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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레이(丁磊) 넷이즈닷컴 최고경영자 | 온라인 게임 강자로 자리 잡은 中 최초 포털
입력 : 2014.05.16 10: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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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넷이즈의 창업자는 중국의 ‘빌 게이츠’로 비유되는 딩레이(丁磊·43) 최고경영자(CEO)다.
언론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중국인들에게도 낯선 그는 지난 1971년 저장성 닝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신동으로 유명했다.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전기제품을 분해했다가 조립하는 것을 좋아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라디오를 직접 조립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당시 딩레이가 만든 라디오는 중파와 단파, FM 방송을 모두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마추어가 만들 수 있는 라디오로는 최상급의 제품이었다. 동네 어른들은 그에게 “나중에 크면 꼭 훌륭한 과학자가 될 재목”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졸업한 그는 1989년 서부 내륙의 쓰촨성 청두에 있는 전자과학기술대학에 들어갔다. 당시 기차를 타고 중국 대륙을 동에서 서로 관통하면서 수십 시간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대학을 간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전자과학기술대에 입학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햇빛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습한 청두 날씨에 적응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긍정적인 성격 덕분에 늘 웃는 얼굴로 다녔다고 한다. 과에서 부대표를 맡을 정도로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관심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는 학교 도서관에서 과학기술 분야에서 새로 나온 외국 서적을 탐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가 당시 중국에서 누구보다 최신의 세계 과학기술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이유다. 딩레이는 그 중에서도 컴퓨터 관련 서적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덕분에 당시 중국에 제대로 소개되지도 않았던 인터넷 관련 정보를 먼저 섭렵할 수 있었다.
딩레이의 지도를 맡았던 펑린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1992년 겨울 딩레이가 4학년 첫 학기를 맞이했을 때 소프트웨어 전시회가 열렸는데 당시 그가 보여준 지식과 능력은 나를 감동시킬 정도였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딩레이는 고향인 닝보시 전신국에 들어갔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공무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공무원은 일반 직장에 비해 오히려 대우가 좋을 때였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좋은 직장이었다. 그러나 딩레이는 시간이 갈수록 고민이 늘었다. 전신국 업무를 2년 정도 해보니 머리를 쓰는 일보다는 몸을 쓰는 일이 많았다.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1995년 가족들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훗날 딩레이는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당시 그 결정은 내가 처음으로 나 스스로를 직장에서 내쫓은 결단이었다. 사람은 일생에 매우 많은 기회에 직면하게 되지만 기회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여부가 종종 인생의 분수령을 만들곤 한다.”
그가 전신국을 나와 선택한 직장은 미국 데이터베이스 회사인 사이베이스 광저우지사였다. 미국의 IT기업이다 보니 전신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첨단기술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미국에서 막 시작되고 있던 인터넷 비즈니스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중국에서도 머지않아 인터넷 비즈니스가 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1년 정도의 근무는 그에게 충분한 시간이었다. 인터넷 관련한 회사를 직접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자 더 이상 회사를 다니는 것은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딩레이는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팔아 마련한 자금과 친구들에게서 빌린 돈을 모아 1997년 넷이즈를 설립했다. 인터
이후 성공을 거듭하던 넷이즈는 지난 2000년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중국 언론에서는 인터넷 창업으로 성공한 딩레이의 성공 스토리를 소개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넷이즈가 상장하던 당시 미국에서는 IT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 넷이즈도 증시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주가가 한때 주당 1달러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때맞춰 넷이즈의 실적도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딩레이는 사면초가에 놓였다.
이때 딩레이를 살린 것은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인터넷 붐이었다. 시골의 구석구석까지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PC방으로 젊은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 이들은 PC방에서 용돈을 물 쓰듯이 쓰기 시작하면서 인터넷 기업들의 실적이 빠르게 회복됐다. 넷이즈도 2002년부터 다시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다. 주가도 회복세로 돌아섰다. 넷이즈가 나스닥 최고의 우량주로 부상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세를 몰아 딩레이는 2003년 포브스가 선정한 중국 최고 부호에 등극했다.
넷이즈닷컴은 이후 게임사업과 모바일, 검색, 광고, 콘텐츠, 전자상거래 등 인터넷 변화와 더불어 변신을 거듭하면서 사업을 확대해나갔다. 딩레이는 지난 2010년 22억달러 재산을 기록해 미국 포브스지 선정 세계 부자순위 437위에 올랐다. 지난해는 중국 재벌 순위에서 154억8000만위안을 기록해 34위를 차지했다.
딩레이가 대단한 것은 자신의 전공인 IT사업에 만족하지 않고 양돈과 도자기, 포도주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IT 전문가로서 뿐만 아니라 진정한 사업가로서 인정받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가 가장 먼저 손을 댄 신규 사업은 양돈사업이다. 지난 2009년에 양돈사업에 착수했다. 저장성 안지 24만평 땅에 10만 마리 사육이 가능한 돼지사육장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딩레이는 나름대로 양돈사업을 착실히 준비했다. 그는 사육장 건설 계획을 수립하기 전에 윈난성과 저장성, 광둥성, 산둥성, 네이멍구자치구, 신장위구르자치구 등 각지의 농축산 현장을 돌아다녔다. 양돈사업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현장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딩레이는 2011년 저장성 닝보보세구에 설립된 와인회사 주주로도 참여했다. 프랑스로부터 수입한 와인을 판매하는 기업이다. 주로 수천 위안에서 수만 위안짜리 고급 와인 판매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미 상하이와 저장성 원저우, 광둥성 광저우 등 주요 도시에서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가 직접 와인 생산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런 사실은 부정했다. 토양과 기후 등 모든 조건을 맞춰야 하는 와인 생산업자가 되기에는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가 부족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는 “전문 와인 수입상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고 답했다.
그렇다고 넷이즈가 IT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넷이즈는 최근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중국판 카카오톡’인 텅쉰(텐센트)의 웨이신(위챗)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넷이즈는 중국 3대 이동통신회사인 차이나텔레콤과 손잡고 웨이신의 대항마 성격의 ‘이신’을 출시했다. 이신은 지난해 8월 출시하자마자 앱스토어 무료 앱 순위 3위, 소셜 네트워크 앱 순위 1위에 오르는 등 기염을 토했다. 출시 2개월 만에 사용자 3000만명을 돌파하고, 하루 사용자 수 20만명을 넘어섰다.
이런 성공에도 딩레이는 외부 행사에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조금만 성공해도 유명해지기 위해 애쓰는 경영자들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딩레이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학창시절부터 원래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그런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새로운 비즈니스 구상과 업무 추진에 시간을 쏟다보니 다른 일은 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가 중국에서 보기 드문 유형의 CEO로 분류되는 이유다.
[정혁훈 매일경제 베이징 특파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4호(2014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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