도지사 후보도 있으니 의약품 밀어놓고 라면 먹은 교육부 장관은 억울하긴 할 것이다. 박 뭐라는 전남도지사가 라면 먹자고 부추겨서 먹었는데 자기만 혼자 뒤집어썼으니 분하기도 할 것이다. 그걸 두고, 달걀도 넣지 않은 라면인데 뭘 그러느냐고 감싸고 든 게 청와대 대변인이다.
저 ‘장’들에게서, 저런 의식과 정서와 삶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에게 국가개조를 기대한다면 소가 웃을 일이다. 이 정부가 그 일을 해내리라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여기에 우리의 절망과 비극이 있다.
팽목항 거리에서 파를 다듬던 할머니의 한마디가 지금도 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아, 파만도 못한 우리들. 우리들의 2014년 봄의 초상이 부끄럽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5호(2014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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