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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입력 : 2014.01.09 17:5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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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늙어서 그럴 것이다. 늙어서도 제대로는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권리이고 의무다. 어쨌든 늙은 나부터 보호하려고 눈과 귀를 닫았을 것이다. 사실 온갖 보도라는 것이 사회구성원의 ‘알 권리’에 해당하는 것일 텐데, 솔직히 진절머리가 나서 귀와 눈을 닫았으니……. 그 권리를 찾다가 혹은 누리다가 정신건강을 해치고 내 정신으로 살지 못할 것 같은 위기를 느꼈음을 고백한다. 사기(詐欺)의 날고뛰는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하고 폭행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더군다나 ‘묻지마’라는 범행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단다.
이젠 신문도 읽고 지상파의 뉴스도 본다. 스마트폰으로 심심하면 뉴스를 검색한다. 갑자기 정신이 건강해져서는 아니다. 어쩌면 피하고 싶은 이 현상들, 조건들, 환경들도 내 삶의 구성체이므로 피해선 안 된다는 각성이 저절로 일어났을지 모른다. 아니면 담대해지려는 노력의 결과일까?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돌아왔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고 서쪽으로 해가 뜨지 않으며 별자리가 바뀌고 사방팔방의 방위가 달라지지도 않는다.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수많은 삶의 환경들도 나무처럼 잎을 떨어뜨리거나 새 잎을 돋우거나 하면서 변화를 거듭하며 여전히 상존한다. 이웃나라 일본은 독도를 두고 점점 더 우리를 옥죄인다. 이어도를 두고 중국은 어떤가. 일본으로 말하자면 식민통치 시절의 뿌리가 여전히 남아서 강제징용, 위안부 등의 문제로 상존한 채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민족적 수모는 집단무의식에 적개심과 공포와 비굴로 남아있다.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변방의식을 반추시킨다. 조공을 받던 소수민족이라고. 거기에 가깝고도 아득한 북녘의 민족은 어떤가. 대통령을 비롯해 안보 관련높은 분들은 1월에서 3월에 북한의 도발위험성이 크다고 말한다. 아직도 혈연을 휴전선 너머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이 있는 그곳에서, 이곳으로 ‘죽이러’ 온단다. 전쟁도발 가능성은 이런 두려움과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상처의 기억법이다.
아무리 요즘 세대가 죽이고 살리는 게임 삼매경에 빠져서 ‘전쟁’을 오락으로 느끼는 감각이 돌연변이처럼 발달했다 할지라도 전쟁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가장 큰 재앙이다. 비록 아주 작은 지역의 도발과 응징이라도, 그래서 전쟁이라기보다 분쟁이라는 말이 더 순하게 들리더라도 전쟁은 우리의 삶을 험악하게 유린한다. 뿐 만인가. 집이나 방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주거공간에서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며 사는 이웃이 100만명이 넘을 거라는 추정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이웃의 절대 빈곤과 절대 실업, 넘쳐나는 신종 사기, 대기업의 반사회적 도덕불감증 따위도 여전하다. 이들 속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것과 새로 생겨나는 불안한 요소들이 상존한다.
그럼 우린 어떡해야 할까.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런 문장을 쓰고 나니 잠깐 손이 멈칫한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치미는 슬픔 때문이다. 잠깐 우리 영혼의 밑바닥으로 천착해 들어가면 모든 행복과 희망은 불행과 절망 속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희망을 잡기 위해 먼저 불행과 절망에 당당해져야 한다. 그래서 슬픔이 밀려온다. 누군들 알 수 없는 불행의 덩어리를 맨손으로 헤집어 볼 수 있을까. 누군들 절망의 늪으로 발을 풍덩 담글 수 있으랴.
그러나 그래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아직 겨울 찬바람이 부는 들녘에 나가 거름을 주고 새로운 흙을 퍼 나르는 농부의 풍성한 가을에 대한 희망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이른 아침 첫 번째 지하철에서 졸린 눈을 부비며 먼 공장과 일터로 향하는 이웃들의 빈손에 겸손히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넘치는 물질에 정신을 잃은 사람이 있다면, 탐욕과 욕망에 정신이 혼미해진 사람이 있다면, 야망에 사리분별의 평상심을 잃었다면, 지금 바로 부끄러움을 되찾으려고 애써야 한다. 물신숭배와 탐욕과 야망은 모두 절망과 불행의 다른 이름이며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글을 썼다. 부끄러움은 창피한 것이 아니라 자기성찰의 아름다운 징후일 것이다. 나 혼자 잘 살면 무슨 재미인가? 이런 글을 쓴 분도 있다.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들의 특징은 소유를 최소로 줄였다는 것이다.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시골의 할머니들을 보면 그슬린 얼굴과 주름에도 아름답다. 그 소박함과 인정스러움이 부러워야 한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태도는 자기 생을 사랑하는 거다. 사랑의 힘으로만이 이웃을 사랑 할 수 있으니.
2014년, 갑오(甲午)년 한 해. 행복해지고 싶다면, 조금 더 희망적이고 싶다면 우리 모두 ‘덜어내기’를 거듭하면 어떨까. 덜어내고 빈틈을 만들고 그 빈틈으로 행복과 희망이 들어오도록 길을 내주면 어떨까. 부끄러움을 자주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자긍심이 자라날 테니. 자긍심은 사랑의 어머니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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