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봉권 특파원의 월스트리트 인사이트]위험자산으로 추락한 채권에 엘 에리언 핌코 前 CEO 퇴진

    입력 : 2014.05.16 14: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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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21일 월가가 술렁거렸다. 2조달러에 가까운 천문학적인 자산을 굴리는 세계 최대 채권자산운용사 핌코의 모하메드 엘 에리언 최고경영자(CEO) 겸 최고투자책임자(CIO)가 전격 사퇴를 발표했기 때문이다.(엘 에리언은 지난 3월 공식으로 CEO직에서 물러났다.) 머지않아 엘 에리언 CEO가 핌코 설립자인 채권왕 빌 그로스 공동 CEO 겸 CIO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점을 시장이 당연시 해왔다는 점에서 핌코를 떠난다는 그의 발표는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 2007년 말부터 5년 넘게 핌코 공동 CEO를 맡아온 엘 에리언와 핌코 설립자 그로스의 동거가 오랫동안 유지되기 힘들 것으로 봐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 둘은 서로 어울리지 않은 커플이었다. 일하는 스타일이 전혀 달랐고 성격차이도 심했다. 엘 에리언은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널 만큼 심사숙고하는 치밀한 스타일이다. 트레이더(Trader)라기보다는 조직적인 접근방식을 취하는 이코노미스트다. 반면 블랙잭 전문플레이어였던 그로스는 빠른 계산과 돈 냄새를 잘 맡는 동물적인 투자감각이 뛰어난 스타일이다. 특히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독선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판이한 성격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엘 에리언(55)은 70줄에 접어든 그로스를 멘토로 대접했다. 그러면서 상이한 스타일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보완재로 작용하면서 변동성이 심한 시장에서 핌코가 탁월한 투자수익을 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이끌어왔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뒤 경기부양을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시행한 비전통적인 양적완화(QE) 통화정책과 초저금리 기조가 힘을 발휘하면서 채권시장이 유례없는 활황을 보이면서 둘 사이에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채권랠리로 핌코가 운용하는 채권펀드 수익률이 지속적인 호조세를 보이고 투자자금도 끊임없이 펀드로 유입됐기 때문이다. 좋은 실적이 그로스 창업자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빚어지는 갈등과 긴장, 의견의 차이를 수면 아래로 잠복시키는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벤 버냉키 당시 연준 의장이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 가능성 발언을 한 이후 상황이 확 달라졌다. 연준이 긴축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분위기 속에 두 달여 만에 10년 만기 국채수익률이 1.0%포인트 폭등(채권가격은 그만큼 하락)하는 등 채권시장이 대혼란에 빠졌다. 채권가격 하락에 따른 손실을 줄이기 위해 투자자들이 채권을 앞다퉈 팔아치우는 투매현상까지 나타나면서 채권값 하락압력이 더욱 강해졌다. 당연히 채권자산을 대거 보유하고 있는 채권펀드 수익률이 날개 없는 추락을 시작했다. 채권에 투자하면 원금은 보전한다는 믿음이 깨지면서 채권펀드에서 뭉칫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해 6월 한 달간 그로스 창업자가 직접 운용하는 핌코의 대표펀드 토털리턴펀드에서 96억달러가 인출되는 환매사태가 벌어졌다. 채권수익률 하락과 대규모 인출사태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그로스 창업자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엘 에리언 CEO를 포함한 고위 임원들에 대한 질책이 늘어나고 관계가 급격하게 나빠진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해 6월 어느 날 캘리포니아 주 뉴포트비치에 위치한 핌코 본사에서 열린 투자전략 회의에서 그로스와 엘 에리언 간 감정의 골이 더 이상 회복되기 힘들 정도로 벌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규모 자금이탈과 수익률 하락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로스의 칼날이 엘 에리언에게 향했다. 그로스는 “나는 지난 41년간 탁월한 투자실적을 내온 레코드를 가지고 있다”며 “당신(엘 에리이언)은 도대체 무엇을 내세울 수 있느냐”고 공격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그로스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던 엘 에리언도 이날은 물러서지 않았다. 엘 에리언은 “나는 당신이 퍼질러 놓은 일을 처리하는 데 이제 진력이 난다”며 맞받아쳤다. 그러면서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직원들을 몰아붙이는 공격적인 소통방식과 과도한 업무부담 개선을 그로스에게 요청했다. 대다수 핌코 직원들은 월가에서 거래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 오전 4시 30분에 출근해 오후 5시 이후까지 근무하는 등 하루 12시간 이상 회사에 머문다. 근무 중에 그로스는 직원들이 그에게 말을 걸거나 눈을 마주치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오전 근무시간에 말을 하는 직원이 있으면 심지어 투자관련 대화를 나눠도 정색을 하면서 꾸짖기도 한다. 다혈질인 그로스가 직원을 해고하는 일도 잦은데 일부 직원들은 당장 짐을 싸지 않고 그로스의 화가 삭아들기만을 기다린다고 전해진다. 그로스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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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면적으로 그로스와 엘 에리언 등 10여 명의 고위임원들이 오전에 모여 매일 투자전략 회의를 하고 여기서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 핌코 투자결정 과정은 그로스 창업자가 주도하는 일방통행식이라고 미국 언론들은 지적한다. 그로스는 투자전략을 꽉 쥐고 다른 임원들이 들어올 틈을 내주지 않는 반면 엘 에리언은 다른 매니저들에게 더 많은 투자재량권을 주자고 요구해왔다. 하지만 그로스는 자신의 투자전략에 다른 사람들이 이견을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번은 고위 투자매니저 한 명이 그로스가 운용하는 펀드에 편입된 채권 포트폴리오 값이 다소 비싸보인다는 의견을 내자 곧바로 “그래? 그럼 더 많이 사들여라”며 무안을 주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그로스와 엘 에리언은 핌코 펀드상품과 투자방식을 놓고서도 의견이 서로 맞섰다. 엘 에리언은 채권에만 집중돼 있는 펀드구성을 주식으로 확대하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그로스 창업자는 기존 채권위주 투자패턴을 고수하며 엘 에리언의 의견을 묵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회의실에서 주식 이야기가 나오면 그로스는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자리를 떠버려 대화 자체를 끝내버리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정반대 업무스타일과 그로스의 독선적인 성격 탓에 두 사람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균열이 생겼지만 정작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핌코라는 자산운용사 통제권을 둘러싼 자존심의 충돌이라는 진단이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떠있을 수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주는 교훈이다.

    엘 에리언이 핌코를 떠났지만 그의 커리어가 여기서 마감되는 것은 아니다. 핌코와의 연은 끊었지만 핌코 모회사인 독일 보험사 알리안츠그룹 경영진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경영진을 상대로 글로벌 경제이슈와 관련된 조언자 역할을 지속한다. <중앙은행의 부침:(The Rise and Possible Fall of Modern Central Banking)>이라는 제목의 책도 올해 말까지 저술할 예정이다. 핌코를 떠나자마자 지난 3월부터 트위터를 개통하는 한편 각종 매체에 기고를 시작하는 등 제 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이집트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난 엘 엘리언은 국제통화기금(IMF)을 거쳐 지난 1999년 핌코와 연을 맺었다. 2006년 핌코를 떠나 하버드 기금을 운용하는 하버드매니지먼트 사장으로 옮겼다가 지난 2007년 핌코 CEO로 복귀한 바 있다. 이처럼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엘 에리언의 뛰어난 인사이트와 역량으로 볼 때 결국 연로한 그로스 은퇴이후 다시 핌코를 이끌어가는 대임을 맡을 수도 있다는 게 호사가들의 진단이다. 이집트 재무장관으로 금의환향될 것이라는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있다.

    [박봉권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4호(2014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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